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윤 대통령, 한일 원폭 피해자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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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서울시립대 초빙교수/객원 논설위원
입력 2023-03-2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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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서울시립대 초빙교수/객원 논설위원]



7년 전인 2016년 5월 27일 일본 히로시마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그해 히로시마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선진 7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계 언론은 G7정상회의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행보에 더 주목했다. 오바마는 G7정상회의 전날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는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고인을 추모했다.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한 건 종전 후 71년 만에 처음이었다. 원폭 피폭지를 찾은 오바마는 “우리는 핵무기 없는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며 핵무기 종언을 촉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는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도시는 초토화됐고 무고한 민간인 수십 만 명이 숨졌다. 조선인도 2만 명 이상 숨졌다. 미국 내에서는 아직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2차 대전을 조기 종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당위론이 우세하다. 이날 오바마는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사죄하지 않았지만 현장에 나온 원폭 피폭자를 끌어안고 위로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는 “오랫동안 고통 받은 원폭 피폭자를 껴안은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에서 일본 국민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당시 일본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오는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히로시마에서 다시 G7정상회의가 열린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G7정상회의에 윤석열 대통령을 초청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12년 만에 정상회담을 가졌다. 우리 정부는 강제 징용 노무자에 대한 배상 방안으로 제3자 변제를 발표했다. 정부가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제3자 변제 방식을 발표한 건 경색된 한일관계를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였다. 윤 대통령은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대통령으로서 수렁에 빠진 한일 관계를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는 말로 한일 외교 정상화에 나선 정치적 결단을 설명했다.

윤 대통령이 쏘아올린 한일 정상화 결과물은 당장 나타나기 어려운 사안이다. 우선 한국과 일본 국민들 사이에 자리한 간극이 너무 크다. 한일은 오랫동안 한쪽은 피해자 민족주의, 다른 한쪽은 적대적 민족주의 교육에 치중해 왔다. 또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대어 반일과 혐한을 부추기는 정치 세력도 존재한다. 양국 정치인들은 반일과 반한 감정을 자극하며 정치적 잇속을 챙겨왔다. 어쨌든 우리 정부의 결단에 힘입어 12년 만에 한일 정상 셔틀 외교는 복원됐다. 또 문재인 정부에서 마찰을 빚었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해제와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까지 정상화 궤도에 올랐다.

이제는 일본 차례다. 우리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에 성의 있는 대응을 기대했다. 우리가 물 컵의 절반을 채운만큼 나머지는 일본 몫이라는 메시지는 이를 함축한다. 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기시다 총리는 강제 징용에 대해서는 직접 사과는 하지 않았다. 대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고 했다. 포괄적 사과 의미가 담겼지만 우리 국민들 눈에는 미흡한 게 사실이다. 또한 일본 기업은 배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이 “굴욕적 협상”이라며 연일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 일본이 우리 국권을 빼앗고 36년 동안 식민지배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많은 조선인들이 위안부와 노무자, 학도병으로 끌려가 고통 받았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피해자가 그만 두라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며 무한 책임론을 강조하기도 했다. 일본은 한국과 피해자에게 더는 상처 주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가 통 큰 결단을 한만큼 이제 일본에서 합당한 목소리를 내는 건 순리다. 핵심은 경제적 배상이 아니라 진솔한 대화와 상대를 헤아려 미래를 여는 것이다. 일본은 한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G2 국가였다. 지금도 여전히 강대국이며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함께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다.

야당 또한 긴 호흡에서 일본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당장 성과가 나지 않는다고, 또 대통령과 정부를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로 공격하는 건 성급하다. 팔짱낀 채 비난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그렇게 한일 관계를 방치해왔다. 일하는 사람이 접시도 깬다고 했다. 정부가 성과를 내고, 접시도 깨뜨리지 않도록 인내하며 야당으로서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그럴 때 국민들로부터 박수 받는다. ‘토착 왜구’와 ‘죽창가’만 앞세워 선동한다면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강요된 사과는 의미 없다. 우리가 성숙한 자세로 한일 관계를 진전시켜 나갈 때 일본 사회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오는 5월, G7정상회의는 양국이 미래로 가는 분기점이다. G7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윤 대통령에게 조언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랬듯 히로시마에서 평화 메시지를 전하고 원폭 피해자를 위로함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울림을 주길 바란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과 150m 떨어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를 동시에 찾아 추모했으면 한다. 생명 앞에서 민족과 이념을 따지는 건 옹졸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무고하게 숨진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한국 대통령 모습을 보고 싶다. 피해자이기도 한 우리 대통령이 두 곳에서 추모하는 것만으로도 국제사회에 전하는 평화 메시지는 강렬하다.

덧붙여 한국인과 일본인 원폭 피해자를 껴안아 줬으면 한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은 많은 걸 의미한다. 독일 브란트 수상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독일이 일어섰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가부도 상태에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고통을 감내하자며 울먹였다. 대통령의 진정은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5.18기념식에서 유족을 끌어안음으로써 수만 마디 말보다 많은 메시지를 전했다. 윤 대통령이 양국 원폭 피해자를 끌어안는다면 해묵은 앙금도 씻기리라 믿는다. 용서도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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