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꿨나?] ⑥"양국의 변화는 일본이 시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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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국제경제팀장·최지현 기자
입력 2021-10-0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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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마노 고에이 "케이팝과 역사는 공존해야 한다"

  • "한·일 관계에서 사과는 '점'이 아닌 '선'이 돼야"

지난 4일 일본에 새로운 총리가 취임했다. 그러나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한 기대감은 읽히지 않는다. 내각 요직에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측근들이 가득 찼다. 최근 수년간 악화한 양국의 관계는 지지부진한 모양새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 정권 시절 연속으로 약 4년 8개월간 외무상을 지낸 인물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2015년 한·일 합의의 당사자이기도 한 그는 양국 관계에 대해서는 '한국이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는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늦은 저녁 아주경제가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일본의 대학생 구마노 고에이씨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양국 관계 진전의 유일한 해법은 '일본의 변화'라고 20대의 젊은 일본 청년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일본이 가해국으로서 역사를 바로 마주하지 않는 이상, 양국 간의 진정한 교류와 동반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스스로도 한·일의 역사보다는 방탄소년단(BTS)과 한국 문화에만 관심을 가졌던 구마노씨. 그러나 대학교 4학년의 그는 이제 위안부 연구자의 길까지도 고민하는 청년으로 한국을 찾았다. 얼마 전에는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던 한·일 관계 입문서 <한일의 답답함과 대학생인 나(「日韓」のモヤモヤと大学生のわたし)> 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구마노씨의 인생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찬사'받는 케이팝과 '차별'받는 재일교포

구마노씨의 인생을 바꾼 것은 어쩌면 2019년 스터디 투어에서 만난 한 학생의 자기소개였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K-POP(케이팝)을 좋아한다고 하면 반가워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기분입니다. 일본에서 재일교포인 나는 차별을 느끼고 있지만, 사람들은 케이팝과 같은 한국 문화에 열광하고 있으니까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를 제대로 보지 않고 즐거운 부분만 골라보는 '문화 소비'만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재일교포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학생은 '서글픈 모순'으로 최근 몇 년간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을 바라봤다. 단 한번도 한국 문화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던 구마노씨에게 벼락과 같은 충격이었다.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어 수업까지 들었던 자신이지만,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이 강하게 든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자신 역시 양국 관계에 깊이 박힌 역사적 상흔은 무시한 채 한국의 문화만을 소비해온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게 됐다. 

당시 스터디 투어에 참여한 것은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4박 5일에 2만엔(약 21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한국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마노씨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일본 히토쓰바시대에서 구마노 고에이씨에게 영향을 준 선생님들인 재일교포 양징자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가토 게이키 히토쓰바시대 사회학부 준교수(오른쪽 끝 위 사진). 오른쪽 아래는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사진=유튜브-일본외국특파원협회(왼쪽)/저자진 제공(오른쪽 위)/AP·연합뉴스(오른쪽 아래)]


식민지와 재일교포의 역사, 전쟁 피해자들의 증언은 구마노씨가 알던 세상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졌다. 전쟁 가해국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다만, 자신은 그동안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던 게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머리를 때렸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투어의 후기를 작성하는 구마노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연루(連累, implication)’였다. 1학년 교과수업 중 가토 게이키 교수님이 나눠준 자료에 나오는 단어였다. 테사 모리스-스즈키라는 사학자가 제창한 개념인 '연루'는 과거의 잘못은 차별의 구조로 계속 남아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지금 세대가 이를 해체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된다. '연루'를 떠올리며 구마노씨는 책 속에 머물렀던 단어가 자신이 투어 속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무거운 마음의 정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사과는 점이 아닌 선이다.


"한·일 관계에 있어 사과와 해결은 점이 아닌 선이 되어야 합니다."

스터디 투어 이후 구마노씨는 역사 공부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여름 '일본 학생이 생각하는 위안부 문제'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까지 참여하게 됐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발표를 준비하면서 서서히 자신만의 생각과 관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피해와 가해의 역사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사과는 한순간에 머무르는 점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선'이 되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돈을 한번 지불하고 사죄의 말을 한마디 던지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죄와 화해는 일회적인 보상이 아닌 끊임없는 후속 조치가 이뤄져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인식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법적인 책임을 다하고, 배상하는 것을 우선하되 이에 멈추지 않고 역사 교육을 하고 박물관을 만들고 추도 행사를 여는 등 끊임없는 후속 조치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왜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떠드느냐'는 일본 주류의 흐름은 거세다. 대학 입학 후 이어지는 역사 공부를 통해 이 같은 결론을 얻었지만, 걸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외롭고 두려운 일들도 많다. 

책을 냈지만, 얼굴을 드러낼 수도 없다. 인터뷰에는 모조리 일러스트나 흐리게 처리된 모습만 나간다. 극우 세력이 공격해올 수도 있어서다. 일본 사회는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경화됐다는 게 구마노씨의 지적이었다. 역사 문제를 꺼내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진 상황이 된 것이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교류는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일 관계의 악화라는 얘기가 자주 나오고 있지만, 이것은 가토 교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처럼 '일본 사람들의 역사 인식 악화'라고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관계가 안 좋아도 문화 교류는 이어가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 문화교류를 수십 년 이어온 뒤 달라진 게 무엇일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러한 문화 교류가 아니라 일본 내에서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본 내 혐한 시위 모습. [사진=연합뉴스]


일본 사회가 한국 문화를 소비하며 한류가 유행하고 있지만, 이는 가해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문화를 즐기고만 있다고 구마노씨는 지적한다.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보지 않고 한국 문화만 보고 있으면 역사는 결국 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한국 시민들은 일본의 상황을 잘 모르고, 일본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니까 서로 교류만 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합니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인식 속에서 묻어두고 넘어가는 것은 결국 상황을 더 악화하게 마련입니다. 피해자의 인권은 묻히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나 가해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는 한 정말로 진정한 관계개선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외롭고 두렵다…그러나 외면할 순 없다.


이처럼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지만, 구마노씨는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을 찾기 힘들다. 책을 냈지만, 친구들에게도 반응은 적은 편이다. 트위터에 여러 개의 악플이 달리기도 했다. '정치적인 이야기 하지 마라', '이미 해결된 문제를 왜 끄집어내냐'는 반응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까운 지인일 수도 있는 팔로어 중 한 명이 익명으로 '징그럽다'는 댓글을 올린 것은 큰 상처가 됐다. 개인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책을 홍보해오다가 이마저도 다른 계정을 만들어 홍보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알고 지내던 친구들마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학교 세미나의 친구들이 아니면, 제가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어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래도 고립감이 생길 수밖에 없죠. 다만 가토 교수님과의 세미나가 그나마 유일하게 안심하고 공감받을 수 있는 피난처처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마저 좁아지고, 비록 온라인상이지만 비난까지 쏟아지는 이 상황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 질문에 그는 딱 잘라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한번이라도 이 문제(역사)를 알게 되면 세계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순 없습니다. 힘들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의 자신보다 현재의 제가 더 좋습니다." 
 
 

대학교 4학년답게 구마노씨도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일단 대학원에 진학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정확히는 '식민지 공창(公娼) 제도'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밝혔다. 다만 석사를 마친 뒤 박사를 이어갈지는 고민이다.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는 계속 관련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구마노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면 일본 사회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당황한 듯 잠시 말을 멈추더니 웃었다. 이어 지금 상황이랑 너무 반대라서 상상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답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가해 역사에 대해 제대로 보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한·일 관계, 북·일 관계도 그렇고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모두 새로운 '단계'에 올라서게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물론 요원한 미래의 일이기에 일단 구마노씨는 현재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 중에는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나의 얘기를 하면 이 문제에 대해 친숙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얘기구나' 하는 생각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최근에 책을 읽고 블로그에서 옛날의 자기 얘기를 써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블로그를 보고 역사를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구마노씨 역시 뿌듯함도 느꼈다. 물론 앞으로 갈 길은 아주 멀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마노씨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선택했던 '네오'처럼 진실을 알지 못했던 과거로 뒷걸음질치는 게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 소개로 알게 된 걸그룹 '트와이스'의 노래와 이후 보게 된 BTS의 뮤직비디오, 그리고 이어진 한국으로의 관심은 일본 청년 구마노씨의 인생 길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일본의 블로그 사이트 노트(note)에 올라온 <한일의 답답함과 대학생인 나(「日韓」のモヤモヤと大学生のわたし)> 독자들의 리뷰. 독자 리오(理央)씨는 책을 읽으며 "또 '모야모야'한다"라며 공감하기도 했으며, 도미미(ど・みみ)씨는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발언한 '조선 눈썹'이라는 혐오 표현에 의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 안의 모야모야(답답함)'를 소개하기도 했다. 오지(OJI)씨는 저자진의 용기를 칭찬하는 한편, '일본인 남성인 나에게는 남성으로서의 특권과 일본의 (전쟁) 가해 역사, 차별 문제 등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구마노 고에이씨의 문장을 보고 울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모야모야'가 해소되진 않는다"면서 "앞으로도 모야모야는 이어지겠지만,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고 편견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자료=노트(note) 갈무리]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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