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고를 당한 환자 측이 병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환자 측의 입증 책임을 완화한 판결을 내놓았다. 다만 배상 책임은 인정한 진료상 과실을 형사 책임 근거로는 인정하지는 않으면서 의료과오 민사와 형사사건의 입증 책임 기준이 같지 않음을 명확히 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숨진 A씨의 유족이 한 의료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9284만원을 배상하라"며 원심의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지난달 31일 확정했다.
A씨는 2015년 12월 병원에서 어깨 관절경 수술 중 마취 직후 혈압이 떨어져 심정지로 숨졌다. 마취과 전문의 B씨는 전신마취와 어깨 국소마취를 하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와 마취가 끝나자 간호사 C씨에게 모니터링을 맡기고 들어온 지 30여분 만에 수술실에서 나갔다. 이후 정형외과 집도의가 어깨 수술을 시작한지 15분 만에 심박동수가 갑작스레 떨어지는 등 이상 소견이 감지됐다. 간호사의 호출로 수술실로 돌아온 B씨가 인공호흡기 장착 등의 응급처치를 시작했지만, A씨는 끝내 심정지로 사망했다.
유족은 2019년 7월 "담당 의사가 환자를 소홀히 감시했고 간호사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않아 A씨가 숨졌다"며 병원을 운영하는 이 재단을 상대로 1억6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마취과 의사 B씨와 간호사 C씨에 대해서는 업무상과실치사 및 진료기록부 허위기재 등 의료법 위반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1·2심은 업무상 과실로 인해 A씨가 사망에 이르렀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약 9284만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단이 불복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료상 과실 입증한다면 손해 인과관계 추정 가능"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환자가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할 만큼만 진료상 과실을 입증하면 병원 측의 배상책임이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의료사고 소송의 환자 측 증명 책임을 더욱 완화했다.
대법원은 "민사소송에선 환자 측이 진료상 과실을 입증한다면, 손해까지의 인과관계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시했다. 환자 측이 과학적·의학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개연성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가능성이 아닌, 의학적 원리에 부합하는 '상당한 개연성'이 있어야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고 조건을 달았다. 또 의료행위를 한 의사·병원 측이 환자가 입은 손해가 진료상 과실로 인해 발생한 게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다면, 이 같은 인과관계 추정은 뒤집힐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환자 측이 의료행위 당시 임상의학 분야에서 실천되는 의료수준에서 통상의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의 위반, 즉 진료상 과실로 평가되는 행위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과실이 환자 측에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에는 진료상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해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의료과오 민사소송에서 진료상 과실이 증명된 경우 인과관계 추정에 관한 법리를 정비해 새롭게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업무상과실치사는 무죄..."'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돼야"
다만 이같은 환자 측 입증 책임 완화가 형사재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이날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마취 담당 의사 등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업무상 과실의 존재, 그로 인한 사망의 결과까지 엄격한 증거에 따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이 이뤄져야 한다"며 "그에 관한 판단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동일 사안의 민사재판과 달라질 수 있다"고 판시했다.
앞서 2심은 의사 B씨와 간호사 C씨의 업무상과실치사·의료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금고 8월에 벌금 700만원을 선고한 바 있다. 2심 재판부는 "마취 과정에서 저혈압 증상이 반복되는 등 이상 증상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며 "B씨 등의 업무상 과실로 사망 위험성이 사회적 용인 수준을 넘어 급격히 높아졌다는 게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1심은 이들의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과실은 인정하지만, 과실로 인해 A씨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업무상과실치사에 관한 부분을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마취 유지 중 환자 감시, 신속한 대응 업무를 소홀히 한 B씨의 업무상 과실이 인정된다는 원심 판단을 수긍한다"면서도 "환자에게 심정지가 발생했을 때 피고인이 피해자를 직접 관찰하고 있다가 심폐소생술 등의 조치를 했으면 환자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의료과오 관련 형사 사건에서 '업무상 과실'이 증명됐다는 것만으로 인과관계가 추정되거나, 증명 정도가 경감돼 유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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