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대출과 환상, 그리고 성장의 마중물

사진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사진=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학에서 '환상(illusion)' 또는 '착각'이라는 용어는 좁게는 두 가지, 넓게는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개념이 화폐환상(money illusion)과 재정환상(fiscal illusion)이다.

화폐환상이란 경제주체가 물가 상승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실질변수가 아닌 명목변수를 기준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물가가 상승하더라도 이를 체감하지 못한 노동자가 명목임금을 기준으로 노동 공급을 결정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재정환상은 납세자가 정부 서비스의 비용과 편익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부 서비스의 편익은 대부분 무형적이고 비용의 핵심인 조세 또한 납세자가 직접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착각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소비세를 부담하는 납세자가 자신의 실제 조세 부담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면 소비세 부과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실질소득은 감소하지만 납세자는 이를 즉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해 실질 세부담을 과소평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공재의 비용을 실제보다 낮게 인식하게 된다.

화폐환상과 재정환상의 공통점은 물가 인식에 시차가 존재하며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통화량이 증가하거나 금리가 낮아지면 실물가격은 상승할 수밖에 없고 채무자에게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며 대외 환율은 약세를 보이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금리 인하가 소비와 투자를 자극해야 한다. 그러나 인구 감소 국면에서는 소비가 기대만큼 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기업 투자 역시 금리보다는 산업 전망과 수익성 판단이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한국은 주로 부동산과 주택을 중심으로 대출을 통한 투자가 이루어져 왔다. 국부의 80% 이상이 토지와 건물로 구성된 국가는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따라서 인구 감소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는 부동산 중심 투자에서 벗어나 기술 투자 등 생산적인 부문으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가계대출과 기업대출은 오랜 기간 빠른 속도로 증가해 왔다. 흔히 '빚도 자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부채는 더 이상 자산이 아니라 위험 요인이 된다. 금리가 상승하거나 추가 대출이 차단되는 시점이 오면 과도한 부채를 보유한 가계와 기업은 채무불이행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과정은 위기로 이어지기 쉬우며 대표적인 사례가 아시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다.

한편 '환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맥락상 다른 의미를 지닌 개념도 있다. 바로 투기적 환상(speculative euphoria)이다.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금융공황의 근본 원인을 불확실성이 높은 금융제도가 투자자들의 투기적 환상을 자생적으로 조장하는 데서 찾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637년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로 버블 붕괴 이후 경제는 수년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장기 저성장과 고물가가 맞물린 국면에 놓여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부는 기술과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한편 기업 윤리를 강화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 또한 새로운 기술과 인재, 자본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이익을 창출하고 윤리적 경영을 실천할 때 경제 재도약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물론 이는 대출이나 부채에 의존한 투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개인과 기업 모두 자신의 소득과 자산 범위 내에서 산업과 기업, 거시 경제 여건을 면밀히 분석한 뒤 합리적인 투자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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