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애민과 청렴을 생각하는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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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입력 2022-05-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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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위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鳥安). 이곳에서 260여 년 전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났다. 그는 사상가이자 과학자, 의학자, 정치가, 경제학자, 문학가였다. 르네상스 시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다산은 애민(愛民)과 청렴(淸廉)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자였다. 당시 성리학 엘리트들이 고루한 지배 이념에 갇혀 있을 때 그는 백성들 삶속에서 고뇌했다. “수령(정치인)을 위해 백성(국민)이 있는 게 아니라 백성을 위해 수령이 있다”며 지배층을 꾸짖었다. 그는 정조(正祖)를 도와 개혁정치를 펼쳤다. 22살,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만난 인연은 정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름답게 이어졌다.

정조는 20대 초반에 불과한 다산을 가까이 두고 수시로 서로 생각을 나누었다. 정조는 다산의 애민정신을 높이 샀다. 다산은 배다리와 수원 화성을 축조하면서 애민정신을 발휘했다. 배다리를 놓으면서 어선이 아닌 조운선으로 대체했다. 당시는 왕이 한강을 건너 행차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았는데 그 때마다 어선을 징발했다. 어민들은 생계에 지장을 주는 배다리 건설이 못마땅했다. 다산은 이런 사정을 헤아려 세금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조운선으로 대신했다. 화성을 축조할 때는 거중기를 이용했다. 무거운 돌을 쌓다 죽거나 다치는 백성들을 위해 도르래를 이용함으로써 산재 발생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이 모든 건 애민에서 비롯된 실용주의였다.

다산은 정조 사후 하루아침에 폐족 신세로 전락했다. 숨죽이고 있었던 반대파(서인)들은 다산 집안(남인)을 모질게 공격했다. 명분은 사학(천주교 신자)이었다. 서인은 다산 집안이 사학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절멸을 기도했다. 셋째형 약종은 사형, 자신과 둘째형 약전은 유배 길에 올랐다. 39살에 시작된 유배는 머리 희끗한 57세에 끝났다. 18년 동안 유배생활은 참담했다. 다산은 한양에서 천리 떨어진 궁벽한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죄인 신분으로 살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이었다. 다산의 위대함과 천재성은 이때부터 발현됐다. 일본 학자는 “다산 개인은 불행했지만 조선에는 행운이었다”고 평가한 암담한 시간이었다.

다산은 원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학문을 통해 자신을 증명했다. 대부분 엘리트들은 신분이 급락하면 술에 절어 비관하다 스스로 망가진다. 다산은 완벽한 절망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뛰어난 유산을 남겼다. 그는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해 무려 500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조선 실학사상사에 빛나는 업적이다. 누구나 다 아는 다산을 길게 언급한 이유가 있다. 지방선거에 출마한 이들에게 사표(師表)로 삼기에 더없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도지사와 시장, 군수는 조선시대 수령이다. 시대가 변했어도 이들은 지방 살림을 책임지는 최고 책임자다. 다산 생가를 방문해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 애민과 청렴을 돌아봤다.

목민심서 한 구절이다. “군자의 배움은 수신(修身)이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이다. 요즈음 목민관들은 이익을 좇는 데만 얼이 빠져 있고 목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찌들고 병들어 줄줄이 진구렁으로 떨어져 죽는다. 그런데도 이자들은 좋은 옷과 기름진 음식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260여 년 전, 다산이 만난 지방 관료들은 공직 의식 없는 사나운 호랑이었다. 다산은 수탈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자기 성기를 스스로 자른 참혹한 광경을 ‘애절양(哀切陽)’에 담았다. 물론 지금은 지방자치가 정착됐고, 시민단체 감시도 활발하고, 자치단체장 의식수준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럼에도 제 몸만 살찌운 채 애민(愛民)과 청렴(淸廉)을 등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전히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구속 수감되는 지방 자치단체장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인사 청탁, 이권 개입, 금품 수수는 대표적 비리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올해 2월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점검한 실태 조사는 뿌리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조사 결과 이해충돌 사례만 9,600건에 달했다. 또 지방의원과 해당 지자체 간 수의계약 100건, 다른 기관으로부터 출장비 지원 120건도 무더기 적발됐다. 공직자에게 가장 우선 요구되는 청렴과 거리가 먼 실상이다. 조선시대 수탈과는 형태를 달리하지만 시민 세금을 축낸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무릇 당선된 자들은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왜 출마하려했는지, 지역민들 뜻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답해야 한다. 한데 자리 욕심에만 눈이 먼 부실한 이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일부 기초단체에서는 현대판 매관매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저급한 논공행상도 경계 대상이지만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 적합한 인물보다 선거캠프에 몸담았느냐가 기준이 되고 있다. 전리품 나눠주듯 논공행상을 한다면 ‘에코챔버(반향실 효과)’에 갇힐 우려가 높다. 다산은 측근 비리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 받고도 처벌을 망설이는 정조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대체로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산은 지방 수령들에게 엄격한 자기절제를 강조했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려워할 ‘외(畏)’자 뿐이다. 법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고 마음에 언제나 두려움을 간직하면 혹시라도 방자하게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모든 선량들에게 꼭 필요한 경구가 아닐까 싶다. 생가에 걸린 현판 ‘여유당(與猶堂) 또한 겨울 시냇물을 건너듯 항상 조심하고 살피라는 뜻이다. 다산은 회갑을 맞아 “알아주는 자는 적고 비방하려 드는 자는 많으니, 만약 천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줌 불쏘시개로 불태워버려도 좋다”는 묘지명을 썼다. 돌아오는 길, ‘이런 각오로 선거에 임하고 행정을 펼친다면 공동체는 한층 풍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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