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고등학교 개교 80주년 특별기획] 한 가문의 교육 헌신이 대한민국 인재의 숲을 이루다…용문 80년의 역사와 미래

  • 1946년 성도중학교에서 강문고등학교를 거쳐 용문고등학교로…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80년을 함께하다

  • 해촌 김용주와 임당 김문희, 반세기에 걸친 교육 헌신…1000억 원 이상의 사재 출연으로 사학 발전의 토대를 세우다

  • 밤의 교실에서 기업을 일군 구자관, 법치의 이찬희, 정치의 임종석·우상호·김교흥…국방과 문화예술까지 뻗어간 인재의 숲

  • 조영남·백일섭·한석규·김상중·유재석 등 대중문화의 별들…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의 정신으로 인공지능 시대와 다음 100년을 향하다

  • 10월 12일 개교 80주년 맞아…16일 오후 7시 '개교 80주년 한마음대축제' 개최 예정

한 학교의 80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용문고가 올해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1946년 10월 12일 성도중학교로 출발한 이후 강문고등학교를 거쳐 1970년 현재 교명인 용문고등학교로 변경됐다 교훈은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다 사진아주경제 DB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용문고가 올해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1946년 10월 12일 성도중학교로 출발한 이후 강문고등학교를 거쳐 1970년 현재 교명인 용문고등학교로 변경됐다. 교훈은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다. [사진=김준환 기자]
학교에는 두 개의 역사가 있다. 하나는 교문과 교실, 운동장과 교과서에 기록된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학교를 거쳐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삶 속에 남아 있는 역사다. 전자가 건물과 제도의 역사라면 후자는 인간과 정신의 역사다. 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나 웅장한 건물을 세웠느냐보다 그곳에서 배운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자신이 받은 교육을 어떻게 사회에 돌려주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2026년 10월 12일 개교 80주년을 맞은 서울 성북구 안암동의 용문고등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조명할 만한 학교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6년 성도중학교로 출발해 강문고등학교를 거쳐 오늘의 용문고등학교로 성장했다.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 산업화와 민주화, 고교 평준화와 정보화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한 교육기관이다.

학교 이름도 바뀌었고 교육제도도 바뀌었으며 학교를 이끈 사람들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 80년의 중심에는 교육을 통해 인간을 성장시키고, 인간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변하지 않는 가치가 놓여 있다.

용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임당(琳塘) 김문희와 그의 부친 해촌(海村) 김용주다. 1966년 김문희가 학교를 인수하고 김용주가 이사장에 취임한 것은 용문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국 근대 산업사의 한 축을 이루었던 기업가 집안의 자본과 경영 역량이 교육이라는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김용주는 전남방직 창업주이며, 김문희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누나이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다. 이 가문은 한국 방직산업과 기업사, 정치와 교육의 역사에 걸쳐 여러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용문 80년의 관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은 가문의 사회적 명성이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축적된 민간의 자본과 역량을 교육에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기업을 세우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공장을 세우면 제품이 생산된다. 그러나 학교를 세우고 키우면 한 세대가 성장하고, 그 세대가 다시 다음 세대를 키운다. 기업의 투자가 현재의 경제를 움직인다면 교육에 대한 투자는 미래의 사회를 움직인다.

용문고등학교의 80년은 이러한 교육 투자의 장기적 가치를 보여준다. 김문희와 김용주의 교육적 헌신이 학교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그 토대 위에서 성장한 수많은 학생은 정치와 경제, 행정과 법조, 국방과 문화예술 분야에서 각자의 삶을 개척했다.

특히 용문 출신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특징이 드러난다. 정치에서는 임종석과 우상호, 김교흥 등 민주화운동과 의정활동을 거쳐 국가 운영에 참여한 인물들이 있다. 군에서는 김운용 육군 대장과 신옥철 공군 중장이 배출됐으며, 공공부문에서는 산업과 에너지 분야를 이끈 인사들이 활동했다. 법조계에는 대한변호사협회를 이끈 이찬희가 있고, 문화예술계에는 조영남과 백일섭, 한석규, 김상중, 유재석 등 한국 대중문화의 여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용문의 중요한 자산이다. 좋은 학교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재능과 꿈을 가진 학생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용문의 80년은 그러한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성도중학교에서 강문고등학교로…폐허 위에 세운 배움의 터전
​​​​​​​용문의 뿌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가 기념하는 공식 개교일은 1946년 10월 12일이다. 성도중학교로 시작한 학교는 1949년 재단법인 겸산학원 설립을 거쳐 1952년 학제 개편에 따라 강문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953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의 세부 연혁에는 성도중학교 창립·개교와 관련해 별도의 날짜도 기록돼 있지만, 공식 설립일과 개교기념일은 10월 12일을 기준으로 한다. 교육부 학교알리미에도 설립일은 1946년 10월 12일로 공시돼 있다. 

1946년은 대한민국 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해방은 되었지만 나라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체계를 세워야 했으며, 무엇보다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학교의 문을 열어야 했다. 당시 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단순한 교육사업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사회적 실천이었다.

성도중학교 역시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학교의 출발이 오늘날처럼 풍족했을 리 없다. 그러나 해방 이후 교육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시대적 열망은 분명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세대에게 교육은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었고,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에게는 신분과 환경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학교교육은 다시 시련을 맞았다. 전쟁은 교실을 무너뜨리고 가족을 흩어 놓았으며 수많은 청소년의 배움의 기회를 앗아갔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1952년 강문고등학교의 설립 인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국가의 운명조차 불확실하던 시절에도 교육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마주한 가장 절박한 과제는 재건이었다. 도로와 공장을 다시 세우고 집을 짓는 일도 중요했지만,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내는 일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은 이러한 교육의 토대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강문고등학교 역시 전후 한국 사회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장했다. 황진호 교장이 확인한 졸업 기록에 따르면 1955년 제3회 졸업식에는 주간 75명과 야간 65명이 졸업했다. 학교의 공개 연혁에는 1956년 야간 2부 설립 인가가 기록돼 있어 두 기록의 제도적 관계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일찍부터 일과 배움을 병행하는 학생들이 있었다는 점은 용문의 교육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에는 배움을 이어가려는 청소년들에게 학교는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 주었다. 교육의 역사를 명문대학 진학률이나 시험 성적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 때문에 낮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청소년에게 밤의 교실을 열어 주는 일,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던 젊은이에게 졸업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 역시 교육의 위대한 성취다.

1964년 창신동에서 안암동으로의 이전은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은 대학과 학교, 주거지역이 함께 발전한 교육문화의 공간이다. 용문은 이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면서 장기적인 성장의 기반을 확보했다. 그러나 오늘의 용문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더 큰 변화가 필요했다. 그 전환점이 바로 1966년이었다.
1966년의 결단…김문희와 김용주가 용문을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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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주경제  DB
[사진=김준환 기자]
용문고등학교 8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는 1966년 12월 26일이다. 이날 임당 김문희가 학교를 인수하고 부친 해촌 김용주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70년 3월 1일 학교법인은 용문학원으로, 학교는 용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김문희가 교장에 취임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학교 이름의 변경 자체가 아니다. 새로운 경영 주체가 들어오면서 교육시설과 학교 운영에 대한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김문희는 1928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교육자이자 사회활동가였다. 부친 김용주는 전남방직 창업주였으며, 김문희는 훗날 현대그룹을 이끈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는 남매 관계다.

이 가문의 계보는 한국 근대 산업사의 중요한 흐름과 연결된다. 경성방직으로 대표되는 근대 방직산업의 역사, 김용주의 전남방직 창업, 현대그룹과의 혼맥, 김무성으로 이어지는 정치 활동까지 기업과 교육, 정치가 한 가족사 안에 교차한다. 그러나 용문의 80주년을 기념하면서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은 가문의 사회적 명성이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축적된 민간의 자본과 역량을 교육에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학교 연혁은 그 변화를 구체적인 숫자로 보여준다. 1967년에는 학교부지 1만3500평을 매입했고, 1969년에는 건평 2800평의 5층 교사를 준공했다. 1971년에는 별관을 신축하고 운동장을 확장했으며, 1972년에는 과학관과 제2운동장을 완성했다. 1975년에는 체육관이 들어섰다.

당시 한국의 경제 수준과 사립학교의 재정 여건을 생각하면 이러한 투자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더욱이 건물만 늘린 것이 아니라 과학관과 체육관, 운동장 등 학생들의 지성과 체력을 함께 기를 수 있는 시설을 확충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교육을 단순한 입시 준비로 보지 않고 전인적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한 투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문희의 교육사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95년 용문학원장에 취임했고 1998년부터 2017년까지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청소년 교육과 여성의 사회참여에도 관심을 기울여 전문직여성 한국연맹과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총재,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교육과 청소년 육성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용문학원에 대한 장기간의 재정적 지원이다. 현대그룹이 2025년 김문희의 별세 당시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가 학교를 명문 사학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출연한 사재는 누적 1000억원 이상이었다. 2005년에는 임당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에도 힘썼다.

이 숫자는 용문 80년을 평가할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 번의 기부나 단기간의 학교 운영이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교육에 자원을 투입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투자한 즉시 성과가 나오는 사업이 아니다. 한 학생이 성장해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십수 년이 걸리고, 그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다시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김문희와 김용주가 용문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교사나 운동장만이 아니다. 교육은 오래 기다려야 하는 사업이며, 그 기다림에 필요한 자원을 사회가 함께 부담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2025년 12월 24일 김문희 명예이사장은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2026년 용문고등학교 개교 80주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처음 맞는 중요한 개교기념일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80년의 역사를 기리는 일은 곧 그가 남긴 교육적 유산을 돌아보고, 그것을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고교 평준화와 야간학교, 용문은 어떻게 인재의 숲이 되었는가
​​​​​​​1970년대 대한민국 교육사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고교 평준화 정책이었다.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시작된 고교 평준화는 중학교 졸업생을 입학시험 성적에 따라 고등학교에 서열화해 배치하던 종전의 구조를 바꾸었다. 학교별 선발시험을 없애고 학군에 따른 배정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고등학교 교육의 기회와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이 제도의 취지는 과열된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고등학교 사이의 지나친 서열화를 줄이는 것이었다. 물론 평준화가 모든 교육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 간 교육환경의 차이와 학군에 따른 격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 비교하면 다양한 배경과 잠재력을 가진 학생들이 여러 학교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졌다.

용문고등학교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맞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교육시설 확충이 1970년대 평준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학교의 교육환경과 학생 구성에도 변화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용문이라는 학교가 가진 독특한 성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기업가 가문의 교육 투자를 통해 시설과 제도를 갖추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학교를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즉 교육시설의 현대화와 교육 기회의 확대가 한 학교 안에서 함께 이루어졌다.

명문학교를 정의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뛰어난 시험 성적과 대학 진학 실적을 강조하는 학교도 있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집중적으로 길러내는 학교도 있다. 그러나 용문의 역사는 그보다 폭넓은 의미의 명문학교를 생각하게 한다.

정치인을 배출한 학교, 법조인을 배출한 학교, 기업인을 배출한 학교, 배우와 가수, 방송인을 배출한 학교라는 표현은 각각 하나의 성취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인재가 나왔다는 것은 학교가 학생들의 서로 다른 가능성을 품을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학생이 같은 꿈을 꾸는 학교보다 서로 다른 꿈을 가진 학생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학교가 더 건강한 교육 공동체일 수 있다. 과학자가 될 학생과 배우가 될 학생, 판사가 될 학생과 기업가가 될 학생, 군인이 될 학생과 음악가가 될 학생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교육적 자산이다.

용문고등학교의 교훈은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다. 배우자는 지식과 지혜를 쌓으라는 뜻이고, 참되자는 인간으로서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라는 뜻이며, 이기자는 어려움과 한계를 극복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된 가치가 아니다. 배우지 않고는 성장하기 어렵고, 참되지 않고는 사회의 신뢰를 얻기 어려우며, 어려움을 이겨내지 않고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 용문의 80년은 이 세 가지 가치가 서로 결합할 때 교육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임종석·우상호·김교흥…대한민국 정치사의 현장을 걸어온 용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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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주경제 DB
[사진=김준환 기자]
용문고등학교의 인재 배출 역사에서 주목해야 할 분야는 정치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과 정당정치, 청와대와 국회, 지방자치의 발전 과정에서 용문 출신 인물들이 다양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한 학교의 동문 가운데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과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지녀야 할 다양성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그 중심에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있다. 전남 장흥 출신인 임종석은 1985년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제3기 의장을 맡으면서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후 제16대와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거쳐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

임종석의 정치적 궤적은 대한민국 민주화 이후 정치사회의 변화를 보여준다. 대학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운동 지도자가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고, 국회의원과 지방행정 책임자를 거쳐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가 운영의 핵심 직책을 맡은 것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와 정책적 선택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양할 수 있지만, 한 학교의 동문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청년이 국가의 주요 직책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은 기록할 만하다.

우상호 역시 용문 출신 정치인의 중요한 축이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국회의원으로 여러 차례 당선됐으며 정당의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임종석과 우상호는 대학 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이라는 공통의 시대적 경험을 공유했다. 서로 다른 대학에서 활동했지만 두 사람 모두 용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용문의 동문사가 만나는 지점이다.

김교흥도 주목할 만하다. 인천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학생회 활동을 거쳐 정치권에 진출한 그는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 국회의장비서실장, 국회사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제21대와 제2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임종석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행정부의 중심에서 활동했다면 우상호는 국회와 정당정치에서, 김교흥은 국회와 지방행정을 넘나들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세 사람의 이력은 서로 다르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 제도의 발전 과정과 연결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용문 출신 정치인을 이 세 사람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김낙성은 충남 당진군수와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용구는 중소기업계에서 활동한 뒤 국회의원으로 진출했다. 양경규는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이상규 역시 국회의원을 지냈다. 차명진과 오경훈은 보수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조광한은 경기 남양주시장을, 박성수는 서울 송파구청장을 역임했다.

용문 출신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면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노선으로 묶을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의미 있다. 진보와 보수, 중앙정치와 지방행정, 노동운동과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 함께 존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견해의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학교는 특정 정파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공동체를 위해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정치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국민과 역사에 맡겨져 있다. 학교가 지켜야 할 가치는 특정한 정치적 성패를 넘어 진리와 정의, 자유라는 보편적 원칙이다. 용문의 정치인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학교가 하나의 이념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인재를 길러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김운용 육군 대장과 신옥철 공군 중장…국가 안보를 책임진 용문의 별들
​​​​​​​정치와 행정이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움직이는 영역이라면 군은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조직이다. 용문고등학교는 군에서도 고위 지휘관을 배출했다. 육군 대장과 공군 중장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용문 동문사의 중요한 기록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김운용 전 육군 대장이다. 그는 마지막 제3야전군사령관이자 초대 지상작전사령관으로 활동했다. 2017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해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됐으며, 이후 육군의 작전지휘체계 개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제3야전군은 당시 수도권과 중서부 전선의 방위를 담당하던 육군의 주요 작전사령부였다.

군인이 대장 계급에 이른다는 것은 군 조직의 최상위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국가 안보와 장병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랐다는 뜻이다. 군 지휘관에게는 작전 능력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의 판단력, 조직 운영 능력, 부하 장병에 대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공군에서는 신옥철 전 공군참모차장이 주목된다. 그는 공군사관학교 36기로 임관한 뒤 공군의 주요 지휘·참모 직책을 거쳤다. 제8전투비행단장과 공군공중전투사령관, 공군교육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중장으로 진급해 공군참모차장을 지냈다.

특히 신옥철은 공군 교육과 전투력 발전에 관련된 주요 직책을 맡았다. 공군교육사령관은 장병들의 전문성과 교육훈련 체계를 책임지는 자리이며, 공군참모차장은 공군 조직 전반의 운영을 보좌하는 핵심 지휘관이다.

육군의 김운용과 공군의 신옥철은 서로 다른 군종에서 활동했지만 국가 안보라는 공통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의 경력은 용문이 배출한 인재들이 기업과 정치뿐 아니라 국가 안보 분야에서도 활동해 왔음을 보여준다.

국가를 지키는 군인의 사명은 시대가 바뀌어도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안보의 개념은 전통적인 육해공 전력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이버 안보와 우주, 인공지능과 무인체계, 로봇과 첨단 반도체 등 새로운 기술이 국방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용문이 배출한 군 지휘관들의 경험은 후배들에게도 중요한 교육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책임과 절제, 조직과 공동체, 국가에 대한 봉사의 정신은 군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요구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재훈 등 산업·공공부문 인재, 국가 운영 현장에 서다
​​​​​​​용문 출신 인재들이 활동한 또 하나의 영역은 국가행정과 공공기관이다. 정치인이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참여한다면 공무원과 공공기관 경영자는 정책을 구체적인 제도로 만들고 국민의 일상에 적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분야에서는 정재훈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경력을 주목할 만하다. 산업정책과 에너지 분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그는 산업 분야 공직을 거쳐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과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을 지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자력과 수력발전을 통해 국가 전력 공급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공기업이다.

에너지는 산업의 기반이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이 발전할수록 안정적인 전력 공급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 분야 공기업을 이끈 정재훈의 경력은 대한민국 산업 발전사와 연결된다.

금융과 산업 분야에서도 용문 출신으로 소개되는 여러 인물이 활동해 왔다. 금융시장의 안정과 자본시장 정보기술, 기업 경영과 산업기술 발전에 종사한 동문들의 경력은 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의 활동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행정의 세계는 정치와 다르다. 정치적 판단이 정책의 방향을 결정한다면 행정은 법률과 제도, 예산과 조직을 통해 그 정책을 현실로 구현한다. 따라서 행정가에게는 전문성과 공정성, 책임성이 요구된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국가행정의 전문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에너지와 금융, 보건의료와 복지 등 모든 분야가 고도로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전문성을 갖춘 공직자와 공공기관 경영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용문이 배출한 행정·공공부문 인사들의 활동을 조명하는 일은 학교의 명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이 공공의 영역에 어떤 인적 기반을 제공하는지를 보여준다.
구자관, 밤의 교실에서 거대 기업을 일군 용문의 기업가
​​​​​​​용문고등학교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교육의 사회적 가치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을 꼽으라면 삼구아이앤씨의 구자관 창업자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삶은 단순한 기업 성공담이 아니라 가난과 노동, 배움과 도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어떻게 하나의 기업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구자관은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아이스크림과 메밀묵을 팔면서 장사의 세계를 배웠고, 학업을 이어가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선택한 학교가 용문고등학교의 전신인 강문고등학교 야간 과정이었다. 1963년 졸업한 그는 훗날 용문중·고등학교 총동문회장까지 맡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그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가난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낸 소중한 성취였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공장으로 출근했고, 노동한 뒤 학비를 마련해 야간학교에서 공부했다. 다른 학생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그는 교실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몸은 고단했겠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교육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교육은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 출발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중요한 사명이다. 강문고등학교의 야간 교실은 구자관에게 바로 그런 기회의 공간이었다.

그의 기업가적 출발 역시 교실에서 배운 지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구자관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화학 지식을 활용해 당시 식당 화장실의 오염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작은 청소 일이 새로운 사업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후 청소사업은 시설관리와 보안, 인력서비스 등으로 확장됐고 삼구아이앤씨는 국내를 대표하는 종합 아웃소싱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의 성공은 거창한 기술이나 막대한 초기 자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해결하고, 약속을 지키면서 신뢰를 쌓아간 결과였다.

삼구아이앤씨는 계열사 전체 매출이 3조원대를 넘어서고  수만 명의 직원이 일하는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확한 최신 매출액은 회계연도와 계열사 포함 범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수치를 단정하기보다 그 성장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자관의 진정한 가치는 매출 규모에만 있지 않다. 그는 사람 중심의 경영을 강조해 왔고, 직원들이 일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경영자의 책임이라는 철학을 보여주었다. 기업이 성장한 공을 직원들에게 돌리는 그의 태도는 돈을 버는 기술보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모교 총동문회장을 맡았다는 사실 역시 의미가 깊다. 성공한 기업인이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그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면 그는 기업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용문고등학교의 80년 역사에서 구자관의 삶이 차지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좋은 학교란 이미 뛰어난 학생만을 받아들이는 학교가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가진 학생에게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는 학교라는 사실이다.

밤의 교실에서 배운 한 청년이 수만 명의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가로 성장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교육의 성과가 어디 있겠는가.
이찬희, 법치와 소통의 길을 걸어온 ‘미스터 법조인’
​​​​​​​구자관이 용문의 기업가 정신을 대표한다면 이찬희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용문의 법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조명할 만하다.

이찬희는 1984년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제40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제30기를 수료한 뒤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서울지방변호사회장과 제50대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삼성그룹의 준법경영을 외부에서 감시하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해 왔다. 황진호 교장이 확인한 수정 원고에는 위원장 연임 사실도 반영돼 있다.

법조인의 역할은 법률 지식을 적용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며 권력의 남용을 견제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법조인의 공적 책임이 있다. 법률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법은 인간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장치로 변질될 수 있다.

이찬희가 법조계에서 보여준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통과 화합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법조계 내부에는 이념적 차이뿐 아니라 사법시험 출신과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사이의 직역 문제 등 여러 갈등이 존재해 왔다. 그는 변호사단체를 이끄는 과정에서 이러한 차이를 단순한 대립의 문제로 보기보다 소통과 제도 개선을 통해 풀어야 할 과제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용문의 교훈 가운데 '참되자'라는 가치와 연결해 볼 수 있다. 참됨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옳다고 믿기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판단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공정한 원칙을 지키려는 자세까지 포함한다.

이찬희는 대한변협 회장으로 활동한 뒤에도 법률과 제도, 기업 지배구조와 사회적 책임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왔다. 법률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정한 사건을 처리하는 기술만이 아니다. 법률과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원칙을 고민하는 능력이다.

용문 출신 법조인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변호사뿐 아니라 법관과 검사들의 역할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법관은 독립적인 재판을 통해 법률을 적용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검사는 범죄 수사와 공소의 제기·유지를 통해 형사사법 체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변호사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법률적 조력을 제공한다. 서로 다른 직무를 수행하지만 궁극적으로 법치주의를 지탱한다는 공통의 과제를 지닌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맞이할 인공지능 시대에는 법조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고 때로는 대체하는 시대에는 개인정보와 저작권,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의 문제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법률과 제도의 변화 속도를 앞지르는 상황에서 법치주의는 과거의 질서를 유지하는 원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미래의 질서를 설계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찬희와 같은 법조인이 용문의 동문이라는 사실은 후배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법률을 공부한다는 것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정의롭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일이라는 점이다.

구자관의 삶이 노동과 배움의 가치를 일깨운다면 이찬희의 삶은 지식과 정의, 소통과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 두 사람이지만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조영남·백일섭·한석규·김상중·유재석…한국 대중문화를 움직인 용문의 별들
​​​​​​​학교가 길러내는 인재는 정치인과 기업인, 법조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정신적 풍요로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문화예술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받으며, 방송을 통해 웃음과 감동을 나눈다. 문화예술인은 한 나라의 감수성을 형성하고 사회의 공감 능력을 키우는 사람들이다.

용문고등학교는 이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가수 조영남, 배우 백일섭과 한석규, 김상중, 방송인 유재석, 음악인 정재형 등 여러 인물이 용문 출신으로 소개된다.

특히 조영남과 백일섭은 용문의 오랜 역사와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함께 보여주는 상징적인 동문이다. 조영남은 가수로 출발해 오랜 세월 음악과 미술을 넘나들며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 왔고, 백일섭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성장기부터 수많은 작품에서 대중과 만나며 연기 인생을 이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지키며 한국 대중문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백일섭은 강문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인물로, 한국 방송문화의 성장과 함께 오랜 연기 인생을 이어왔다. 시대가 바뀌고 방송환경이 달라져도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배우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조영남의 음악과 미술 세계와  백일섭의 연기는 용문이 배출한 문화예술인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한석규 역시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배우다.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한국 영화가 산업적 성장과 예술적 성숙을 함께 이루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절제된 감정과 섬세한 내면 연기는 그를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배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김상중은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인 동시에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대중에게 전달해 온 방송인이기도 하다. 배우가 인간의 삶을 재현하는 예술가라면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는 사회의 문제를 전달하고 시민의 판단을 돕는 소통자라는 점에서 그의 활동은 의미가 있다.

유재석은 한국 예능 방송의 변화를 이끈 대표적인 방송인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진행 방식,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는 능력, 오랜 방송 활동을 통해 축적한 대중적 신뢰는 그를 한국 대중문화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음악인 정재형은 작곡과 연주, 방송 활동을 통해 음악의 대중적 영역을 넓혀 왔다. 이처럼 용문 출신 문화예술인들은 각기 다른 장르에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며 대중과 소통해 왔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용문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있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한 뒤 지도자의 길을 걸어온 황선홍은 한국 축구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한 인물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보여준 성취는 국민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문화예술과 스포츠는 정치나 경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한다. 영화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게 하고,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스포츠는 도전과 협력의 가치를 일깨운다. 문화예술인과 스포츠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숫자나 직책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용문 출신 문화예술인들이 보여준 활동은 학교가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개성을 품어온 역사를 상징한다. 좋은 학교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성공 모델을 강요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꿈을 가진 학생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용문 80년의 철학…사학의 자유와 교육의 공공성
사진아주경제 DB
[사진=김준환 기자]
​​​​​​​용문고등학교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사립학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학은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설립되지만 교육이라는 공적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사학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 운영에는 투명성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김문희와 김용주가 학교에 투자한 일은 민간의 역량이 교육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한 가문의 헌신이 사학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해서 학교의 모든 역사를 특정 가문의 업적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 학교를 지켜온 교사들의 노력, 학생들의 열정, 학부모들의 뒷받침, 졸업생들의 사회적 활동 역시 용문 80년을 만들어온 중요한 힘이었다.

더구나 사학의 역사는 언제나 성공과 영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문 역시 교육제도와 사회환경의 변화 속에서 여러 과제를 경험했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운영을 거쳐 다시 일반고 체제로 전환한 과정도 그러한 변화의 하나다. 이는 학교가 교육정책과 사회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학의 진정한 명예는 과거의 명성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오늘의 학생들에게 얼마나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지, 교사들이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교육과정이 미래 사회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하게 대응하고 있는지에 따라 새롭게 평가받는다.

용문고등학교는 8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축적했다. 학교는 특정한 시대의 제도에 갇혀서는 안 되며, 시대가 바뀔 때마다 교육의 본질을 지키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용문의 미래는 단순히 과거의 명문 사학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지 않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키우는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용문, 다음 100년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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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주경제 DB
[사진=김준환 기자]
용문이 탄생한 1946년과 개교 80주년을 맞는 2026년 사이에는 실로 거대한 문명적 변화가 있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교과서와 책걸상을 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보조하고 로봇이 산업현장의 작업을 수행하는 시대가 되었다.

앞으로 학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지식을 제공하는 속도와 범위는 인간의 능력을 크게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이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하는 능력은 여전히 교육의 핵심 과제로 남는다.

용문고등학교의 교훈인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는 이러한 시대에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배우자는 평생학습의 정신으로, 참되자는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와 책임으로, 이기자는 급변하는 기술환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지켜내는 도전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용문이 앞으로 추진할 교육혁신의 방향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면서 동시에 인문학과 역사, 철학과 예술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기술과 인간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학교가 지닌 동문 네트워크도 새로운 교육 자산이 될 수 있다. 구자관과 같은 기업가는 창업과 노동, 경영의 가치를 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고, 이찬희와 같은 법조인은 법치와 정의, 시민의 권리를 가르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동문들은 창의성과 표현의 자유, 공감의 중요성을 후배들과 나눌 수 있다.

정치인과 행정가, 학자와 군인들도 각자의 경험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의 의미를 전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문들의 삶을 교육과 연결한다면 용문의 80년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활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될 것이다.

특히 구자관의 인생을 통해 확인한 교육 기회의 가치는 미래에도 이어져야 한다. 과거에는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던 청소년들에게 야간학교가 필요했다면, 오늘날에는 경제적·사회적 격차 때문에 첨단 기술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교육의 사명은 같다. 배움의 문턱을 낮추고,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그 가능성이 사회적 기여로 이어지도록 돕는 일이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의 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을 넘어 지식의 진위를 가려내고, 기술의 한계를 이해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는 판단력을 기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일수록 학생들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 왜 그것을 질문해야 하는지, 그 결과에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용문이 다음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이러한 교육철학은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학교의 오랜 전통과 동문들의 경험, 첨단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한다면 용문은 단순히 과거의 명문을 계승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미래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용문의 80년은 사람이 사람을 키워온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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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주경제 DB
[사진=김준환 기자]
한 학교의 80년을 돌아보면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해방 직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교를 세운 사람들,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 학교의 발전을 위해 자원을 투입한 김문희 임당장학문화재단 이사장과 그의 부친  김용주 전남방직 회장,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수많은 교사들, 그리고 학교를 떠나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졸업생들이다.

그 가운데는 구자관처럼 가난을 딛고 기업을 일으킨 사람도 있고, 이찬희처럼 법조계에서 법치와 소통의 길을 걸어온 사람도 있다. 임종석과 우상호, 김교흥처럼 정치의 길을 걸어온 사람도 있고, 김운용과 신옥철처럼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군 지휘관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다.  백일섭과 한석규, 김상중과 유재석처럼 문화예술을 통해 국민과 소통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정치적 견해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한때 같은 학교의 교실과 운동장을 거쳤다는 사실은 교육의 힘이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용문의 역사는 한 기업가 집안의 헌신에서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았지만, 그 역사를 완성한 것은 수많은 학생과 교사, 동문들의 삶이었다. 학교를 위해 투입한 자본은 교사와 운동장, 과학관과 체육관으로 바뀌었고, 그 공간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다시 기업과 법조계, 정치와 행정, 국방과 문화예술, 학문과 스포츠로 퍼져나갔다.

교육에 투자한 자본이 인간의 가능성을 키우고, 성장한 인간이 다시 사회에 기여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용문 80년의 가장 큰 의의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교무류(有敎無類), 곧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뜻의 말을 남겼다. 교육은 출신과 신분, 빈부의 차이를 넘어 인간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던 구자관의 삶을 돌아보면 이 오래된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맹자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고, 동양의 수많은 사상가들은 배움과 수양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서양의 교육사상 역시 교육을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확장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해해 왔다. 용문의 80년은 이러한 동서양 교육철학이 한국 현대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된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용문고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향해 새로운 20년을 시작한다. 앞으로의 20년은 지난 80년보다 더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 생명과학과 새로운 산업기술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교육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인간을 사랑하고 문화를 존중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학교, 지식과 인성을 함께 기르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80년 전 성도중학교로 출발한 작은 배움의 터전이 강문고등학교를 거쳐 용문고등학교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는 한 가문의 교육에 대한 헌신이 있었고, 수많은 교사의 열정이 있었으며, 학생들의 꿈과 도전이 있었다.

그 80년을 관통하는 정신은 교훈에 담겨 있다.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

배움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참됨으로 세상의 신뢰를 얻으며, 도전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뜻이다.

2026년 10월 12일, 용문은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학교 측에 따르면 올해 공식 개교기념식은 관례에 따라 지난 8일 열렸으며, 12일은 개교 80주년 기념일이다. 오는 16일 금요일 오후 7시에는 '개교 80주년 한마음대축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그 자리는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다. 한 학교가 대한민국 현대사와 함께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고, 교육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과거의 성취를 기리는 동시에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지 묻는 자리이기도 하다.

용문의 다음 100년 역시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라는 정신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좋은 학교는 훌륭한 건물을 가진 학교가 아니라 훌륭한 인간을 길러내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용문 80년은 건물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이며, 한 가문의 헌신에서 출발해 수많은 사람의 꿈으로 완성된 교육의 역사다.
표용문고등학교 80년 주요 연혁
[표=용문고등학교 80년 주요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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