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⑯]살육과 아편의 비극 속, 여성 독립운동을 지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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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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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수도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지도부(1940.5.16,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 이청천, 송병조, 조완구, 이시영, 김구, 유동열, 조소앙, 차리석)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석오의 유언을 받들어,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이 통합했다(1940년 5월). 통합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떠받치는 단일정당이 되었고, 이어서 개헌을 단행해 주석(主席)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했다(1940년 10월). 이제 남은 과제는 독립전쟁을 실행할 군대의 창설이었다.
1940년 5월, 백범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장제스에게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편련계획(編鍊計劃) 대강(大綱)>을 제출했다. 11개항으로 이루어진 이 대강의 핵심은 임시정부가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해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며, 중국 측이 중한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아 광복군을 지휘․통솔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한국광복군이 중국 항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비준했고,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위원장 백범)를 구성했다. 남파 박찬익, 백산 이청천, 춘교 유동열과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당시 이명 안훈),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등이 실무 작업에 나섰다. 성엄은 주계(主計) 직임을 맡았으며, 창설 뒤에는 정령(正領, 현재 한국군 대령에 해당) 계급을 달고 조직훈련과장과 정훈처 선전과장으로 일했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식을 마치고 1940.6.17 아랫줄 왼쪽 두번째가 수당.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한국여성동맹 간사로 선출되다
그해 9월, 임시정부는 충칭 시내로 청사를 옮겼다. 주소는 허핑로(和平路) 우스예샹(吳師爺巷) 1호. 구식 2층 건물이었지만, 예전 청사들보다는 꽤 넓은 편이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초 렌화츠가(蓮花注街)의 더 넓은 청사로 옮길 때까지, 이곳에서 5년 동안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성엄도 충칭으로 갔고, 치장에는 가족들만 남았다.
임정 안살림을 꾸리고 요인들 뒷바라지를 하는 일은 덜었지만, 수당에게는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6월, 치장에서 한국여성동맹이 결성됐다. 그는 간사로 선출되었다. 수당은 회고록에서, 이 조직이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기보다는 한국독립당 여성당원의 친목단체 구실을 했다며 말을 아꼈지만, 실제로는 많은 책임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중국정부 요인이나 연합국 측 손님들을 대접할 때, 한국여성동맹이 충칭으로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때마다 수당이 총책임자로서, 대소사를 치렀음은 물론이다. 여성동맹 간사로 활동하면서, 임정 식구들 사이에서 그의 역할과 비중은 더 커졌다.
임정 소속 부인들은 늘 손에서 일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객지를 떠도는 피난민이 아니라 독립운동 일꾼들이었다. 임정의 행사에 부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자녀 교육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방학 기간에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서, 우리말과 역사, 노래, 춤 등을 가르쳤다. 이 일은 해방이 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다.
 

[3.1유치원 개원 기념 1941.10.10 왼쪽 끝 연미당 가운데 김병인 왼쪽 끝 수당 사본.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투차오(土橋)에 둥지를 틀고
임시정부 청사가 충칭으로 옮긴 다음해 2월, 임정 식구들은 치장을 떠나 충칭 남쪽 25km 근방의 둥칸(洞坎)으로 이주했다. 둥칸은 흔히 투차오(土橋)라고 불렸는데, 충칭 외곽지대에 있어서 임정 일을 거들기가 용이했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갈 게 분명했고, 임정은 투차오에 집을 세 채 지어 식구들을 안돈시켰다. 투차오에서 수당들은 귀국할 때까지 살았다.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쪼들리기는 변함이 없었으나, 피난길에 비하면 제법 안정이 된 셈이었다. 투차오가 있는 쓰촨 남부는 아열대성 기후라 한겨울에도 영하의 날씨는 이틀이나 사흘이 고작이었다. 마을 앞에는 화탄치(花灘溪)라는 냇물이 흘렀다. 이름에 꽃이 붙은 만큼 물이 맑아서, 식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미역도 감을 수 있었다.
쓰촨은 요즘 중화요리집에 가면 반찬으로 나오는 짜차이(搾菜)라는 채소의 명산지다. 농사가 서툰 수당도 짜차이를 심었다. 고구마와 옥수수를 거둘 때면, 고향에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쌀은 중국정부로부터 배급을 받았다. 평가미(平價米)라고, 우리나라 70년대 정부미 같은 건데, 시중가격의 절반이었다. 도정(搗精)을 덜 해서 쌀눈이 살아 있는 게, 영양은 오히려 더 나았다. 가끔씩, 물을 부어 무게를 늘린 바람에 발효가 된 쌀을 받기도 했지만.
충칭 시절부터, 월급도 나왔다. 임정은 가능한 한 모두가 고르게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망명정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편이 중국정부나 기관에 적을 둔 집안과 가장을 전선으로 떠나보낸 식솔의 형편이 같을 수는 없었다. 수당은 희영, 희옥, 영걸 삼남매를 홀로 키우는 오광선의 부인 정씨에게 특히 정을 더 쏟았다.
 

[20세기초 중국 아편굴. 사진=바이두]

# 무차별공습과 아편
전쟁 전 50만이던 충칭의 인구가 배로 불어났다. 도시 한 가운데 장강을 끼고 있는 충칭은 안개의 도시다. 우리의 춘천처럼,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물안개가 도시를 뒤덮는다. 아직 미국이 참전하기 전이다.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가시거리가 확보되는 여름만 되면 충칭에 무차별폭격을 가했다.
중국정부는 강 언덕을 따라 방공호를 파서 공습에 대비했지만, 불어난 인구를 책임지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시민들에게 방공호 출입증을 발급했고, 안개가 걷히는 계절이 오면 출입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시 외곽으로 소개(疏開)시켰다. 이 때문에, 충칭 인구는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늘어나 130만까지 늘어났다가, 날이 풀리면 100만으로 줄어들었다.
무차별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이 연출한 야만적 살육의 한 장면이다. 전쟁 초기에는 런던과 충칭이, 연합국이 제공권을 회복한 중기 이후에는 독일과 일본의 주요도시들이 아비규환의 불지옥으로 변했다. 지금도 충칭은 전쟁 당시 몸서리치던 참극을 잊지 않기 위해, 공습을 피하게 해준 천연의 방어벽을 선물한 안개가 깔리는 가을에 ‘안개축제’를 연다고 한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시민들은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러나 방공호도 결코 안전하지는 않았다. 9월 초, 산소부족으로 수천 명이 질식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날 백산 이청천도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했다. 백산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조카 석동이 부축해 사람무리를 뚫고 빠져나온 덕분에 화를 면했다. 독립전쟁을 시작도 못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이 순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간신히 막은 셈이다.
이방인 수당의 눈에 비친 충칭은 아편의 도시였다. 큰길가 상점에서 대놓고 아편을 팔았다. 중국에서 아편 매매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라가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전쟁 와중에 아편이라니. 장제스의 국민당정부는 끝내 아편을 근절시키는 데 실패하고, 대만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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