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1] 몽골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독립하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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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27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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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몽골인민당 결성
당시 몽골 내부에서는 하나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 군벌에 의해 몽골의 자치가 취소된 1,919년을 전후해 몽골의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몇 개의 소그룹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서로 연대 활동을 통해 1,920년 6월 몽골인민당을 결성했다.
 

[사진 = 수흐바타르(몽골국립박물관 소장)]

몽골인민당의 창설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 20대의 수흐바타르였다. 그는 식자공으로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의용군에 들어가 무장독립군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초기에 이 단체는 규모가 아주 작은 비밀조직에 불과했다. 이 조직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볼셰비키 정부 밖에 없었다.
 

[사진 = 러시아, 이르쿠츠크]

러시아 측도 이때 바이칼 주변의 도시 이르쿠츠크에 몽골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다. 같은 해 10월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은 몽골 인민의 투쟁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러시아 공산당 강령이 몽골어로 번역되고 러시아 공산당과 몽골인 독립운동가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 몽골에 공산주의 사상은 거의 침투되지 않았다.

러시아 공산당이 몽골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스테른베르그의 외몽골 침입때문이었다. 그래서 1921년 1월 이르쿠츠에 코민테른 극동서기국이 설립되자 그 산하에 티베트 몽골부를 설치하고 몽골 문제를 담당하도록 했다.

▶白軍의 외몽골 장악

[사진 = 복드칸 궁전]

1,920년 10월, 브리야트 지역에 있던 스테른베르그의 反볼셰비키파 군대가 외몽골을 침입했다. 외몽골을 반볼셰비키운동의 기지로 삼으려는 목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내전의 불똥이 몽골에까지 미친 것이다.

[사진 = 이태준]

이듬해인 1,921년 2월, 후레에 입성한 스테른베르그의 군대는 중국 군벌에 의해 무너진 복드칸 정권을 복구시켰다. 꼭두각시 정권을 내세워 몽골에서 발판을 굳히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들 군대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후레를 비롯한 외몽골 지역은 이내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복드 칸의 어의(御醫)였던 한국인 이태준이 스테른베르그 일파에게 살해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수흐바타르軍의 백군 격파
러시아측은 스테른베르그의 백군이 몽골로 밀고 들어갈 때부터 일본과 중국의 반응을 살피면서 몽골에 군사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1년 3월, 몽골인민당은 제 1차 당 대회를 러시아의 국경도시 데드시베에서 열고 임시 인민정부를 수립했다.

이 때 강령을 보면 이들은 장기적으로 전체 몽골족의 통합과 독립을 지향하면서 당면과제로서는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임시 인민정부는 군대를 모집해 후레를 점령하고 있는 백군을 몰아내기 위한 행동에 곧바로 착수했다.

[사진 = 수흐바타르]

당시 인민군의 총사령관은 수흐바타르였다. 몽골혁명가회의가 그를 인민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인민군은 우선 캬흐타를 공격해 그 곳에 있던 중국군을 몰아냈다.

이어 소비에트군의 지원 아래 외몽골을 공략해 들어갔다. 후레까지 밀고 들어간 인민군은 스테른베르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잠시 백군의 수중에 있었던 외몽골은 다시 몽골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스테른베르그는 그해 9월 처형됐다.

▶몽골인민혁명 성공

[사진 = 몽골전통무용 ‘참’ 공연(칭기스칸 광장)]

1,921년 7월 11일 몽골 인민당은 인민정부를 수립했다. 몽골의 인민혁명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이날이 지금까지 몽골의 건국 기념일이 됐다. 인민정부의 수립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1년 11월 몽골 인민정부와 러시아 사이에는 우호조약이 체결되고 두 나라는 서로를 독립국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國父 수흐바타르

[사진 = 칭기스칸 광장 (舊 수흐바타르 광장)]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중심가에는 넓은 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광장의 주변을 정부의 청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그 광장의 한 가운데는 말을 탄 채 오른 손을 치켜들고 있는 한 인물의 동상이 서있다. 그 동상의 주인공은 몽골인들이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있는 수흐바타르다.

광장의 이름도 수흐바타르였다. 그러나 2,013년 몽골정부는 이 광장의 이름을 칭기스칸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면서 칭기스칸의 동상도 정부청사 앞에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광장을 수흐바타르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사진 = 수흐바타르 동상 ]

이 광장의 중앙에 서 있는 수흐바타르 동상은 1,946년 몽골 인민혁명 25주년을 맞아 몽골의 유명한 조각가 초임볼이 만든 것이다. 당시 몽골이 소련의 위성국으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상황이라 초임볼이 수흐바타르의 동상에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담으려했던 것은 이해될 만하다.
 

[사진 = 동상에 새긴 어록]

동상의 수흐바타르가 북쪽 러시아를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국화인 해바라기를 닮으려했다는 설명이다. 동상의 동쪽 면에는 단결과 투쟁을 호소하는 수흐바타르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전 인민이 같은 방향으로, 같은 의지로 뭉친다면 얻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시민의 휴식처 수흐바타르광장
아마 울란바토르를 방문했던 사람 가운데 이 광장에 가보지 않았거나 동상을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도 여러 차례 이 광장을 지나쳤고 당시 바가반디 몽골대통령을 만나러가면서도 이 광장을 거쳐 정부청사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 광장은 울란바토르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사진 = 칭기스칸 좌상(몽골 정부종합청사)]

그래서 이곳을 찾아 여가를 보내는 시민들의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 몽골의 최대 축제인 나담도 매년 7월 11일 이른 아침 이곳에서 시작된다. 몽골인들이 이 광장을 특히 사랑하는 이유는 민족의 영웅으로 받드는 수흐바타르의 시신이 정부종합청사 앞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사당에 안치돼 있기 때문이다.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한 영웅
몽골혁명 당시 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수흐바타르는 레닌에게 편지를 보내 몽골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면서 몽골과 소련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를 처음으로 맺은 인물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그는 인민정부가 출범한 지 2년만인 1,923년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너무 일찍 죽어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진 = 광장의 사자상]

짧은 생을 살기는 했지만 몽골 역사에 한 전환기를 만드는데 기여한 그는 지금도 몽골인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전적으로 소비에트 정권에 기대어 몽골의 운명을 결정 지으려한 측면이 있고 실제로 그가 죽은 후 몽골의 운명은 그렇게 흘러갔다.

수흐바타르의 그러한 성향은 앞서 언급한 그의 동상에도 형상화 돼 있다.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시장 경제체제에서 28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몽골인들이 수흐바타르에게 내리는 평가는 과거처럼 한결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장의 이름이 칭기스칸광장으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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