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사랑이 신한은행 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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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 대표
입력 2020-12-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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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21)

재일동포. 또는 재일교포. 어떠한 연유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착해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인은 재일교포에 관하여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긍정적인 이미지를 하나 든다면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고생을 하여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 근거는 구체적인 통계자료 등이 아니라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인물들이다. 대표적으로 롯데재벌을 만든 신격호, 제주은행을 만든 김봉학, 방림방적을 만든 서갑호 등이다. 게다가 IT업계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된 손정의가 가세하면 자랑스러움마저 느끼게 된다. 금융분야에 있어서는 성공스토리의 결정적인 케이스가 재일교포 이희건씨가 주역이 되어 만든 신한은행이다.

세계의 100대 은행에 들어가며 한국금융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신한은행을 한국의 현대사에서 별로 들어보지 못한 한 재일교포가 만들었다는 사실에 접하는 한국인은 경이로움과 함께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재일교포는 어떠한 사회인가? 재일교포는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가?

변모하는 재일교포 사회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 사람들을 가리키는 재일교포는 한국 어휘이다. 그 사람들이 정주해 살고 있는 있는 일본에서는 그들을 법적으로 ‘재류외국인’ (在留外国人)이라 부른다. 2020년 현재 일본에 있는 반도계 재류외국인은 한국계가 약 45만명, 북한계가 약 3천명 미만이다. 
이 중에서 일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특별영주자(特別永住者)가 약 30만명이다. 이들이 우리가 말하는 재일교포이다. 1945년 9월 2일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한 이들은 주로 동경과 오사카 부근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라는 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이다.

 

 

특별영주자를 포함하여 일본에 거주하는 한반도출신자의 출신지역은 경상도와 제주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2010년말의 한 통계를 보면 전체 56만5천명 중에서 경상도출신이 26만5천명으로 47%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제주도로 8만1천명에 16%이다. 그 반면에 북한출신은 3천명 이하로 0.5%이다. 왜 이런 분포를 보이는가?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한반도가 일본에 의하여 강점당해 있던 당시에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교통편은 오직 선박이었으며, 따라서 배를 타고 일본에 갈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유리한 곳이 경상도와 제주도였기 때문이다. 롯데를 세운 신격호는 울산 출신, 제주은행을 만든 김봉학은 제주 출신, 신한은행을 만든 이희건은 경산, 일본국적자 손정의의 조부는 대구 출신이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99.5%가 남한 출신인 재일교포사회에서 왜 친북적인 조총련이 그 반대세력인 민단을 압도하는가이다. 김정은의 모친 고영희도 바로 위에서 말한 오사카 쓰루하시에서 성장하였는데, 그 부친은 북제주군 출신이다.

기본적으로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건너간 한국인들이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려 갈등해 온 것은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계의 민단이 만들어진 것은 1946년이고, 친북한계의 조총련이 만들어진 것은 1955년이다. 1945년의 해방에서 1955년 사이의 10년간에 한반도에서는 냉전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있었으며, 그 후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남한을 지배한 정치세력은 친미노선을 걷는 이승만정권이었고, 북한을 지배한 것은 친소, 친중국의 김일성세력이었다.

위에서 말한 10년의 기간 동안에 이승만정권은 내내 강경한 반일노선을 유지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일본에 있는 동포들을 보호할 의사가 없었다. 그 반면에 김일성은 재일동포의 포섭에 노력을 기울였다. 남한에서 온 한국인들의 ‘북송’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사고는 여기서 발생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 있는 총련계의 학교교실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다. 일본인의 차별 속에서 어려운 생계를 잇던 동포들에게 한국정권이 보낸 것은 냉소였고, 평양정권은 총련학교에 장학금을 보냈다.

조국이 일본에 강점되었던 시기에 삶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반도인들이 전문지식이나 자본을 가졌을 턱이 없다. 따라서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영위해온 사업은 소규모 판매업, 요식업, 유흥업, 단순기술, 건설노동 등이 주류였다. 재일교포의 직업분류에 관한 1969년의 한 통계를 보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무직(53%)이었고, 그 다음이 무응답(21%), 기능공(6%), 단순노동(4%), 판매업 (4%)이었다. 결국, 집에서 놀거나 일용직에 나가거나 공장이나 노동판에서 일하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이 88%였다. 일본에서 최정상에 오르는 배우, 가수, 운동선수, 작가 등은 이들의 아들딸들이었다.

교포사회의 금융

열심히 일하여 돈을 모은 노동자나 상인들이 저금을 위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은행에 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나 이때나 절차와 서류가 복잡한 일본의 은행은 표준말 구사가 어려운 교포들에게는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신용조합이었다. 에도시대부터 있던 상부상조의 금융행동이 점차 발전하여 1951년에 ‘협동조합에 의한 금융사업법”(信用金庫法)에 의하여 자리를 잡게 된다. 이 법에 의하여 종래의 계에 가까운 신용조합들은 신용금고로 전환하고 협동조직의 성격이 강한 조합은 ‘신용조합’으로 남게 된다.

 

 

현재 일본 금융기관의 분류를 보면 표와 같다. 일반은행은 전국에서 영업을 할 수 있는 도시은행(한국의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두 레벨), 그리고 외국은행이다. 교포들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은 은행이 아니다. 이들은 대개 신용조합이다.

신용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위하여 활동하며, 그중에는 금융사업이 포함되는 것이다. 여기서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것이 우선적인 조건이 된다. 일본의 신용조합법은 “해당지구에서 상업, 공업, 광업, 운송업, 서비스업 등을 영위하는 소규모사업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민단계에 속하는 신용조합은 다섯개로 동경에 있는 아스카(あすか)신용조합을 필두로, 요코하마, 아이치(나고야), 오사카(近畿), 히로시마상은(広島商銀) 등이다. 이들은 현재 재일한국인신용조합협회를 구성하고 있다. 한편 조총련계는 조은신용조합(朝銀信用組合)으로 통합되어 있는데, 그 산하에 7개의 신용조합이 들어있다. 이렇게 보면, 은행도 아닌 일본의 신용조합이 한국에서 대표적인 신한은행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신한은행이라는 드라마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1967년 3월이었다. 그때에 입학금을 낸 은행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바로 지금 광교의 신한은행 건물에 있던 조흥은행 본점이었다. 이 조흥은행이 2001년에 신한지주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한지주를 만든 사람은 일본에서 1955년에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란 신용협동조합을 만든 이희건이었다. 일본의 작은 신용조합이 한국의 대표적인 시중은행이던 조흥은행을 흡수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금융그룹으로 발전한 발자취는 마치 한국근대사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1897년에 서울에는 한성은행(漢城銀行)이라는 민족계의 근대은행이 설립되었다. 당시 거물급 재계인사들이 자본금 20만원으로 1897년 2월에 설립하였다. 민간인에 대한 환전 및 금융업무를 주요목표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1905년 금융공황이 닥쳐와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6년에 주식회사 공립한성은행으로 변경한 다음, 일본의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의 융자를 받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일제의 자본과 경영인들이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나,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한국인들의 맹렬한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은행장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 이윤용(李允用)이었으며, 은행의 대주주들이 거의 친일파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1920년대의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200만원의 구제자금을 융자받고, 1922년부터는 일본인들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었고, 1928년 3월에는 조선식산은행이 주식의 일부를 인수함으로써 조선식산은행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일제의 민족계은행통합정책에 의해, 1941년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을 흡수·합병하였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東一銀行)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이 된다.

한편, 한국에서 온 이희건이라는 젊은이는 고학으로 메이지대학 전문부까지 마치면서 장사를 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1917년에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15세에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쓰루하시에서 자전거 수리점 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귀국 대신에 오사카에 내려가 사업을 하고 있었다. 패전을 맞이한 일본정부가 조선인이 많은 쓰루하시 시장을 폐쇄하려는 시도에 주도적으로 반대하던 그는 쓰루하시 상점가동맹 초대회장으로 추대(1947년 8월)됐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그가 1955년에 만든 것이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라는 신용조합이었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을 위한 금융기관”을 표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고 한다. 그는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해 지역내 우량신용조합으로 발전시켰고 그 결과 1968년 신사옥 건립과 예금고 100억엔 달성 신화를 이뤘다. 1993년에 관서지방 5개 흥은과 합병해 보통은행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관서흥은(關西興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한편 그가 조국에서 금융업을 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1981년에 만들어진 재일한국인 본국투자협회였고, 당시 그 협회의 회장을 맡던 이희건이 그 해 7월 교민은행 설립 발기인 대회가 열린다. 그런데 마침 1982년에 한국정부가 5개 시중은행(산업, 한일, 제일, 서울신탁, 조흥)의 민영화 방침을 정하였고, 그중에서 역사가 길고 과거 일본인의 경영이 관여되었던 조흥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2001년에 신한금융지주회사가 탄생하게 된다.

역사 속에는 가보지 못한 많은 골목길들이 있다고 한다. 초현대건물 안에서 최첨단의 정보기술로 글로벌한 사업을 행하는 은행의 역사 속에도 많은 골목길이 숨어있음이 틀림없다. 다만 우리가 가보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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