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2025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한국에 단순한 국제행사를 넘어선 전략적 기회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북·미 정상 간 ‘깜짝 만남’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같다. 2019년 판문점에서 이뤄진 북·미 회동이 그랬듯이 사전 실무협상이 결여된 정상 간 이벤트는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전 세계 인구의 약 37%, GDP의 약 61%, 교역량의 약 49%를 점유하는 세계 최대 지역협력체인 APEC이 제공하는 기회는 이보다 훨씬 넓고 깊다. 이번 경주 APEC 개최는 한국의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고 '숲'을 가꾸는 작업이다. 그 씨앗은 당장 눈에 띄는 화려함은 없지만 오랜 시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것이다. 이번 APEC이 한반도 외교에 미칠 영향을 세 가지 맥락에서 살펴보자.
먼저 역사적 맥락의 재해석이다. 고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과거 동방의 실크로드 역할을 수행하며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교류하던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2025년 APEC이 경주에서 열린다는 것은 한국이 다시 한번 21세기 디지털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할 역사적 기회를 잡았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실크로드가 낙타와 배를 통해 오갔다면 현대의 실크로드는 AI, 데이터, 첨단 기술을 통해 연결된다. 한국은 APEC 의장국으로서 '연결(Connect), 혁신(Innovate), 번영(Prosper)'이라는 세 가지 핵심 의제를 내걸었다. 디지털 경제 시대의 새로운 무역 질서를 주도하는 길은 이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섬'에서 나아가 아시아·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대륙과 해양을 잇는 '항구'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 길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북·미 정상 간 즉석 만남은 한반도라는 작은 섬 안의 '좁은 뱃길'에 관한 이슈다. 반면 APEC은 아시아·태평양 전체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양 항로'를 개척하는 문제다. 한국은 섬 안의 작은 물길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드넓은 바다를 향한 큰 배를 건조하고 항해의 규칙을 만드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에서 발언권과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국격과 외무(外務)에서 나아가 외교(外交)적 영향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한국은 APEC을 통해 단순히 특정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넘어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둘째, 국제질서 차원의 역할론이다. 이 시대의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세 축, △미국의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주의로 질서 변화 △중국의 자국 중심 경제 질서 구축 △시장 접근성 확대와 공정 무역 등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개발도상국들의 강물이 경주에서 합류(合流)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AI, 기후변화 대응,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공동의 배를 띄워 이 강물들을 하나로 엮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단순히 북·미 관계 개선이라는 지류에 매달리지 않고 경제, 기술,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협력을 모색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이라는 바다로 나아가는 큰 물길을 여는 것이다.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도 미·중 전략 경쟁과 북·중·러 결속이 강화되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번 APEC은 한국이 외교적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이다. 우리가 주최하는 다자 협력 무대에서 한국은 '균형 외교', 즉 한·미 동맹을 더욱 포괄적인 전략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관계도 모색하며 국제 공급망 불안정성에도 대비할 수 있다. 이러한 외교적 유연성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의 독자적인 목소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부디 경주 APEC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길 바란다. 북·미 회담에 대한 단발성 이슈가 한국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슈퍼위크의 제 의미를 가리지 않기를 바란다. 현재까지 목도한 북·미 정상의 인격(Personality)을 고려하면 만남이 성사되더라도 의미 있는 결실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북한 최선희 외무상은 지난 26일 러시아와 벨라루스행을 택했고 일본 다카이치 신임 총리는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 직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약속을 재확인했음을 발표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 대통령을 만날 유인은 더욱 희미해졌다. 한국은 당면한 APEC이라는 견고한 플랫폼을 통해 미·중 전략경쟁이라는 파고를 넘어 국가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국익을 제고해야 한다. 역사의 교훈은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인 전략과 예측 가능한 협력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경주 APEC은 한국 외교의 백년지대계라는 숲을 조성할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이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태평양의 평화와 번영에 일조하는 중진국가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이는 남북 관계 개선을 넘어 북한이 한국의 리더십과 국제사회의 규범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환경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한기호 필자 주요 이력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연세대 통일학 박사 ▷통일부 과장(서기관) ▷(사)북한연구학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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