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형폐지 등 형법 제정 성공한 가진, 왕조 비정의 업보에 自强은 실패했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해인 기자
입력 2019-02-06 16:0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⑯ 근대적 사법제도 확립

[동농은 법부대신으로 일하면서, 근대적 사법제도의 초석을 닦았다. 사진은 법부대신 임명 교지]



민씨들이 잘나갈 때, 평안도에 ‘마다리’라는 말이 생겼다. 관찰사가 평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부자들 재산부터 파악하고, 차례로 집을 찾는다. 부자들은 으레 수천냥씩 바치게 되는데, 관찰사는 돈꿰미를 바라보다 ‘이번에 당신이 ㅇㅇ 벼슬자리에 오르게 됐다’며 말문을 연다. 부자가 몸 둘 바를 몰라 상납금이 얼마냐고 여쭈니, 그 액수가 딱 자기 재산 전부다. 울상이 된 부자는 벼슬을 ‘마다’ 한다면서, 없던 일로 해주십사 싹싹 빈다. 이 벼슬 물리는 값이 족히 수만냥이다.
여기에서 ‘마다리(마다하리)’라는 말이 나왔다. 평안도에서 ‘마다리’란 곧 ‘돈을 뜯는다’는 뜻. 이 수법의 원조가 바로 민영준이다. 민씨들만 이런 게 아니었다. 조병식이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적에는 돈을 얼마나 뜯었던지, 애첩이 거처하는 내실의 장판을 은으로 깔아, ‘은장판(銀長板) 조보국(趙輔國)’이란 악명이 붙었다. 보국(輔國)이란 조병식의 품계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빗댄 말이다.
갑오개혁 뒤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로 일했고, 을사늑약 이후 장지연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선 윤효정(尹孝定)이 쓴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祕史, 박광희 편역 <대한제국아 망해라>)의 한 대목인데,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더 기막힌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안감사로 부임한 남정철(南廷哲)이 뇌물을 올리자 고종은 그를 크게 중용할 뜻을 비쳤다. 민영준이 후임으로 평양에 간 뒤 황금으로 만든 수레를 바쳤다. 얼굴색이 변한 고종은 이렇게 뇌까렸다. “남정철은 참으로 큰 도둑이었구나. 관서(關西, 평안도)에 금이 이리 많은데, 그자 혼자 독식했단 말인가.”
가렴주구를 서양의 군함과 대포로 지키는 걸 동도서기(東道西器)라고 이해한다면, 개혁은 가성비 최악의 ‘네버엔딩스토리’가 된다. 배수량 7,500톤의 청나라 북양함대 기함 딩위안은 자기 덩치 절반밖에 안 되는 일본의 방호순양함 요시노에게 쫓겨 달아났다. 개혁의 성패는 정강(政綱)보다 주체에 달린 문제다. 배짱은 대원군에 한참 못 미치고, 머리는 민비를 도저히 못 따라가는 고종. 김옥균도, 농민군도, 독립협회도 다 역적이라는 이 어리석은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공평무사(公平無私)는 방백(方伯)의 본분(本分)
동농은 고종을 떠나지 못했다. 대과 급제를 시켜준 은혜, 군신(君臣)의 의리를 어찌 저버린단 말이냐. 그게 그의 멍에요, 개화당의 한계였다. 독립협회 발족으로 분주하던 동농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한 건 1897년 5월. 딴 데 마음 쓰지 말고, 가산(家産)이나 마련하라는 거다. 그래야 피차 어색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러나 동농은 치부(致富)하라는 어명만큼은 받들 마음이 없었다. 동농이 부임한 지 1년 뒤, <독립신문>에는 “관찰사 김가진이 각종 잡세를 혁파하여 민정(民情)이 창연(昌然), 즉 백성들의 삶이 창성해졌다”는 기사가 실렸다(<독립신문> 1898년 4월 26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황해도 백성들의 제보였다. 동농은 부임하자마자 병으로 고생하거나 가난에 찌든 백성들을 구휼(救恤)했고, 해주, 서흥, 봉산 등 황해도 여러 군에서 백성들이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209). <독립신문>은 동농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도정(道政)을 처리했다는 보도기사도 내보냈다.

“해주에 민요(民擾)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어 ‘자세히 탐문’해보니 해주장에 곡식이 나오지 않아 성난 백성들이 곡식을 매점한 곡물상들을 때려죽이려 하자, 관찰사 김가진이 놀라 경찰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래어 해산시키고 구타당한 상인들을 치료해주고, 이들이 매점한 곡식은 시장에 풀어 시가로 백성들이 사 먹게 했다.”(<독립신문> 1898년 4월 23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윤효정의 <풍운한말비사>는 당시 고관대작들의 치부 행각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동농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완서(浣西) 이조연(李祖淵)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비의 신임을 얻은 뒤) 자연히 사는 형편 또한 크게 달라져 100여 칸이나 되는 화려한 집에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정원을 갖게 되었다”고 썼다(윤효정, 박광희 편역, <대한제국아 망해라>, p63). 하지만, 김가진 항목에는 돈과 관련된 부정적인 기사가 한 줄도 없다.

◆거듭 올린 상소, 대답 없는 황제
1898년 3월, 황해도관찰사에서 물러난 동농은 해주부 순명문(順命門)을 나서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마음은 도리어 황은을 저버렸네.
1년간 얻은 바가 무엇인지 알지만
양쪽 구렛나루는 희어지고 두 눈은 침침해졌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219)

군신의 의리와 개혁의 좌절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착잡한 소회(所懷)가 드러난다. 만민공동회 소두(疏頭)로 나서는 바람에 왕의 눈 밖에 난 동농. 인재 양성과 산업 육성에 전념하던 그를 고종이 다시 불렀다. 그만 한 신하를 구하기가 어디 쉬운가. 1900년 10월, 동농은 중추원의장에 임명됐다. 이리하여, 그는 갑오개혁에 이어 두 번째로 개혁에 앞장서게 된다. 임명된 직후, 동농은 결세(結稅, 농토에 매기는 세금) 인상과 인지(印紙)제도 도입을 주청(奏請)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그의 상소를 의정부에 보내 논의하게 했다. 대신들은 결세 인상은 찬성했으나, 인지제도 도입은 반대했다. 농지세야 자기네들은 치외법권이니 올리든 말든 상관없지만, 세원(稅源)을 확보하기 위해 거래를 투명하게 하자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 개혁하지 말자는 소리였다.
동농은 보름 뒤에는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새롭게 정리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은결(隱結, 세금 징수를 피해 나라에 신고하지 않은 농토)을 찾아내고, 군역을 고르게 부과해, 개혁예산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한홍구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는 “대한제국이 살아나느냐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느냐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고종은 대신들에게 미루고, 대신들은 또 반대했다.
동농은 줄기차게 상소를 올렸다. 1903년 11월 15일에는, 백동화(白銅貨) 폐지를 주장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면, 가계(家計)부터 결딴나고, 결국에는 개혁을 허무는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이 상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이 악화의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백동화 폐지 상소에서, 동농은 “개혁한 초기에 제도와 규정을 정하여 의정부로 하여금 중추원에 물어보고 의견을 올리도록 한 것은 대개 크고 작은 관청으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여 부족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며, 고종에게 중추원의 위상과 기능에 대한 인식 전환을 호소했다. 그러나 동농 자신이 상소에서 밝혔듯이, 의정부는 중추원의 질의에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근대적 사법제도 확립에 나서다
동농은 1904년 3월 농상공부대신에 두 번째 임명되고, 9월에는 법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법부대신으로 있는 동안, 그는 한국 법제사에 길이 남을 뚜렷한 업적을 남긴다. 그해 10월, 법부대신 김가진은 “경찰은 체포된 피의자를 24시간 이상 구금할 수 없고, 이 시한을 넘길 시에는 반드시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훈시를 내렸다(<황성신문> 1904년 10월 10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근대적 사법제도의 확립과 인권 보호를 향한 동농의 신념은, 대한제국 법률 제2호인 <형법대전(刑法大全)>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형법교정소(刑法校正所) 총재를 겸임했다. 이때는 이미 법부가 형법 초안을 마련한 뒤였으나, 미흡하다고 여긴 그는 교정작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 작업은 오래 걸렸다. 동농은 법부대신에서 물러난 뒤에도 형법교정소 총재를 계속 맡으며 <형법대전> 반포 사업을 지휘했다. 동농의 손에서 대한제국의 형법은 새롭게 태어났다.

“<형법대전>의 간행은 여러 가지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기의 홍범 14조에서 표명된 형법 제정 계획이 10년 만에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법대전>에도 물론 포함된 것이지만, 대한제국 시기 사법과 행형제도의 정비에서 김가진의 업적으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것은 참형을 금지시킨 것이다. 매천 황현은 몇몇 대목에서 김가진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를 하였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참형의 폐지는 김가진의 말을 따른 것이라고 명시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광무개혁(光武改革)은 자주독립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조선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중추원의장에 임명된 동농은 이 기회를 살리고자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미 기운 왕조를 그 혼자의 힘으로 떠받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500년 왕조가 겹겹으로 쌓아둔 비정(秕政)의 업보는, 나라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렸다. 자강(自强)은 실패했다.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
 

[동농은 교육이 자강(自强)의 토대임을 늘 강조했다. 사진은 기호흥학회 회보, 畿湖興學會月報(1908).]



인재 양성·산업 육성, 자주독립의 토대 마련

황해도관찰사 김가진이 가장 힘을 쏟은 분야는 교육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소학교령(小學校令)’이 공포됐고(1895년 7월), 학부령 제1호로 ‘보조공립소학교규칙’이 제정돼 초등교육에 대한 국고금 보조가 시행됐다(1896년 2월). 하지만 국왕부터 자기 호주머니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는 터에, 교육예산이 확보될 리 만무하다. 1898년 10월 현재, 전국의 공․사립학교 학생수는 2천여 명에 불과했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동농은 해주부(海州府)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하고, 연금(捐金) 1만 냥을 모아 그 이자로 교비(校費)를 충당하게 했다.
교육에 대한 동농의 열정은 남달랐다. 그는 특히 한글교육을 역설했다. “언문학교 설립을 학부에 청원해 인가를 받아내고”, “자신이 교장에, 부교장에는 황족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교감에는 지석영(池錫永, 종두법을 보급한 그 사람이다)을 각각 내정했다.”(<황성신문> 1902년 2월 3일자,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동농은 또한 과학기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광무학교(鑛務學校)와 체신학교(遞信學校) 설립에 관여하고, 교재 서문을 썼다.
충청남도관찰사(1906) 시절에는, 도내 각 향교 소유의 전답을 조사해 이를 재원으로 삼아 신식학교를 설립하라고 군수들을 다그쳤다. 동농이 신식교육 보급에 전력한 이유를, 그가 주도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1907) 회보 창간호에 기고한 논설 ‘기호애국동포에게 고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럽에서 거의 망할 뻔했던 프러시아가 일거에 나라를 되살려 일등강국이 된 것은 ‘강제적 교육의 힘(의무교육)’ 덕분이고, 아시아에서 일본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힘 역시 ‘애국적 교육’에서 나왔다.”(김가진, ‘告畿湖愛國同胞’, <畿湖興學會月報> 제1호,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교육은 개화당 동농이 구축하려 했던 자주독립의 토대였다. 그는 기호흥학회 교육부장 자격으로 지역을 순회하며 ‘흥학(興學)’에 동참을 촉구하는 한편, 기호학교(畿湖學校, 현재의 중앙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양성을 위해 ‘교사소개소’를 설치했다. “풍우한서(風雨寒暑) 돌보지 않고 매일매일 기호학교에 출근하는 등 노력했지만 그 결실을 보기 전에 기호흥학회가 해산되어 근심과 분함으로 병까지 들었다”고, 동농의 이력서는 전한다(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자주독립의 토대를 닦기 위해 동농이 심혈을 기울인 또 하나의 안배(按配)는 산업의 육성이었다. 1899년 2월, 그는 양잠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뽕나무를 들여와 재배하고, 전습소(傳習所)를 열어 양잠기술을 보급했다. 동농의 노력으로, 5~6년 사이에 전국에서 양잠학교나 전습소를 졸업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농광국장 서병숙이 양잠의 발전에 공이 크다 하여 포상을 상신했을 때, 농상공부는 그것이 어찌 그 한 사람의 공이냐며, 이렇게 밝혔다. “막대한 자금을 모집하여 회사를 조직한 것은 중추원 찬의 김가진이요…….”(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제국의 대신으로 출발해 교육자와 실업가를 거쳐 민국의 국민으로 거듭나는 길을 선택한 동농 김가진. 그의 일생은 개화당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와 애국계몽운동,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잇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유일무이한 이정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