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인문학]'반대의 맛'이 개운찮다…생계형 반대가 판을 치는 동물정치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5-02 08:2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연합뉴스]



특정 야당을 해산해 달라는 청원이 145만명을 넘고, 마치 맞고소처럼 올린 여당 해산 청원이 20만명을 넘은 상황(5월 1일 기준)을 어떻게 봐야 할까. 패스트트랙 의결과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국회 후진화' 사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에 정당 해산 청원을 넣는 일이 민심을 반영하는 건 틀림없지만, 그 청원 숫자가 마치 선거의 표대결처럼 의미지어지는 일은 얄궂다. 그 숫자를 여야의 잘잘못을 가리는 지표로 읽는 건, 여야의 몸싸움만큼이나 거칠어 보인다. 청와대가 저 열화와 같은 청원을 받아들여 무슨 조치라도 취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상대 정당을 죽이면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여야의 정치 시스템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다. 3권분립이나 투표행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인 신이 아니기에, 완전한 의사결정과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다수나 반대자의 견제를 체계화한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적 기틀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정치인 윌리엄 풀브라이트(1905~1995)는 말했다. "민주주의 안에서 반대는 신념의 행위다. 약(藥)과도 같다. '반대'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의 맛이 아니라 그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 많은 반대는 약처럼 쓰고 성가신 것일 수밖에 없지만, 약이 존재하는 이유처럼 결과가 빚어내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정부의 입장과 다른 발언과 행위를 했더라도 결과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 외교관에게 주는 미국의 '건설적 반대상(Constructive Dissent Awards)'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반대'에 대한 증오가 우리에게 일상화된 까닭은 전쟁과 독재의 시절을 겪으면서 '일사불란 콤플렉스' 같은 것이 어느샌가 우리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를 반대하는 것은 '적'이며, 적은 '공존할 수 없는 섬멸대상'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만 옳으며, 상대는 우리의 옳음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이라는 관점도 거기에서 나온다.

그런데 최근 정치적 대치를 보면, 그런 옛 습관만이 아니라 2년 전 상황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촛불혁명과 더불어 집권에 성공한 현 정부는, '혁명'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상징에 이미 담긴 것처럼 전 정부에 대한 '강한 부정(否定)'을 실천함으로써 현재의 자리를 얻게 됐다. 권력은 얻었지만, 민주사회인지라 공수의 입장이 바뀐 여야의 적대적인 구도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한바탕 폭격을 맞은 듯 지리멸렬하던 전 권력이 가세한 야당세력이 대결의 전열을 갖추면서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 의욕을 진행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졌다. 

패스트트랙과 동물국회는 그 이전의 독재적 권력의 폭주 속에서 빚어지던 '반대'의 풍경과는 다소 다르다. 대통령이 전도(顚倒)된 일대 사건 이후, 전투태세를 갖춘 양 정파의 적의(敵意)가 브레이크 없이 충돌한 양상이다. 민주주의의 원론적 가치를 말하기에는, 그 반대가 격하고 치명적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에는 집권 여당의 정책적 뒤뚱거림도 한몫했다. 경제 활력이 눈에 띄게 사그라드는 상황에 큰 의욕을 보였던 남북문제마저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기에, 불평이 늘어난 민심에 기대어 야당이 일정한 기세를 모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민주당이나 한국당이 했어야 할 일은 이 '반대'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겸허하고 냉철한 성찰이 아닐까 한다. 과연 이 땅의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보완기능'으로서의 반대였나. 의견들의 치열한 공방으로 이뤄진 생산적인 '반대'가 아니라, 적진(敵陣)을 몰아붙이고 향후 상대 진지를 모두 점령하기 위한 전투적인 반대가 아니었나. 촛불을 든 까닭은 권력의 진영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후진 정치시스템을 제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여야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막장대결로 펼치는 반대 행각은, 이미 국민들은 접어버린 전 시대의 난정(亂政)을 소환한 '박근혜 2라운드'처럼 보일 뿐이다. 서로 극한대치로 몰아가는 '반대의 맛'이 개운찮다. 이 '반대'의 품질을 경영하지 않으면, 정치는 더 퇴락(頹落)할 수밖에 없다. '생계형 반대'가 기승을 부리는 정치가 해산을 청원하고 있는 정당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이상국 논설실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