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분열' 해결사는 中道, 당신 입니다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 2020-01-09 18:40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선거 때만 되면 나오는 ‘필승전략’은 여든 야든 중도층(中道層) 잡기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 있지 않은 유권자들을 내 쪽으로 끌어와야 이긴다는 것인데,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논리는 단순, 명쾌하다. 흔한 말로 집토끼는 지키고 산토끼는 잡으라는 얘기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누군들 선거에서 질까. 그런데 어디까지를 중도로 볼 것인가,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한국정치에서 중도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에 이르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중도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 첫째, 투표 행태론(voting behavioralism)의 관점이다. 투표 행태를 보니 당신은 고정된 지지정당이 없고 지지후보도 수시로 바꾸더라. 따라서 당신은 무당파(無黨派), 또는 스윙보터(swing voter)다. 우리가 흔히 “중도를 잡아라”고 할 때 맨 먼저 떠올리는 중도가 이런 행태론적 중도다. 둘째, 가치관(value)의 차원이다. 당신은 좌우 균형과 조화가 옳다고 믿고, 투표도 그 신념에 따라 하더라. 그렇다면 당신은 중도다(우리 편으로 끌어오기 쉽지 않을 수도 있는 진성 중도). 셋째, 역사적·사회적 관점이다. 중도는 해방공간에서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곧 김규식과 김구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오늘의 시대와의 정합성 여부와 관계없이 이게 중도(中道)의 출발점임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중도를 투표 행태론의 관점에서만 본다는 데 있다. 입으로는 좌우 균형과 조화의 가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양 극단에 표를 던지는 경우가 많고, 이게 중도의 특성(특권)인 양 하더라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중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생긴다. 중도란 소신도 철학도 없는 기회주의자이거나, 최소한 그렇게 비친다는 거다. 김행범 교수(부산대·행정학)는 한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한국의 중위·중간·중도층의 의미는 정책 선호의 연속선에서 합리적 중간 선호를 가진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실은 그들은 우파 아니면 좌파의 한쪽으로, 어느 쪽이 이길지 확신할 수 없어서 확률놀음을 하는 기회주의자이다···.”(‘중도의 허상을 좇는 보수정당’, 팬 앤드 마이크, 2019년 7월 9일)

서울대 강원택(정치학),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자신들을 보수(34명), 진보(33명), 중도·무당층(32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99명을 대상으로 20개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견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중도층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판단을 유보하는 집단이 아니라, 단지 ‘이중적 성향’을 가질 뿐이라고 했다. “(중도층은) 각 이슈의 중간지점에 있는 게 아니라 이슈의 성격에 따라 진보 혹은 보수로 바뀌는 이중 개념주의자이다. 중도파는 없다”는 것이다(임형찬, ‘왜 진보는 패배할까-중도층에 대한 그릇된 인식’,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7년 3월 25일). 한마디로 중도란 원래 없는 거니까 중도가 ‘중도답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다.

중도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은 과거 독재와 민주의 대치 시절 이래 선명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쿠라’로 몰았던 정치문화의 유산 탓이 크다. 중도를 투표 행태라는 렌즈만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도의 가치와 역할을 믿고, 이를 통해서 한국정치의 만성적 대결구조를 완화해 보려는 노력들은 여전히 치열하다. 채진원 교수(경희대·정치학)는 “세상은 후기 산업화, 지구화,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념적 진보화도, 이념적 보수화도 아닌 중도로 수렴되고 있는데도 한국정치는 여전히 극(極) 진보와 극 보수의 이념을 편향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중도 수렴이 부재(不在)한 양극적 정당체제를 고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른바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과 ‘갈등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conflict)'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권력이 특정 갈등을 덮기 위해 다른 갈등을 선호해서 부추기고,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는 “21세기 중도정치를 민생정치를 활성화하려는 시민정치운동, 또는 공화주의운동”으로 정의하고, 이게 성공하려면 양 극단에서 벗어나 중도로의 수렴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채진원, ‘무엇이 우리 정치를 위협하는가-양극화에 맞서는 21세기 중도정치’, ‘인물과 사상’, 2016년). 중도가 굳게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는 갈등의 편향적 동원도 그만큼 어려울 터이다.

김진석 교수(인하대·철학)도 결은 조금 다르지만 역시 중도의 가치를 옹호한다. “이제까지 정치적 이분법의 틀 안에서 중도가 무시·경시되기도 했고, 기껏해야 진보나 보수의 하위 파트너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또 그렇게 여기는 것이 이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중도의 여러 스펙트럼들이··· 기본적인 항수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우파와 좌파가 큰 목소리를 내지만 실제로는 중도와 연대하고 협력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김진석, ‘우충좌돌–중도의 재발견’, 개마고원, 2011년)

현실정치에서 중도의 가치는 거듭 확인되고 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격화된 좌우 진영대결도 한몫했다. ‘조국 사태’를 놓고 광화문과 서초동에 따로 모인 수십만 군중을 보면서 누구라도 “꼭 이렇게 갈라져서 싸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했을 것이다. 그 증오심과 적개심을 접고 화해와 화합의 장(場)으로 나오게 하려면 중도의 천명과 실천 외에 달리 길이 있을 수 없다. 중도란 결국 국가와 개인, 국가와 시장 간의 균형이다. 자유 시장경제를 견지하되 분배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 그게 중도다. 남북관계는 이른바 ‘상황의 이중성’에 따라 대화와 안보를 균형 있게 추구하고, 교육은 평등과 수월성이 함께 가고, 복지는 보편성과 선별성이 동시에 모색되는 게 중도다.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의 일상(日常)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자는 게 중도다.

우리 국민 중 스스로를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꾸준히 늘었다. 조선일보가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국민 이념성향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를 중도라고 한 비율은 28.1%였다(보수 41.1%, 진보26.0%). 이 수치가 2015년 광복 70주년 조사에선 47.4%로 뛰었다(보수 28.7%, 진보 20.5%). 2019년 4월 5~8일 한국리서치 조사에선 39.3%로 다소 줄긴 했지만 여전히 보수(26.4%)나 진보(34.3%)보다 많다. 중도의 비율이 이렇게 높은데도 왜 대한민국엔 좌와 우밖에 없는 것처럼 극한의 대립과 분열이 일상화됐을까. 이내영 교수(고려대)는 그 이유를 “국민 사이의 이념적 양극화라기보다는 언론이나 지식인, 기성정당 및 정치인들이 편향적으로 동원한 이념갈등이 증폭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중도를 키워서 갈등의 편향적 동원을 막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좌우 양 극단에서 불어오는, 아니, 불어넣는 분노와 적개심, 포퓰리즘의 바람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좌와 우의 거대 정당 사이에서 어부지리나 노리는 정당이 아니라 제대로 된 중도정당이 나와야 한다. 중도를 지향하는 유권자들도 나서야 한다. 편향성을 동원함으로써 국민을 편 갈랐던 정치인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낙선운동조차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지 않으면 중도는 또 무시당한다. 늘 그랬듯이 한낱 좌, 우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지난 2년 반 동안 미증유의 대립과 갈등을 경험했다. 광화문에서, 서초동에서 그처럼 참담했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4월 총선을 치를 수는 없는 일이다. 중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함으로써 선거도, 정치도 바꿔야 한다. ‘정서적 중도’에 그칠 게 아니라 ‘행동하는 중도’가 되어야 한다. 그럴 용기도, 지혜도 없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라도 중도를 입에 올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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