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 전남 보성이 낳은 문화운동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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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4-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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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정신] ② 20세기를 살다간 21세기 사람, 한창기

[한창기 선생]


우리 현대사가 기억해야 할 이름

한창기 선생(1936~1997)의 일생 앞에서는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신(神)은 공평하지 않다고, 어찌 한 사람에게 그토록 특출한 달란트를 다 줄 수 있느냐고. 그가 타계한 지 11년째가 되던 2008년 1월, 생전에 그와 교분이 있던 인사 59명이 추모집을 냈다. 제목은 『특집, 한창기』(창비). 우리 현대사에서 이처럼 딱 다섯 글자의 제목으로 일생을 응축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존경과 흠모, 그리움으로 버무려진 특집으로 말이다.

한창기를 소개하고 기리는 일은 여간해선 이 ‘특집’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강운구(사진가‧전 동아일보 기자)외 58명의 공동저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고 문화예술인들이다. 그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추억하고, 평가하는 ‘한창기’는 옮겨 적기에도 벅찰 정도다. 그중 한 사람인 김형국 당시 서울대 명예교수의 회고다.

“한창기는 진작 세계인이었다.… 세계시장의 일원이 되는 길을 통해 우리의 뿌리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창의적 안목으로 우리문화의 전승에 애썼던 문화 인사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산업시대와 민주시대의 진입에 성공한 다음으로 문화시대 도래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예비해준 사람이다.… 우리 현대사가 그 공적을 기억해야 할 문화계의 기린아였다….

우리 취재팀이 이 대목에 주목한 것은 솔직히 시류(時流)와도 무관치 않다. 방탄소년단(BTS)의 활약과 한국영화의 발흥으로 ‘우리 것’에 대한 고양된 자부심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과의 융합적 극복을 문화시대의 과제로 제시하면서, 한창기를 소환할 명분을 줬기 때문이다. 거의 반세기 전, 한창기는 잡지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뿌리깊은나무’는 우리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 이 토박이 문화가 … 고급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대중문화에 치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 우리 문화가 더 싱싱하게 뻗는다고 생각합니다. … 무엇보다도 우리문화가 세계문화의 한 갈래로서 씩씩하게 자라야 세계문화가 더욱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천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 유품 670점 전시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읍성은 순천만습지, 순천국가정원과 함께 순천의 대표적 명소다. 1397년(태조 6년)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토성이 1626년 명장 임경업(당시 낙안군수)에 의해 석성으로 중수됐다. 읍성 입구에 ‘뿌리깊은나무박물관’(061- 749- 8855 http://instagram.com/p/COJuxWLF8Ji/?igshid=15uaa2tgccltf)이 서있다. 산뜻한 현대식 건물이 초가집과 돌담, 초록빛 채전(菜田)과 잘 어울린다. 박물관은 전시동과 한옥, 야외전시실, 쉼터로 구성돼있다. 순천시 시립박물관이기도 한 이곳에는 한창기가 평생 수집한 670여점의 유물이 전시돼있다. 순천시가 ‘뿌리깊은나무재단’으로부터 영구기탁 받은 유물들이다.

중요문화재로 꼽히는 정순왕후국장반차도, 월왕전 목판, 기름을 담아놓는 은제유개병, 청화백자 매죽문필통 등을 볼 수 있다. 고(古)소설과 오래된 문헌도 2500점에 이른다. 그중 하나인 기연회봉록(奇緣回逢錄) 필사본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애정소설이다. 미처 전시하지 못한 5800여 점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평생 우리말과 글, 전통과 문화의 지킴이로 살아온 그가 발품을 팔아가며 사 모은 것들이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전경]

 
양성평등 주창한 잡지

우리 것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이 문화‧시사 종합잡지 ‘뿌리깊은나무’ 창간으로 이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신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76년 3월, 사람들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잡지 한 권을 받아들게 된다. 한글 전용에 가로쓰기를 도입한, 일본색(色)을 완전히 벗어버린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국내 신문과 잡지는 세로쓰기에 한글과 한자(漢字)를 섞어 썼다. 발행인 한창기는 이를 모두 순 한글말로 바꾸도록 했다. 예컨대 철공소는 ‘대장간’, 식당은 ‘밥집’, 양조장은 ‘술도가’, 서점은 ‘책방’, 정종은 ‘청주’로….

내용 또한 파격적이었다. 민중(民衆)의 삶을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왔고 엄혹한 유신 치하에서도 비판적 사회의식이 담긴 글들을 실었다. 문학, 미술, 연극, 음악, 무용은 물론 신문, 영화, 광고, 방송, 출판, 가요 등 우리 문화 전반에 걸친 비평도 실었다. “이런 기획들로 ‘뿌리깊은나무’는 한국 잡지사에서 문화지성 전문지로서 지워질 수 없는 업적을 남겼고,… 1970년대 정신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면서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라는 말을 들었다(유재천 당시 한림대 교수). 발행부수도 월간 최고 9만부를 찍을 정도로 압도적 1위였다. 오죽하면 한국잡지사(史)는 ‘뿌리깊은나무’ 이전과 이후로 나뉠 뿐이라는 말을 들었을까.

1980년 7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핏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을 단행한다. 잡지를 포함한 정기간행물 172종이 폐간된다. ‘뿌리깊은나무’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한창기는 잠시 기다렸다가 1984년 10월 월간 ‘샘이깊은물’을 창간한다. 여성을 주제로 한 기획과 기사들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여성잡지는 아니었다. 창간사의 한 대목을 빌리면 “가정과 사회를 살피면서 변화와 전통을 눈여겨볼 잡지이고, 사람답게 사는 데 관심이 있는 남자들이라면 남자들도 탐독할 잡지”였다. 양성평등 의식의 배아(胚芽)와도 같은 잡지였다.

한창기는 종합인문지리지인 ‘한국의 발견’, 역사에서 배제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민중자서전’도 펴냈다. ‘민중자서전’은 당사자의 삶을 구술토록 해 녹음한 후 글로 옮긴 책이다. 1981년부터 10년 동안 20권을 출간했다. 구술할 때 당사자가 사용한 사투리를 그대로 녹취해놓음으로써 지금도 구비문학의 귀중한 자료다. 남도의 판소리를 즐기는 음악으로 되살리기 위해 ‘뿌리깊은나무 판소리다섯마당’이란 판소리 음반(LP판)을 만들기도 했다.
 
질문이 많은 학생

한창기는 1936년 9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울며 떼쓰기를 잘해 별명이 ‘앵보’였다. 몸이 허약해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순천중학에 다닐 때는 수업 때마다 유독 질문이 많아 친구들이 싫어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으며 혼자 영어공부를 했다. 어린 그는 원칙주의자였던 것 같다. 등, 하교 때 논두렁길을 가면서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좌측통행을 고집했다고 한다.

호남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광주고교를 거쳐 21세 때인 1957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재학 중 대통령배 전국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해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사법고시를 치를 줄 알았으나 부모님이 진 빚을 갚는 게 더 급해 취직한다. 선박회사를 잠깐 다니다가 그만두고 의정부에 있는 주한 미 8군부대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귀국용 비행기 표와 영어성경책을 판다. 브리태니커(대영백과사전)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이때였다.
 
‘장님광고’로 인재들 채용

‘위대한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파는 위대한 세일즈맨’이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 브리태니커 본사에 간곡한 내용의 영어편지를 보낸다. 그의 열성에 감동해 1968년 한국지사(브리태니커 코리아)가 설립되고, 그는 이듬해 부사장을 거쳐 34세이던 1970년 사장이 된다. 그해 10월 전 미국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1911∽1978, 부통령 재임은 1965∽1968)가 본사 이사 자격으로 방한한다. 한창기를 만난 험프리는 “내가 만난 동양인 중 가장 영어가 능통하다”고 했다.

그의 비즈니스 능력은 탁월했다고 한다. 브리태니커 코리아 초창기 그와 함께 일했던 윤석금 웅진그룹회장의 회고다. 그는 한창기의 구인 광고에 끌렸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광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가 몇 살이건, 고향이 어디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지난날 무슨 일을 했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능력 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써서 사서함 ㅇㅇ호로 보내라….’ 당시 직원들은 이를 ‘장님광고’라고 불렀는데 이 광고를 보고 인재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윤 회장은 한창기의 브리태니커 코리아는 “판매를 예술처럼 창의롭게 하는 회사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한창기는 “한국 직판사업의 아버지이자, 설득의 천재”다. 그에게 훈련받은 탓일까. 윤 회장 스스로도 브리태니커 직원들 사이에서 “윤석금은 독도에서도 판다”는 ‘전설’을 남겼다. 한창기가 앞으로 영어가 국제통용어가 될 거라고 믿고 원어민 영어교육을 시작한 것도, 어린이용 영어교재들을 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우리 것’ 소중하게 여겨

한창기는 하늘이 준 특출한 능력으로 얻은 것들을 ‘우리 것’의 보존과 개발을 위해 썼다. 건국 이후, 현대사의 초입에서 많은 엘리트들이 명멸했지만 엘리트로서 자신들이 누린 모든 것을 한창기처럼 오롯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 쏟아 부은 경우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그는 특별하다. 현실의 삶과 공익 추구의 삶이 조화를 이룬 사례라고나 할까. 이상을 좇되 공허하거나 맹목적이지 않았고, 현실을 살되 일신의 안락과 탐욕에 빠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한창기는 언제나 틀을 깨려고 했고, 상상력과 창의력, 특유의 친화력과 인품으로 우리 모두가 기품 있게 살 만한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인간에게 향기가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일 게다. 우리 고향 아이들이 닮기를, 꿈꾸기를, 바라는 인물이 있다면 그 또한 한창기일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97년 2월, 62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고읍 이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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