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은 왜 폭군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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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1-01-3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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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흔히 “아부(阿附)도 능력”이라고 한다.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알랑거릴 줄도 아는 사람이 직장에서도 잘나간다는 뜻일 게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하버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부까지도 능력으로 간주되는 세태를, 그가 보기에 오도되고 가혹한 능력주의의 한 폐해로 지목할 터다. 그의 새 책, <공정하다는 착각>(2020년 12월,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은 능력에 관한 기존관념을 흔들어놓는다. 원제목은 ‘능력의 폭정’(Tyranny of Merit). 능력이 왜 폭군이 됐을까.

능력주의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인 이 책에서 샌델은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을 공정(公正)으로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외려 능력주의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동체의 삶까지 팍팍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능력주의’란 렌즈를 통해 작게는 한 개인과 집단(대학, 기업 등), 크게는 국가와 사회의 공정한 작동원리는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건 곧 개인과 국가, 시장과 정부와의 관계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 우리 정치가 어떤 내용의 답을 줄 수 있을까. 마침 부산‧서울시장 보궐선거에다가 내년 3월 대선까지 앞두고 있어서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말은 영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영(Y0ung)이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처음 썼다. 능력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영은 이 책에서 자신과 이름이 같은 주인공을 2034년의 영국으로 보내 능력주의의 실상을 둘러보게 한다(일종의 가상 소설이다). 그랬더니 귀족주의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귀족주의가 등장하고,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더 공고해지고, 계급의 벽은 고착화돼 있더라는 것이다. 신분제사회를 철폐함으로써 모두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공정사회’를 꿈꾼 결과가 더 심한 불평등과 양극화였다. 영이 2001년 ‘가디언’지를 통해 ‘능력주의 타도“(Down with Meritocracy)를 외치게 되는 배경이다.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도 궤를 같이한다. 알기 쉽게 예시로 풀어보자. 20대 취업준비생인 A는 한 대기업의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을 못 치르게 방해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기회의 균등’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시험장에 간 A는 다른 응시자들이 모두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왔음을 알게 된다. 어학에서 뒤지면 합격은 어렵다. ‘기회의 균등’은 주어졌지만 ‘조건의 균등’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A는 낙방했다. 기업 측은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신입사원을 뽑았다”고 발표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의 낙방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재능이 부족했거나, 남보다 노력을 덜 했던 탓으로 간주됐다.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합격한 학생들은 축하를 받았다. 능력으로 합격한, 능력 있는 학생들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샌델에 따르면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합격자들은 오만(傲慢)해진다. 왜? 그들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으로 보증된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A처럼 낙방한 학생(loser)은 굴욕(屈辱)을 느낀다. 능력이 부족해서 떨어졌으니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능력주의가 한 사회에서 불평등을 묵인, 방조, 정당화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경로다. 실패자(루저)의 굴욕은 능력자들(승자, 엘리트)에 대한 반감과 분노로 바뀌면서 반(反)엘리트주의의 온상이 되고, 반엘리트주의는 결국 포퓰리즘으로 이어진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태롭게 한다(최대의 수혜자가 트럼프였다). 샌델은 다시 묻는다. 이런데도 능력주의를 고집해야 하느냐고.

샌델의 능력주의를 읽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해온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휴지통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능력주의가 문제라고? 그럼 대안은? 능력을 대신할 기준이나 가치가 있는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1902∽1979)는 저 유명한 패턴변수에서 인간의 귀속성(ascription)을 ‘전근대적 속성’으로, 업적성(achievement)을 ‘근대적 속성’으로 꼽은 바 있다. 능력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출생과 신분에 따라 보상(대우)이 달라지는 귀속성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반론은 차고도 넘친다. 압축 성장의 시대를 산 우리로선 더 그렇다. 그나마 능력주의가 준(準) 규범 역할을 했기에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달성이라는 기적 같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성공에 대한 運의 기여를 인정하라”

샌델이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해법은 “일에 대한 존엄성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공동선에 기여토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임금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열망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내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폐해를 재생산하는 주범으로 미국의 명문대학들을 지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입생의 일정 비율을 제비뽑기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의 성공에 대한 운(運)의 기여를 인정하는 사람은, 순전히 능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보다 훨씬 겸손할 거라는 그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샌델의 말이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존엄하고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개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서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뤄진다.” 샌델 역시 능력주의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 또는 공동체가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2015년 <능력주의는 허구다>(The Meritocracy Myth, 2015년, 김현정 역. 사이)라는 책을 낸 미국의 스티븐 맥나미, 로버트 밀러 교수는 능력 우선주의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를 막으려면 다양한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종 불합리한 차별조처도 철폐하고, 주민들을 위한 자산형성 프로그램도 도입할 것을 권한다. 특히 상속세율을 높이고 면세조항을 과감히 삭제하면 세대가 바뀔 때 ‘판을 새롭게 짜게 되어’ 모두에게 좀 더 평등한 출발점을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한다.

‘포용’을 발로 차는 嘗糞之徒의 아부

이런 제안에 대한 반론도 물론 차고 넘친다. 능력주의 옹호자들, 곧 자유주의 시장경제론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상속세를 과도하게 부과하면 어떤 부모가 밤 새워 일하겠는가,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 맡기고, 시장은 시장에 맡김으로써 정부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그들은 그 근거로 동구 공산권 몰락의 서사까지 소환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되는 논전(論戰) 중의 하나다. 논전의 수준은 각기 달라도 결국은 모두에게 사활적 관심사일 터다.

불행히도 모범답안은 없다. 나라마다 그 환경과 형편에 맞게 양쪽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보편적인 절충은 가장 상식적이다. 능력주의의 원칙은 지키되 뒤처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또한 각론으로 들어가면 ‘자유주의 복지국가’냐, 또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냐, 하는 식으로 나뉘겠지만 능력과 공공부조의 절충이란 큰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칼날을 무디게 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 포용정책이 바로 그거다. 나는 작년 4월 이 칼럼란을 통해 문재인 정권이 포용국가(inclusive state)를 미래비전으로 제시한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코로나의 발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무기는 포용밖에 없다. 이 광포한 시대에 승자와 패자를 함께 안고 가는 것 말고 달리 무슨 길이 있겠는가. 문 대통령도 21일 세계경제포럼(WEF) 한국정상 특별연설에서 코로나 손실보상제와 이익공유제가 포용정책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아쉽다. 그때 통합당(지금의 국민의힘)도 포용 경쟁에 바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포용’이란 제목을 ‘지속가능한 포용’으로 바꾸고서라도 말이다(지금도 늦지 않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기 바란다. 나는 특정 정당 지지자가 아니다. 그저 ‘포용’에 상처를 내는, 예컨대 ‘선출된 권력’ 운운하고, 공직이 욕심나 대통령에게 상분지도(嘗糞之徒)의 아부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절망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용이란 ‘백신’을 제 발로 차내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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