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푸른빛 잃지 않은 보수 언론의 상징

  • 안병훈 기파랑 대표 별세

  • 조선일보 도약 주역…향년 87세

  • 벤 존스 약물복용 등특종 지휘

고故 안병훈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이사 사진도서출판 기파랑
고(故) 안병훈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이사 [사진=도서출판 기파랑]
“사원은 자신이 회사에서 잘한 일을 주로 기억하고, 회사는 사원이 잘못 한 일을 주로 기억한다.”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서 38년 7개월 일하는 동안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승진했던 안병훈(1938. 11. 23~2025. 10. 31)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가 2003년 12월 31일 정년 퇴임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40년 가까이 일한 조선일보를 떠나면서 그래도 회사에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지만, 회사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그런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조선일보사를 떠났다.

서울 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에 입사, 정치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대표이사 부사장 등 요직을 거치고도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는지 2005년 4월 도서출판 기파랑을 설립하고 대표에 취임했다.

안 대표는 2004년 12월 ‘사진과 함께 읽는 박정희’를 출판하면서 출판사 이름을 기파랑으로 한 데 대해 “신라시대 향가 찬기파랑가의 주인공 (화랑)”이라면서 “겨울 찬 서리 이겨내고, 늘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잣나무의 불변함을 출판사의 정신으로 삼기 위해”라고 책 귀퉁이에 적어넣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박정희’를 훑어보면, 안 대표가 생각하는 화랑 기파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첫머리에 ‘박정희 대통령 18년 6개월의 기록’이라는 표제에 이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민족중흥‘, ‘조국 근대화’ 등 박 대통령이 쓴 휘호를 첫머리 사진으로 실어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살해당한 뒤 3년쯤 뒤인 1982년 3월 필자가 조선일보 사회부 수습기자로 입사할 당시 안병훈은 사회부장이었다.

당시 안 대표는 부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복 다이또료(朴 大統領)는 말이야…”라면서 자신이 정치부 청와대 출입기자를 하면서 만났던 박 대통령이 해준 애국적 국가건설에 관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해주었다. 굳이 대통령을 ‘다이또료’라는 일본어 발음으로 호칭한 이유는 감히 우리말로 ‘대통령’이라고 말하기가 박 대통령에게 결례로 생각된다는 눈치였다. 당시 조선일보가 안 대표에게 내준 승용차 운전사는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이후 박 대통령은 밤에 청와대 잔디밭으로 안병훈 기자를 불러 함께 소주를 마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1985년 1월부터 1988년 10월까지 3년 9개월간 편집국장직을 수행한 안병훈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는 1면 사이드 톱으로 ‘김일성 피살설 동경에 소문 파다’라고 보도했고, 이어서 다음날 호외로 ‘김일성 총 맞아 피살- 열차 타고 가다 총격받았다’라고 보도했다. 한국언론사상 희대의 오보였다. 1988년 9월 27일 자 조선일보는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캐나다 벤 존슨이 금지 약물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복용사실이 확인됐다고 특종 보도했고, 벤 존슨은 이 보도로 금메달과 세계신기록을 박탈당했다. 안병훈 편집국장 시절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세계적 오보와 특종이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2016년 별세)은 2008년 1월 출간된 자서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안병훈 국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안병훈은 70년대에 청와대 출입 기자, 80년대에 편집국장, 90년대에는 전무, 부사장을 맡아 ‘정상 조선일보’를 일궈낸 주역 중 한 명이다.…관리자가 된 후에는 특유의 인화와 추진력으로 수많은 사업 아이디어를 성공시켜 조선일보가 기획에 강한 신문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주었다. ‘쓰레기를 줄입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산업화는 늦었어도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캠페인과 ‘아! 고구려’,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등 대형 전시회를 그가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안 대표는 우리나라 보수 우익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곽영길 아주경제신문 회장은 안 대표를 “언론인으로서 균형 잡힌 보수의 기수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92년 8월 한중수교가 이뤄지고 11월 필자를 초대 조선일보 베이징(北京) 특파원으로 파견한 안병훈 전무는 1993년 2월 4일 베이징 시내 건국문 외대가에서 있었던 조선일보 베이징 지국 현판식에서 “조선일보 북경지국 현판식, 70년 만에 중국취재 공식 재개’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본지 2면에 보도하도록 지휘했다. 조선일보는 현판식에 노재원 초대 주중 한국대사, 판후이쥐안(范慧娟) 외교부 대변인, 리윈페이(李雲飛) 인민일보 국제부장이 참석한 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2002년 3월에는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참석하는 제1회 한중 경제 심포지엄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최했다.

안병훈은 2002년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전국의 화장실을 현대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화장실 시민문화 연대를 조직하고, 선진 시민으로서 외국인을 대하기 위한 ‘글로벌 에티켓 운동’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추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편집부장을 지낸 안찬수를 6.25 납북으로 잃은 안병훈 부사장의 조선일보를 위한 마지막 봉사는 “통일을 위한 한 가정 월 1만 원 기부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00만 명이 넘는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안병훈 대표의 발인은 3일 오전 9시. 유족으로는 상명대 불문과 교수를 지낸 부인 박정자 교수와 아들 안승환 삼성전자 상무, 딸 안혜리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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