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 경영 상징, 김우중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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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구 기자
입력 2019-12-10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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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만 30세에 창립… 세계 경영의 상징, 샐러리맨의 신화

9일 운명을 달리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세계 경영의 상징, 샐러리맨의 신화 등으로 불리며 우리나라 산업화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김 전 회장의 신화는 만 30세였던 1967년 시작됐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당시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99년 그룹이 부도를 맞아 해체되기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까지 키웠다. 특히 김 전 회장은 창업 후 수출만으로 회사를 초고속으로 성장시켜 '대우신화'를 만들며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1989년 자전적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펴내 6개월 만에 100만부를 판매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웠고,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후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1990년대 들어서는 세계 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대우를 최대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당시 대우의 수출 규모는 국내 총 수출액의 10%에 이를 정도였다.

대우는 1998년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7년 11월 닥친 IMF 외환위기는 대우를 몰락의 길로 걷게 했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그는 2017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대우 창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우그룹 임직원들은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해마다 창업기념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했고, 매년 300여명의 임직원이 자리를 함께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돼 귀국한 뒤 아주대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으나 올 하반기부터는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주대병원 측은 김 전 회장은 알츠하이머를 앓았으며,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고 전해졌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르며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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