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군부 쿠데타.. 1926년 나흘天下는 일왕의 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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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 대표
입력 2021-02-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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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롭게 밝혀지는 2.26사건

[노다니엘]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24)

일본을 지배하는 정당은 자유민주당이다. 이 정당이 1955년에 만들어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66년 동안에 정권을 놓친 기간은 2088일로 6년이 채 안 된다. 지금까지 60년간 일본을 통치했으며, 앞으로도 자민당이 정권을 놓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드물다. 격동적인 정치사를 겪어 온 한국인이 볼 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일본에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1936년에 천황의 지배를 지지하는 황도파(皇道派)의 젊은 군인들이 ‘부패한’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을 척결하고, 명치유신에 이은 ‘소화유신’을 이루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역사에서는 잘 알려진 이 사건에 관하여, 최근 진귀한 기록이 발견되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부패척결을 주장한 젊은 군인들

1936년 2월 26일, 부패한 정치가들과 재벌을 척결하고 정치권력을 천황의 친정으로 돌리는 것을 목표로 젊은 장교들과 하사관을 중심으로 1483명이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2월 26일에 발발한 이 사건은 4일째인 2월 29일에 진정된다. 그들이 척결 목표로 한 것은 당시 오카다라는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과 미쓰이, 미쓰비시 등의 재벌가였다.

당시 일본육군 내에는 내각과 재계의 부패한 정치를 청산하고 천황 통치의 강화를 주장하는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황도파와, 정·재계가 협력하여 내각중심으로 국가 개조를 추구하는 통제파(統制派)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35년에 아이자와라는 황도파의 육군중령이 통제파의 나가타라는 소장을 대낮에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두 파의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1936년에 들어와 황도파의 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하는 하극상의 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젊은 위관급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부패한 정치와 곤궁에 빠진 농민들의 생활상을 보고 분기가 치밀어 ‘소화유신, 존황참간(소화의 유신을 일으켜 천황을 높이고 간신을 참하자)'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일어나 천황의 친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청년장교들의 움직임을 황도파의 군수뇌부는 알고 있었으나,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통제파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통제파가 내각과 협력하여 체제를 더 강고히 하는 가운데, 위의 아이자와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를 기화로 통제파는 청년장교들이 소속돼 있던 제1사단을 만주로 보낼 것을 결정하고 만다. 이를 안 청년장교들이 2월 26일 새벽에 거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황 자신은 이 거사를 반기지 않고 오히려 격노하여 진압을 명령하였다. ‘반란군’으로 규정된 쿠데타부대는 결국 4일 만에 거사에 실패하고 주모자들은 자살을 하거나 재판에 넘겨져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일본의 역사가들은 정치이데올로기에 따른 쿠데타라기보다는 당시 고착되어 있던 육군 내부의 파벌, 즉 황도파와 통제파 간 갈등의 산물로 해석하였다. 당시 일본육군 내부에는 명치시대 이후로 파벌의 경쟁이 있었는데 그 원류는 번벌(藩閥), 즉 출신지역에 따른 것이었다.

명치유신을 주도한 이들의 주요 출신지역을 '살장토비(薩長土肥)'라는 표현으로 요약한다. 즉, 사쓰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현), 조슈(長州, 지금의 히로시마현), 도사(土佐, 지금의 고치현), 히젠(肥前, 지금의 사가현)의 네 번으로서, 일본열도 남쪽에 있는 이곳 출신들이 명치정부의 과두정치를 펼친 것이고, 군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도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문화를 중시하고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반공산주의자들이어서, 당시부터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는 북진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통제파는 당시 독일군참모본부의 사상 및 제1차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아 중앙집권화된 경제ž군사계획(총력전이론), 기술의 근대화·기계화를 중시하고, 중국 진출을 지지하는 남진론을 추종하였다.

새로운 증거

위에 소개한 정설은 육군 내부의 갈등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해군의 기밀문서 중에서 이 사건에 관한 중대한 기록이 나와 2·26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다. 일본의 ‘사료조사회’라는 단체가 발굴하여 NHK가 특별기획으로 소개한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2·26사건의 전모는 그 사건에 관한 육군군법회의자료가 유일한 공문서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해군의 작전을 통괄하던 ‘군령부’의 문서 6권이다. 이 기록은 사건의 경과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해군의 정보원이 군령부에 전화로 통보한 제1보의 내용에는 ‘경시청 점령’, ‘내각대신 사망’ 등이 들어 있었다. ‘기관총 발사’, ‘권총 난사’ 등의 현장의 모습도 생생하게 전달되어 있었다.

이 ‘결기부대’는 도쿄의 한복판인 아카사카와 롯폰기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총리관저 등을 첫날에 점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해군요원이 사복을 입고 육군 내부에 침투하여 결기부대의 동향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부에서는 육군 내부의 파벌항쟁 이외에도, 육군과 해군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군문서가 밝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일은 이 쿠데타를 놓고 일본군부와 정치가들 사이에 상반되는 내용의 두개의 비밀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당시 육군대신을 맡고 있던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가 청년장교들에 동조하여 “결기의 뜻에 찬동하고 소화유신의 단행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와시마는 황도파의 간부들을 접촉하여 “결기부대의 뜻을 받아들이고,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결의”를 표명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육군의 수뇌부는 처음부터 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고 진압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특히 공개된 극비문서에는 ‘상(上)’으로 표시된 육군통수권자인 천황이 처음부터 이러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는 천황이 자신의 편에 있다는 청년장교들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하나의 실마리가 나온다. 당시 육군과 해군은 따로 놀았으며, 천황은 해군이 결부되는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는 천황계의 아래에 있는 4대 왕 가문의 하나인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의 대표로서 러일전쟁에 해군장교로 참전했고, 당시 해군군령부총장을 맡고 있던 히로야스라는 인물을 불러 해군이 결기부대와 관련이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당시 소화천황 히로히토는 34세의 경륜이 짧은 젊은이였다. 군부, 특히 육군에서는 유약한 히로히토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고 천황의 동생 지치부노미야(秩父宮)를 옹립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당시 국가의식이 강했던 육군 상층부는 천황이 ‘밤에는 마작을 하고, 낮에는 골프나 하는’ 등 권위가 없다는 불만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이를 의식한 히로히토는 해군을 장악하고 있는 후시미노미야를 불러, 해군이 관계가 없음을 확인하고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천황은 이어 해군 육전대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육전대는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부대로서 지금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천황이 해군출동부대의 지휘관까지 지시하였다는 것은 해군에 대한 신뢰와 함께 결기부대에 대한 확실한 제압을 지시한 것이다. 어쩌면 이 대목이 히로히토가 유약한 천황에서 군부가 신뢰할 수 있는 천황으로 자리매김하며, 그로부터 5년 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는 데 있어 일본군부의 심리적 불안을 불식시키는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육군과 해군의  대치

젊은 청년장교들의 거사를 지지하기로 한 육군의 상층부. 결기부대에 가담하지 않고 천황을 지키기로 한 해군의 상층부. 일본의 근대사에서 전무후무한 광경이 연출되는 순간이었다.

천황을 보호하기로 한 해군은 즉시 대해령(大海令)을 발령하였다. 이 발령으로 당시 규슈의 오이타(大分)에 주둔하던 제1함대를 도쿄, 가고시마에 있던 제2함대를 오사카에 이동하도록 긴급명령을 내린다. 두 함대의 전력은 전함을 중심으로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전투기 및 폭격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해군은 육전대를 투입해 육군과의 시가전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16세로 해군에 갓 입대한 생존자는 ‘처음으로 실탄 300발을 지급받았다. 어쩌면 육군과 시가전을 하게 된다’는 당시의 놀라움을 회상하였다. 해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육군도 즉시 제1사단을 도쿄로 이동시켰다. 당시 제1사단의 참모장의 발언은 해군에 도청되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결기부대는 일본인이고 천황의 아이들이다. 결기부대를 폭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결기부대의 뒤에는 청년장교들이 모르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해군정보원이 파악한 내용은 육군 황도파의 최상층부에 있던 대장 마사키 진사부로(眞崎甚三郎)가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획한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대령과 함께 결기부대가 성공한 후 모종의 극비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육군의 상층부는 청년장교들의 낭만적 애국주의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26일의 거사로부터 3일째인 28일, 천황은 진압명령을 내린다. 이때 해군의 함정들은 이미 도쿄에 들어와 지시만 떨어지면 도쿄 한복판에 함포사격을 가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육군과 해군의 비밀교섭도 파탄이 확실해졌다. 이 교섭 실패에 이어, 육군상층부는 청년장교들을 버리기로 결정한다.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마당에 천황에 거역했다는 중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4일째인 29일 오전 6시 10분. 결기부대의 대표 17명이 육군참모총장 저택 앞에 집결하여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참모총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미 인근의 주민들에게 현재 복장으로 피신하라는 긴급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한편 결기부대의 전차들은 국회의사당을 향하고 있었고, 도쿄만에 있던 함대의 대포도 국회의사당을 사격목표로 조준하고 있었다.

육군진압부대의 공격개시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진압부대의 공격을 멈추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잠복해 있던 해군정보원이었다. 결기부대의 움직임에 변화가 있다는 다음과 같은 보고가 해군은 물론 육군에 전달되었다.

10시 5분: 결기부대, 중기관총 탄창 제거, 30명 항복
11시 45분: 총리관저에 내건 '존황의군(尊皇義軍)' 깃발 내림
12시 20분: 총리관저 안에서 만세 소리 들림

버려진 결기부대는 총리를 포함한 수명의 정치가들을 처형하고 막을 내리게 된다. 해군의 기록에 의하면, 총리관저 안에서 합창을 부른 것은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대위가 이끈 부대였으며, 안도 대위는 자신의 권총으로 합창을 지휘하고 노래가 끝난 후에 그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2·26사건은 일본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관문인 5·16군사정변은 일본 2·26사건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2·26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1941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여 310만명의 일본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후 1945년에 끝이 나는 것이다.
 

[2.26사건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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