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한국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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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입력 2022-10-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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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위원]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레비츠키 교수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두 가지 핵심 규범을 제시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상호 관용’은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선거를 통해 그들도 통치할 권리를 갖는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다. 또 ‘제도적 자제’는 자기 절제와 인내를 뜻한다. 쉽게 말해 권력을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세다. 저자는 두 규범이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 왔다고 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시한부 권력을 정파적 이익에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재임 당시 대법원 판사를 늘리려다 좌절된 사례는 제도적 자제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국가 위기에 직면하면 국가 권력은 보다 권한을 확대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또 국민들도 위기 극복을 기대하며 웬만한 권한 기본권 침해를 감수한다. 21대 총선에서 우리 국민이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에게 표를 몰아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정부여당이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해달라는 의도였다. 미국 국민들 또한 9.11테러 직후 출범한 부시 행정부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이라크 침공 명분이 빈약했음에도 전쟁 개시에 힘을 실어줬는데 같은 이치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는 세계 대공황이었다. 전폭적 지지를 바탕으로 재선에 성공한 루즈벨트는 1937년 연방 대법원 확대를 시도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뉴딜 정책이 대법원에서 번번이 가로막히자 말 잘 듣는 판사로 채우기 위해서였다. 루즈벨트는 70세 이상 판사 수만큼 추가 임명함으로써 대법관 정원을 늘릴 계획이었다. 이 경우 신규 임명 판사는 6명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물론이고 루즈벨트가 소속된 민주당조차 “독재를 향한 걸음”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무산됐다. 민주당은 권한을 남용하는 대신 제도적 자제를 택했다. 대공황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미국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작동했다.

미국 의회에서 필리버스터는 ‘마지막 남은 절차적 무기’다. 1800~2005년까지 대통령이 임명한 연방 대법원 판사와 정부 각료에 대한 상원 보이콧은 9건에 불과했다. 또 1880~1980년 100년 동안 대법관 임명 동의는 90%에 달했다. 맘에 들지 않더라도 힘을 절제한 것이다. 1986년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스캘리아’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였다. 당시 민주당은 필리버스터에 필요한 상원 의석을 47석 이상 확보했음에도 98대 0으로 동의했다. 1866~2016년까지 150년 동안 상원은 연방 대법원 공석을 채우는 임명을 한 번도 가로막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치도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잃은 채 진영싸움은 일상화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160억 달러 규모 일자리 프로그램을 제출했지만 부결됐다. 공화당은 클린턴 임기 첫 2년 동안 무려 80차례 필리버스터를 남발했다. 1970년대 연간 7회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재앙이다. 이 결과 1995년 5일, 1996년 21일 동안 연방정부는 셧 다운됐다. 오바마 정부에서 권한 남용과 적대적 대립은 보다 심화됐다. 2007~2012년 오바마 재임 기간 필리버스터는 385건에 달했다. 1차 세계대전부터 레이건 퇴임 때까지 70년 동안 필리버스터와 맞먹는 횟수였다.

저자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제도적 자제 규범이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됐는지 세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첫째 연방정부 채무한도 조정 반대, 둘째 이란 핵 프로그램 협상 반대, 셋째 연방 대법관 임명 반대다. 공화당은 채무한도 조정이 안 될 경우 연방정부 채무 불이행과 국가 신용도 하락, 경기침체가 우려됨에도 의석수를 앞세워 반대했다. 그동안 채무한도 조정은 양당 합의하에 관행처럼 진행돼 왔다. 1960~2011년 동안 채무한도 조정은 모두 78회(공화당 정부 49회, 민주당 정부 29회)였다. 그렇지만 공화당은 채무한도 조정을 인질로 삼았다. 다행히 막판 협상으로 최악은 피했지만 국가 신용등급은 미국 역사상 첫 하락했다. 또 공화당은 2016년 3월 오바마가 임명한 대법관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부결했다. 메릭 갈런드 후보는 이념적으로 완벽한 중립이었지만 공화당은 절제를 잃었다.

책 줄거리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 국회 상황이 레비츠키 교수가 말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절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궤멸해야할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상대를 악마화 함으로써 진영결집을 꾀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집권 이후 전 정권 수사에 올 인하고 있다. 여러 명분을 내세우지만 국민들 눈에는 전 정권 창피주기와 정치 보복 성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유엔총회 순방외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당과 야당을 “이새끼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같은 인식을 드러냈다.

민주당 또한 거대 의석을 앞세워 힘을 남발하고 있다. ‘양곡관리법’과 ‘노란봉투법’ 추진은 물론이고 박진 외교부 장관 탄핵안까지 발의했다. 민주당 의석을 감안하면 단독 처리 가능하다. 하지만 본회의에서 탄핵안이 통과돼도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으면 소모적 정쟁만 유발할 뿐이다. 그런데도 ‘상호 존중’과 ‘제도적 자제’를 상실한 민주당은 강행할 태세다. 100년 전 영국 학자 제임스 브라이스는 “탄핵은 의회 무기고 안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다”고 했다. 레비츠키 교수는 “자제 규범이 사라질 때 견제와 균형 대신 정체와 마비가 찾아 온다”고 했다. 정당 간 혐오가 헌법 정신을 지키려는 정치인들을 압도할 때 견제와 균형 시스템은 무너진다는 결론이다.

지금 민주당은 ‘상호 존중’과 ‘절제’를 잃은 채 가장 파괴적 무기를 꺼내 들었다. 국민의힘 또한 한시적으로 주어진 권한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함에도 진영대결에만 매몰돼 있다. 극한 대결로 치닫는 두 정당으로 인해 한국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공멸할지 공존할지는 ‘상호 존중’과 ‘제도적 절제’에 달려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지 알았다면 해법도 멀지 않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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