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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의 변방별곡] 아! 류샤오보

반병희 기자입력 : 2017-07-16 20:00수정 : 2017-07-16 20:00
서명수의 변방별곡
작가·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아! 류샤오보

[사진=서명수]



"류샤오보는 중국 헌법에 규정된 정치 시스템을 전복하고, 이를 서구 정치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가 중국의 안정과 국가 안보에 도전했기 때문에 중국 사회는 그를 경멸하고 반대한다."
“우리는 중국 민주화의 상징이자 거목을 잃었다.”
13일 간암으로 사망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劉曉波·1955-2017)에 대한 중국정부와 국제사회의 평가는 이처럼 극과 극이다.
투옥 중이던 201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결국 죽어서야 ‘자유’로워진 그의 처지는 중국의 인권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정부는 류샤오보가 사망하자 성대한 장례식 대신, 서둘러 화장을 해서 유해를 바다에 뿌리도록 하는 등 파장 최소화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의 유해가 자칫 중국민주화의 상징적인 이슈가 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나섰다. '바이두(百度)'를 비롯한 중국의 유명 포털사이트 어디에서도 류샤오보 사망에 대한 뉴스는 고사하고 ‘류샤오보’라는 이름조차 검색되지 않는다. ‘만리방화’라고 불리는 중국의 인터넷 차단장치는 이번에도 철저하게 작동하고 있다.
아무리 철통같이 방어를 하더라도 SNS를 통한 확산은 막을 수는 없다.
그런데 난리가 났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중국사회는 의외로 류샤오보의 사망에 대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 있는 몇몇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류샤오보의 사망에 대해 담담해했다. 중국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사람이 사망했는데도 중국은 ‘웬 호들갑이냐‘는 식이다.
이는 노벨 평화상 수상 당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다는 여론조사와도 직결돼 있다.
그래선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는 중국 내에서 전혀 찾아보기 힘들다. 웨이보 등의 SNS를 통해 류샤오보의 사망소식이 확산되고는 있지만 전 세계가 류샤오보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을 추모하면서 중국당국의 반인권적 상황을 비난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인 세상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오랜 투옥생활 끝에 사망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광화문광장에 수백만개의 촛불이 켜지고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을 법한 사태다.
이는 중국사회와 류샤오보를 격리시켜온 중국정부의 노력이 성공한 결과이기도 하고, 류샤오보가 지속해온 민주화투쟁 활동이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중국은 지난 2010년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감옥에 있던 그를 석방하기는커녕, 그의 부인마저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국제사회와는 다른 반인권적인 조치를 강화해왔다. 중국은 류샤오보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는 행위 자체를 서방의 대중국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류샤오보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이와 별도로 류샤오보가 그때까지 중국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대중적 인사가 아니었다는 점도 그의 죽음에 대해 냉정한 또 다른 이유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는 그동안 지나치게 친서구적인 정치적 성향을 보여왔다.
글로벌타임스가 지적하듯이 중국의 민주화를 추구하면서 중국이 홍콩 정도(의 민주화)라도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0년은 (서구의)식민지가 되어야 한다면서,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다소 괴리된 인식을 보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힌 후 그의 활동이 중국사회와는 다소 격리된 채 홍콩이나 서구사회로 집중돼 있었다는 점도 대중적인 민주화투사로 각인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그가 신중국의 ‘금기(禁忌)' 중 하나로 꼽히는 톈안먼 사태와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중국정부는 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순간, 톈안먼 사태와 그 후의 그의 투쟁에 대해 새롭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톈안먼 사태의 핵심 지도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고 이후의 민주화투쟁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전까지 정치적 이슈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톈안먼 사태가 발발하자 뉴욕의 컬럼비아대 버나드 칼리지(Barnard College)에 방문 학자로 체류하다 즉각 귀국해 톈안먼 광장에서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과 더불어 학생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톈안먼 사태 뒤 대부분의 지도부가 해외 망명을 선택했던 데 반해 그는 중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면서 평생을 중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왔다.
어쨌든 중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정부를 비판하거나 점진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을 이어온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의 죽음이 중국의 민주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대장정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의 중국 상황은 요원하다. 그러나 중국 역시 국제사회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류샤오보의 외로운 투쟁과 불굴의 용기에 깊은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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