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새것만 짓다 어제를 철거한 사회

  • 속도의 시대를 지나, 사람과 현장을 살리는 개선의 지혜로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작년 겨울, 광주의 한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형틀 목수 한 분을 만났다. 점심을 먹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던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평생 짓기만 했지, 무엇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그 말을 오래 잊지 못했다. 그가 세운 거푸집 안에서 굳어진 콘크리트는 누군가의 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집을 지은 사람에게는 자기 삶을 설명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의 한숨을 한 개인의 쓸쓸함으로만 듣기는 어렵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빨리 만들었는지는 부지런히 셌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이 어떤 시간을 살아냈는지는 충분히 묻지 않았다. 준공된 건물에는 이름이 붙어도 그 벽을 세운 손의 이름은 좀처럼 남지 않는다. 성과는 사회의 것이 되고 피로는 개인의 것이 되는 동안 한 사람의 생애는 어디에 기록되는가.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도 우리 시선은 흔히 순위에 머문다. 누가 더 많이 수출하는가, 어느 기업이 더 앞섰는가를 묻는다. 올해 우리나라는 수출액이 일본을 능가할 거라고 한다. 솔직히 뿌듯하다. 그러나 경제 성적표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더 빨리 달리는 사회가 반드시 더 안전한 사회인가. 더 많은 것을 생산하는 나라에서 사람은 자기 삶을 더 소중하게 느끼는가. 성장의 자부심과 삶의 존엄은 저절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혁신’과 ‘개선’이라는 두 말을 생각해 본다. 혁신이 새로운 길을 여는 힘이라면 개선은 이미 걷고 있는 길의 턱을 살피고 고치는 힘이다. 물론 둘은 비슷하지만 같은 말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에도 거듭되는 수정이 필요하고, 작은 수정이 쌓여 작업 방식 전체를 바꿀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일에 비해 오래 다듬는 일을 얼마나 존중해 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어로 개선을 뜻하는 ‘가이젠’은 도요타 생산방식에서 모든 구성원이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점진적 개선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변화의 크기보다 변화의 주체다. 일하는 사람은 지시받은 동작만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일을 관찰하고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판단에 쓰일 때 노동은 단순한 반복을 넘어 축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을 혁신의 나라, 일본을 개선의 나라로 나누고 한쪽의 우월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숙련공에게도 평생을 다듬어 온 기술이 있고, 일본의 일터에도 바꾸어야 할 관행이 있을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은 어느 국민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경험을 듣고 수정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개선이 오직 비용을 줄이고 노동의 속도를 높이는 수단이라면 그것 역시 사람을 소모시키는 또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미장 일을 하다 보면 한번에 매끈하게 끝내려는 마음이 오히려 일을 그르칠 때가 있다. 바탕의 상태를 살피고, 반죽의 되기를 맞추고, 흙손에 주는 힘을 조절해야 한다. 같은 벽처럼 보여도 손이 받아들이는 감각은 다르다. 어제 익힌 동작을 오늘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숙련은 아니다. 어제의 경험으로 오늘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손을 바꾸는 것이 숙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선은 과거를 붙드는 일이 아니다. 경험을 버리지 않되 경험에 갇히지도 않는 일이다. “늘 이렇게 해 왔다”는 말로 새 의견을 막는다면 그것은 개선이 아니라 고집이다. 오래 일한 사람의 감각과 새로 들어온 사람의 질문이 만날 때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위험도 모습을 드러낸다. 축적의 가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변화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시간의 감각은 노년을 대하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우리는 나이 든 사람에게 아직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묻곤 한다. 일을 더 할 수 있는가, 새로운 기계를 다룰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생활할 수 있는가. 필요한 질문이지만 그것만으로 한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다. 무엇을 견뎠고 누구를 돌보았으며 어떤 일을 배워 남겼는지도 물어야 한다.

노년의 빈곤과 고립을 마음가짐이나 성찰의 부족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면 먼저 그 여유를 허락하지 않은 노동과 생활의 조건을 살펴야 한다. 소득과 주거, 의료와 돌봄은 감상적인 위로로 대신할 수 없다. 삶을 돌아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오늘을 견딜 조건부터 함께 마련해야 한다. 존엄은 자신의 생애를 긍정하라는 주문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 토대 위에서 우리가 더 보태야 할 것은 노년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다.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다. 지난날을 말할 때마다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로 취급받는다면 그는 자기 경험을 어디에 놓아야 할까. 반대로 과거의 경험만으로 젊은 사람의 어려움을 재단해서도 안 된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한쪽이 가르치고 다른 쪽이 듣기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일본의 시바타 도요는 아흔을 넘겨 시를 쓰기 시작해 아흔여덟에 시집 '약해지지 마'를 펴냈다. 이 이야기를 일본 사회 전체가 노년을 잘 보듬는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늦은 나이에도 자신의 시간을 자기 언어로 옮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지나온 생애를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생애가 새 표현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모든 노인이 시집을 내거나 특별한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남에게 보여 줄 작품이 없어도 한 사람의 생애는 존중받아야 한다. 자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동료에게 전하는 작업 요령, 오늘 하루를 적은 짧은 문장도 자기 시간을 되찾는 길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쉬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존엄의 조건을 다시 생산성과 성과에 묶어서는 안 된다.

디지털 기술도 이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무인 주문기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배우라는 재촉만이 아니다. 글자를 알아보기 쉬운지, 설명을 되짚을 수 있는지, 필요하면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기술을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놓친 사람을 살피자는 것이다. 개선은 가장 익숙한 이용자의 속도만 측정하는 대신 이용을 포기한 사람의 이유를 묻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도 다르지 않다. “이 작업대가 좀 흔들리는데, 먼저 확인하고 합시다.” 이 말을 꺼낼 수 있는 현장인가를 나는 묻고 싶다. 안전을 위한 설비와 규정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어도 위험을 느낀 사람이 입을 다문다면 그 감각은 공동의 판단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문제를 알아차리는 능력만큼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조건이 중요하다.

위험을 말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지금 바쁜데 그런 것까지 따지느냐”라면 다음에는 침묵하기 쉽다. “지금껏 사고가 없었다”는 말로 불편함을 눌러 버리면 무사했던 과거가 안전한 미래를 보장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반대로 작업을 잠시 멈추고 함께 확인한다면 그 한마디는 동료를 지키는 지식이 된다. 안전문화는 벽에 붙은 문구보다 이런 응답 속에서 드러난다.

그렇다고 법과 감독을 줄이고 노동자의 자율성에 맡기자는 뜻은 아니다. 안전한 작업대와 추락 방지시설을 갖추고, 적정한 인력과 공기를 확보하는 것은 사업주와 관리체계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위험의 발견과 해결을 모두 노동자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규정은 최소한의 바닥을 만들고, 현장의 참여는 그 바닥 위에서 놓친 위험을 찾아내야 한다.

“위험하면 멈추라”는 말에는 멈춘 뒤의 대책도 따라야 한다. 확인과 보수에 필요한 시간은 누가 보장하는가. 작업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임금이나 다음 일자리에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가. 작은 개선을 요청한 사람에게 오히려 책임이 돌아가지는 않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용기 있게 말하라고만 한다면 안전은 또다시 개인의 희생에 기대게 된다.

개선의 절차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위험하다는 의견이 나오면 누가 확인할지 정하고, 고칠 때까지 무엇을 멈출지 판단하며, 조치한 내용을 제안한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오늘 발견한 문제가 내일 다른 작업조에도 전달되어야 한다. 의견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참여와 실제 작업조건을 바꾸는 참여는 다르다. 작은 목소리가 변화를 만들었다는 경험이 쌓여야 다음 목소리도 나온다.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던 아찔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운이 좋았다”며 넘길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함께 살피고 같은 위험을 줄여야 한다. 다만 잘못을 고백한 사람을 찾아 혼내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보고가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 현장이 더 위험해졌다고 판단해서도 곤란하다. 이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일이 비로소 드러나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숙련공의 경험을 존중하는 일도 안전의 예외를 인정하는 일과는 다르다. 오래 일했다는 이유로 보호조치를 생략할 수는 없다. 경험은 위험을 더 일찍 발견하는 데 쓰여야지 위험을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을 증명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선배가 감지한 흔들림을 후배가 함께 확인하고, 후배가 제기한 의문을 선배가 가볍게 넘기지 않을 때 숙련은 공동의 자산이 된다.

돌아봄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시작된다. 나는 관조를 거창한 철학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한 일을 잠시 멈추어 살피는 태도로 이해하고 싶다. 오늘 어디에서 무리했는가. 동료가 말하려던 것을 내가 끊지는 않았는가. 내 손이 지나간 자리는 다음 사람에게 안전한가. 하루가 끝날 때 이런 질문 하나를 남기는 일도 자신과 현장을 다듬는 실천이다.

그 시간은 생산이 끝난 뒤 남는 자투리여서는 안 된다. 작업을 검토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도 일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 바쁜 사람에게 퇴근 후 혼자 성찰하라고 요구하면서 작업 중에는 한순간의 멈춤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회가 사람의 경험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그 경험을 나누고 반영할 시간을 보장할 때 비로소 구체적인 뜻을 얻는다.
 
우리는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낡은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다만 무엇을 새롭게 하든 그 안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시간을 함께 보았으면 한다. 한·일 양국이 서로에게 배울 지점도 승패의 확인보다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위험을 말할 수 있는 방식, 노년의 경험이 다음 세대와 만나는 자리, 기술의 편리함에서 밀려난 사람을 다시 맞아들이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

광주의 그 형틀목수에게 내가 건네지 못했던 말은 이제 우리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남았다. 평생 일한 사람이 자신이 지은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나는 오늘 바른 벽을 한 번 더 살피듯 내가 보낸 하루도 잠시 돌아보고 싶다. 더 많이 해냈다는 말에 앞서 동료와 무사히 마쳤고, 어제의 불편 하나를 오늘 고쳤다고 말하고 싶다. 돌아볼 어제가 있는 삶, 그 어제를 지워 버리지 않는 사회. 우리가 다음으로 지어야 할 것은 어쩌면 그런 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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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두수 작가] 


필자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왔다. 현재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빈곤지역 아동들의 교육·급식·장학 지원을 이끄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건설현장에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 프로그램으로 펼치고 있다.
idoos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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