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익숙한 대구, '색' 다른 공간…조선 유생들의 나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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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대구=기수정 문화팀 팀장
입력 2021-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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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학 창시자 김굉필의 뜻 모신 도동서원

  • 구계 서침의 은덕을 기리는 구암서원

어른 키보다 낮은 환주문을 통과하며
자신을 낮추라는 덕목을 몸소 깨닫고
정주당 마당 돌거북과 눈 마주치는 순간
잡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차린다.

산 아래서 보는 시가지 풍경은 생경하고
번잡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기분도 잠시
밤이 되면 화려한 영상 가득한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대구는 오묘하다. 조선과 근대, 현대의 흔적이 한데 뒤섞여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고층 건물 옆에는 조선시대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 대구는 근대 문화역사의 산실이기도 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인 대구의 속살, 이번엔 500년 거슬러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도동서원 수월루 전경 [사진=기수정 기자]

◆세계문화유산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흔적을 찾아서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5대 서원 도동서원(사적 488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지요." 

전국 방방곡곡 서원을 가봤지만, 유독 도동서원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2019년, 우리나라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국을 뜨겁게 달궜을 때도 그랬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지난 몇 년간 대구를 수십번은 다녀갔음에도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이번 대구 여행의 주제를 '서원'으로 정한 이유다. 익숙한 대구, 그 안에서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찾아 나서는 것도 좋을 듯했다.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교육과 사회 활동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다.

​소수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도동서원은 동방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가장 웃어른이자 도학의 창시자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앙하기 위해 건립됐다.

도동서원 앞,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압도한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가 서원 중건을 기념해 은행나무를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나무는 '김굉필 나무'라 불린단다. 어른 6~7명이 팔을 벌려야 아름드리 나무를 두를 수 있을 정도로 굵다. 

400여년 세월 동안 묵묵히 도동서원을 지켜온 수문장 역할 덕일까.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도동서원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이곳이 처음부터 '도동서원'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본래 선조 1년(1568)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선조 37년(1604)에 보로동 서원이란 이름으로 현재 자리에 중건됐다. 현재 우리가 아는 '도동'이란 사액은 광해군 2년(1610)에 받았다. 퇴계 이황이 김굉필을 두고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며 칭송한 것이 오늘날 서원의 이름 '도동'이 됐다.

도동서원은 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 검소하고 단아하면서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은행나무를 등지니 서원의 정문 '수월루'가 등장한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이곳 수월루 앞은 붉은 배롱나무꽃이 가득 피어나는데, 조금 일렀나 보다. 아직 배롱나무 꽃망울이 움트지 않은 곳,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사이로 신록이 가득하다.

외삼문을 지나니 사방 담장으로 막힌 좁은 공간 중간에 돌계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 사람도 겨우 오를 정도로 좁고 가파른 그 계단을 천천히 오르니 어른 키보다 낮은 환주문이 나온다. 학문을 익혔던 중정당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아마도 자신을 낮추라는 선비의 덕목을 몸소 깨닫게 하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중정당은 강학 공간이다. 중정당 마당에는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거인재와 거의재가 마주 보고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학년 반과 저학년 반의 개념이다. 

마당 한가운데 돌판 깔린 길 끝, 머리를 불쑥 내민 돌 거북 한 마리와 눈을 마주친다. '배움의 품으로 들어설 때 잡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라'는 의미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계단의 디딤돌을 일곱 단으로 쌓을 만큼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중정당도 기품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도동서원의 백미는 중정당의 기단이다. 크기와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쌓아 올린 솜씨는 기교가 아닌 정성이다. 전국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저마다 마음에 드는 돌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돌을 마치 조각보를 깁듯 하나하나 짜 맞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떤 이는 몬드리안 추상화를 조각작품으로 바꾼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중정단 기단, 그 다양한 색이 품은 은은한 빛깔은 그 어떤 화려한 빛깔과 견줄 수 없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갑석 바로 아래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머리만 내밀고 있다. 이곳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해 용이 되라는 기원을 담았다. 중정당 굵은 기둥 위에 두른 흰 종이(상지)도 눈길을 끈다. 국내 서원 650여곳 중 도동서원에만 있다. 

중정당, 사당과 함께 보물 350호로 지정된 서원의 담장은 진흙 사이에 암키와를 엇갈리게 쌓고, 중간중간 수막새를 넣은 솜씨가 단정하면서도 멋스럽다.

담장을 따라 중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당이다. 사당에 오르는 계단 역시 좁고 투박한 듯하지만 돌계단 들머리의 태극 문양, 난간에 새긴 꽃봉오리, 계단 한가운데 튀어나온 양두석 등 어느 하나 세심하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내삼문(김굉필 선생 사당) 앞 계단 바닥에 새겨진 꽃 한 송이는 사계절 지지 않는 제자들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 뭉클하다. 

도동서원에서 차로 20분 거리에는 한훤당 고택이 있다. 김굉필 사후 11대손 김정제씨가 터를 잡고 300년 넘게 대를 이어온 곳이다. 고택 한편에는 예쁜 한옥 카페도 있다. 고택에서 전통차와 유기농 커피를 즐기기 위해 많은 이가 이곳을 찾는다. 
 

구암서원에서 펼쳐지는 '미디어파사드'(외벽 영상)[사진=기수정 기자]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곳··· 구암서원 

이번엔 조선 현종 6년(1665)에 세워진 구암서원으로 간다.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구계 서침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잠시 이야기를 하자면, 달성 서씨 세거지를 군사 요새로 쓰고자 했던 ​세종은 서침에게 "땅값으로 다른 땅과 함께 세록(대대로 받는 녹봉)을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러자 서침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땅을 국가에 헌납할 테니 대신 대구 지방의 환곡 이자를 감해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개인의 부귀보다는 지역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한 서침이었다. 대구의 유림과 백성들은 그의 품성에 감복했고, 서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 구암서원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구암서원은 대구 시내 중심부에 자리했었다. 지금의 북구 산격동 쪽으로 옮겨온 때는 1995년이다. 연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서원, 이곳에 서서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대구 시가지 전경이 참 생경하다. 대구 중심부를 눈에 담고 있는데도, 마치 번잡한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온 기분이랄까. 

구암서원도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을 갖췄다. 서원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사당 숭현사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그 앞에 강학 공간인 초현당이 있다. 초현당 마당 좌우에 학도들의 기숙사인 경례재(동재)와 누학재(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 동재와 서재 아래에는 문루인 연비루와 관리동인 백인당이 자리하고 있다. 

구암서원에서는 일주일 살기도 가능하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유복(유생들이 입는 옷)을 입고 배례와 생활예절 배우기, 촛대 만들기, 난 치기, 활쏘기와 다례 등 머무는 내내 조선의 유생이 되어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짙은 어둠이 깔리면, 구암서원은 '미디어 파사드(외벽 영상)' 공연이 펼쳐지는 거대한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과거와 현재가 완벽하게 뒤섞이기 시작한다. 서원을 도화지 삼아 현대적인 영상을 가득 그려낸다. 감히 상상도 못 한 광경이다. 

서원 외벽과 계단, 바닥에 쉴새 없이 펼쳐지는 화려한 영상미와 웅장한 효과음은 눈과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측백나무 숲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측백나무 자생지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자라는 측백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도동 측백나무 숲을 통해 국내에서도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고, 숲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대구는 그 자체로 역사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넘쳐날 줄은 미처 몰랐다. 머문 시간이 짧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대구에 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도동서원 수월루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여행객[사진=기수정 기자]

폭이 좁은 돌계단을 오르면 환주문이 등장한다. [사진=기수정 기자]

도동서원 환주문[사진=기수정 기자]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중정당[사진=기수정 기자]

중정당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기수정 기자]

중정당에서 과거 유생들이 입었던 유복을 입어볼 수 있다. [사진=기수정 기자]

도동서원에서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한훤당 고택[사진=기수정 기자]

미디어파사드(외벽 영상) 공연이 열리는 구암서원 [사진=기수정 기자]

구암서원에서 바라본 대구 시가지 야경 [사진=기수정 기자]

구암서원에서 펼쳐지는 '미디어파사드'(외벽 영상)[사진=기수정 기자]

구암서원의 야경[사진=기수정 기자]

구암서원에서 펼쳐지는 '미디어파사드'(외벽 영상)[사진=기수정 기자]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도동 측백나무 숲[사진=기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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