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가까운 곳에서 유명인물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가성비 높은 답사가 된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에 있다. 종로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거리다. 답사도반 T에게 연락하니 쾌히 동행을 승낙했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빗방울이 오락가락 한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6대(代)를 거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그리고 군사 및 외교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동시에 언어학자이며 집현전 학사로 한글창제에 큰 공로를 세운 팔방미인형 인물이다. 성격이 활달했고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했다. 호를 보한재(保閑齋:한가함을 유지하다)라고 할 만큼 평생 바쁘게 살았다. 이런저런 이력을 반영한 묘소는 정승급 무덤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곁의 경사지에 서있는 신도비(神道碑:무덤 근처에 세운 비석)는 4면의 면적이 동일한 직사각형 기둥모양의 사면비(四面碑)다. 1477년에 건립되었으니 현존 사면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위에 얹는 덮개까지 원석 그대로 간단하게 지붕처럼 다듬었고 밑받침만 따로 만들었다. 지금이야 인테넷 검색만 해도 인적정보가 넘쳐나지만 그 시절에는 공식적인 유일한 개인종합정보가 실려있는 소중한 자료가 비석이다. 원형 그대로 잘 보존했지만 비바람과 긴 세월 앞에서 자연스럽게 표면이 닳으면서 많은 글자들은 이미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신숙주 묘역]

아래에 새로 만든 신도비 곁에 있는 ‘한글창제 사적비’가 우리를 맞았다. 1971년 한글학회에서 세운 것이다. 당신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여진어 등에 능통했으며 또 다른 기록에는 유구(琉球:오키나와)어 등 동아시아 8개국어를 통달했다고 한다. 가히 ‘언어천재’라고 하겠다. 이런 천부적 어학능력이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기여한 밑바탕이 된 것이다. 특히 명나라 언어학자인 황찬(黃璨) 한림학사가 압록강 건너편 요동 땅에 유배왔을 때 음운(音韻: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을 묻기 위해 13차례나 찾아갔다고 한다. 음운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제대로 알아듣는 귀를 가지고 있는지라 선생에게 ‘희현당 (希賢堂:귀한 인물)’이란 호를 지어줄 정도였다. 세종도 한글창제를 반대하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을 꾸짖으면서 “너희들이 음운을 아느냐?”고 질책했다. 이 말 속에서 한문과 같은 류의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인 한글의 완성을 위해 음운학의 대가인 신숙주 선생의 공로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눈매는 신숙주처럼’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비범함은 눈매에 그대로 드러났다고 한다.

 

[한글창제 사적비]

조선초기에는 왕실의 친불교와 대신들의 반불교 정서가 평행선을 긋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신숙주는 친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반불도 아니었다. 절집과 인연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삼각산 진관사에서 비롯되었다. 1442년 집현전에 들어간 선생은 이듬해 26세 때 세종의 배려로 사가독서(賜暇讀書:책만 읽어도 되는 유급휴가)를 위해 입산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집현전 학사 몇 명과 함께 몇달 동안 기숙생활을 했다. 그때 만난 승려들과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했다. 그리고 판선종사(判禪宗事)이며 세조의 왕사(王師)이던 수미(壽眉·守眉)대사가 전남 영암 도갑사(道岬寺)로 낙향할 때 전송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한글창제의 숨은 공신으로 알려져 있는 범어(梵語:인도말) 전문가인 신미(信眉)스님은 수미대사의 절친한 도반이다. 2019년 ‘나랏말싸미’라는 영화에서 세종과 신미의 한글창제 협업과정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잘 그려낸 바 있다.

절집에서 지혜의 상징은 문수보살이다. 문수는 늘 푸른 사자를 타고 다녔다. 이처럼 선생에게는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늘 함께했다고 한다. 언젠가 정시(庭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에서 치르던 과거시험)가 있을 때 일이다. 경복궁 입구에서 푸른 옷 동자가 선생의 소매를 당기면서 ‘귀한 관상의 소유자이니 평생 함께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동자는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밥을 덜어주면 먹는 소리는 나는데 음식이 줄지는 않았다. 이런 것을 견식(見食:눈으로 먹는 것)이라고 한다. 집안의 길흉사를 미리 알려주어 대비하도록 했고 나랏일도 사전에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고 중요한 개인적인 일도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귀띔했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했다. 자손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청의동자 제사도 함께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선생이 별세하자 청의동자도 함께 수명을 다했다. 후손들은 선생의 기일에 따로 상을 차려 청의동자 제사도 같이 지냈다. 강효석(姜斅錫)이 지은 <대동기문(大東奇聞)> 1권 ‘신숙주청의만수(靑衣挽袖신숙주에게 푸른옷을 입은 동자가 소매를 끌어당기다)에는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수록해 두었다.

단종에서 세조로 왕권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청의동자의 조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의적 명분론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지는 않았다. 집현전 출신 동료들과 다른 정치적 길을 선택한 이후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적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명분론자들에 의해 사실과 다른 모함에 시달렸고 남겨놓은 업적마저 빛이 바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명분이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결과물을 통해 한평생 열심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는 늘 부채의식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성남(城南) 고산사(高山寺)에 아들과 손자를 맡기면서 학추(學追)스님께 보낸 글에서 그 심경의 일단을 내비쳤다.

나는 지금 불가의 승려가 되고 싶으니(아금욕위불화남我今欲爲佛和南)
반백년의 부귀와 명예는 잠깐 달콤함이라.(반백공명일향감 半百功名一餉酣)
뜻밖에 얻은 높은 벼슬은 평소의 바람 아니었으니(헌면당래비소원 軒冕倘來非素願)
덧없는 인생의 득실은 말할 것이 없네.(부생득실불용담 浮生得失不容談 )

그는 아들인 형(泂)과 손자 종흡(從洽)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일부러 고산사(高山寺)로 보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자격으로 비용을 부담하였으니 이는 신씨 집안에서 내린 ‘사가독서’가 되었다. 세종의 성은(聖恩)으로 진관사에서 글을 읽었던 일은 평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에 그 은혜를 보답코자 또다른 유산을 물려준 것이리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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