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독립운동지를 가다] 쓸쓸히 잠든 애국지사들...김가진은 묘지석 없는 잔디밭에 묻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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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배인선 특파원
입력 2023-08-2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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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포] 상하이 만국공묘 현장

  • 쑹칭링능원 외국인 묘지석 600여개 중

  • 한국인 독립운동가 묘지석은 10여개

  • 한중수교 기념 1993년 첫 유해 봉환

  • 독립운동가 연구 더욱 활발해져야

상하이 쑹칭링능원의 옛 만국공묘 표지석 뒤편의  동농 김가진 지사의 묘로 추정되는 잔디밭에서 탐방단이 헌화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상하이 쑹칭링 능원 내 옛 만국공묘 표지석 뒤편에 위치한 동농 김가진 선생의 묘로 추정되는 잔디밭에서 탐방단이 헌화한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여기 찾았어요!”

지난 24일 중국 상하이 쑹칭링 능원 외국인 묘역에서 탐방단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잔디밭에 빽빽이 줄지어 있는 약 600개 묘지석 가운데 한국인 독립운동가로 확인 혹은 추정되는 묘비석 10여 개를 찾는 일은 마치 '보물찾기'와도 같았다. 
 
과거 상하이 '만국공묘(萬國公墓)'라 불렸던 이곳은 외국인 공동묘지다. 1984년 쑹칭링 능원으로 조성되면서 외국인 묘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안내판에는 전 세계 25개국에서 온 외국인 600여 명이 묻혀 있다고 적혀 있다. 여기엔 1910~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한국 임시정부 요원도 안장돼 있다.
 
‘보훈은 역사이자 미래다!’라는 주제 아래 아주경제와 사단법인 한민회가 기획한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이 지난 24일 이곳을 찾아 독립운동가를 추모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최용학 회장이 단장을 맡았다.
 
탐방단 일원인 박환 수원대 교수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 정부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일환으로 중국 정부와 협력해 중국 상하이에 유해가 안장된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사업을 시행했다”며 “한·중 수교 성과물로 첫 유해 봉환 작업은 1993년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때마침 탐방단이 이곳을 방문한 날도 8월 24일, 한·중 수교 31주년이 되는 날이다. 탐방단은 1993년 유해 봉환이 이뤄진 독립유공자 신규식·박은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지사 등 5명 묘지석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꽂고 헌화하며 5초간 묵념하며 애도했다.

이어 1995년, 2014년, 2019년 세 차례에 걸쳐 윤현진·오영선·연병환·김태연 지사 유해도 봉환됐다. 이미 유해가 봉환된 묘지석에는 ‘○○○○년 ○월 ○일 移葬大韓民國(대한민국으로 이장됨)’이라고 쓰여 있다. 
 
상하이 쑹칭링능원의 외국인 묘역에 한국인으로 확인 혹은 추정되는 묘지석 묘지석마다 탐방단이 준비한 태극기와 국화꽃이 놓여져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상하이 쑹칭링 능원 외국인 묘역에 한국인으로 확인 혹은 추정되는 묘지석마다 탐방단이 준비한 태극기와 국화꽃이 놓여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하지만 이곳엔 이덕삼·조상섭 선생 등 독립운동가 유해가 여전히 고국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초라한 묘지석과 함께 차가운 타국 땅에 묻혀 있다. 박환 교수는 “뚜렷한 독립운동 행적 기록과 자료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유해가 봉환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만국공묘에 안장됐다는 기록이 있는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 동농 김가진 선생 묘지석은 이곳 외국인 묘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행히 김 선생 묘소 자리를 기억하는 증손녀 김선현 오토 회장의 증언을 따라 김 선생 묘소가 있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쑹칭링 능원 내 과거 만국공묘 묘역 터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 뒤로 펼쳐진 잔디밭 안쪽 왼쪽 제일 끝 자리다.
 
탐방단은 묘지석 하나 없는 텅 빈 잔디밭에 태극기를 꽃고 김가진 선생에게 헌화하며 넋을 기렸다. 지난해 서거 100주년을 맞은 김가진 선생이 아직도 상하이 옛 만국공묘 터에 나 홀로 외롭게 잠들어 있다는 현실에 탐방단 마음도 무거워졌다.
 
대한제국에서 고위직 관료를 지낸 김가진 선생은 일제 강점 현실에 안주한 다른 귀족 관료와 달리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펼쳤고,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74세 나이에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돼 고령임에도 왕성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2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가진 선생 장례식이 임시정부장(葬), 사실상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진 것은 그만큼 당시 임시정부 내에서도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높이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유해는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 박 교수는 "중국 충칭시 화상산(和尙山)에도 세상을 떠난 임정 요인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매장돼 있다"며 "광복 직후 백범 김구 선생 주도로 몇 분 유해를 모셔왔으나 중국 공산화로 무산되면서 몇십 년이 흐른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조국이 광복을 찾은 것을 보지 못하고 타국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충칭은 물론 과거 만주(동북 3성 일대)나 연해주(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도 부지기수다. 
 
박환 교수는 “유해 봉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아야 하는 만큼 독립운동가에 대한 객관적·역사적 조사가 활발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용학 회장은 “최근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 유공자에 대한 적극적인 서훈과 유해 봉환 움직임은 늦었지만 정말 잘하고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박 교수는 “이를 위한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한 데다 국가 간 외교 관계도 영향을 미친다”며 “특히 최근 중국·러시아와 외교 관계가 불편해진 점도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에 어려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직접 만국공묘에 헌화·묵념한 최승훈 푸단대 경영학과 학생은 “상하이에서 유학 중임에도 현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며 “상하이 한국인회나 유학생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소 참배 헌화와 같은 의미 있는 활동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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