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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4] 淸 지배 아래 어떻게 살았나? ②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8-03-16 08:01수정 : 2018-03-16 08:01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물물교환 형식의 商去來
물자의 조달은 유목민의 최대 현안 중에 하나다. 생산품이라야 고기와 유제품 그리고 가축의 가죽과 털이 거의 전부이다시피 한 유목민들은 항상 물자 부족에 시달려왔다. 그러한 물자부족은 유목민들을 전쟁과 약탈에 나서도록 만든 하나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냥 전쟁을 해서 물자를 약탈해 올 수만은 없기 때문에 내부 또는 외부와의 교역이 점차 이루어졌다.
 

[사진 = 양털 실은 트럭]

그러나 그 것을 전문적 상거래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원시적인 물물교환 형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양 한 마리를 밀가루 한 포대와 바꾸고 양가죽과 생필품을 맞바꾸는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문적인 상인이 중간에서 조정하는 전문적인 거래도 별로 없었고 시장이 형성이 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교역금지로 물자부족 현상

[사진 = 청나라 상인 회계장부(몽골 역사박물관)]

이러한 몽골인들을 대상으로 청나라는 지배 초기에 내부적인 교역이나 외부와의 거래를 막음으로써 물자 부족의 고통을 안겨줬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한인(漢人) 상인들의 대거 진출을 조장하거나 방치함으로써 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수탈되는 더 큰 고통을 몽골인들에게 가져다줬다.

통치 초반에는 내부적으로 각 호쇼간의 왕래를 막은 것은 물론이고 한인(漢人)이나 러시아인과의 교류도 철저히 차단했다. 몽골의 역사학자 오치르 바트 교수는 만주인들이 몽골인들과 러시아인 또는 한인들의 접촉을 막은 이유는 교역을 하는 동안에 서로 교류를 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서로 힘을 합쳐 청조에 대항하고 나설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상호 왕래를 통해 힘이 모아지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얘기다. 또한 몽골의 유목 사회를 가능한 한 외부 사회와 단절 시켜두고 유사시에는 황제의 동맹 군사력으로 동원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규정을 만들어 한인상인들이 몽골로 들어가는 것을 규제하려 했다.

그러한 통제는 물물교환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생필품의 부족 현상이 심화되는 등 몽골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한인상인(漢人商人), 경제권 장악

[사진 = 몽골 국영 백화점]

몽골과 중국 한인(漢人)사회가 완전 통제아래 들어왔다고 판단한 시점부터 청나라는 한인상인들의 몽골 고원 진출을 점차 허용했다. 이것은 몽골 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끼쳤다. 한인상인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유목민의 생산품이 외부세계로 흘러 나가고 많은 소비재가 한인 상인들에 의해 몽골로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상업망이 형성됐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상거래에 서툰 사람들이다. 특히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에 비해 부(富)를 축적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재생산을 위한 잉여축적이라는 개념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장사를 전문으로 하는 한인 상인들이 이러한 사회에 들어와서 경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경제권이 한인의 손에 장악되면서 몽골의 영주에서부터 유목민에 이르기까지 한인상인의 수탈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경방과 서방의 몽골 상권 장악

[사진 = 울란바토르 시장]

몽골에서 활동한 한인상인들은 주로 북경에 본거지를 둔 경방(京幇)과 산서(山西)지방 상인을 주축으로 하는 서방(西幇)출신이었다. 그들은 몽골로 들어와 지내면서 고정가옥을 짓기도 하고 시장과 집단촌을 형성시키기도 했다. 청나라는 몽골의 통제를 위해 몽골의 요충지에다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켰다.
 

[사진 = 울란바토르 시가지]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한인상인들이 들어와 시장과 집단촌을 만들어냈다. 그런 것들이 어찌 보면 유목사회에 정착 도시를 만들어낸 출발점이었다. 지금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생겨난 도시로 볼 수 있다. 그렇게 한인상인들이 활개 치면 칠수록 모든 경제력은 그들에게 집중되고 몽골인들은 빈곤의 악순환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총독부의 비호를 받던 일본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농촌의 토지를 장악하고 농촌경제를 피폐화시킨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농경지로 변한 내몽골 초원

[사진 = 내몽골 지역 채소밭(음산산맥 근처)]

실제로 몽골에서도 초지까지 잠식당하는 심각한 결과가 빚어졌다. 특히 한인들의 거주지와 가까운 고비사막 남쪽 내몽골 지역의 경우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했다. 내몽골 지역 일부에서는 본래부터 농사를 짓기는 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안정 기반을 구축하면서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꾸는 작업이 급속히 진행됐다.
 

[사진 = 몽골 서부지역 경작지]

중국에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잉여인구가 만리장성을 넘어 내몽골 지역으로 흘러들었다. 원래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정주민들이 새 정착지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농사짓는 일밖에 없었다. 넓은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꾸는 개간 작업이 그래서 시작된 것이다.

▶한인들로 채워진 내몽골

[사진 = 울란바토르 근교 농장]

원래 초원이었던 내몽골 지역 어디에서나 넓은 농경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개간 작업의 결과였다.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될수록 가축을 키울 터전이 줄어드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뿐만 아니라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꾸면서 토지의 황폐화 현상이 초래됐다.
 

[사진 = 초원의 황막화 현상]

별다른 조치 없이 바람 많은 지역의 초지를 농토를 바꾸면 토지가 황폐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내몽골의 농경지 주변에 대부분 방풍막이 둘러쳐진 것은 그 때 경험의 바탕 위에서 취해진 조치다. 지금 외몽골의 넓은 초원을 농경지로 개간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도 토지의 황폐화를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면서 농토를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진 = 몽골 동부지역 밀 밭]

중국 본토와 인접한 내몽골 지역의 각 호쇼는 그 결과 많은 한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한인의 수가 몽골인의 수를 능가하는 곳이 늘어났다. 청나라의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내몽골이 외몽골로 통합되지 못하고 중국 땅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인적구성도 큰 몫을 했다.

▶한인침투에 대한 몽골인 저항

[사진 = 나무감옥에 갇힌 몽골인]

아무튼 이전의 몽골 유목민들은 한인 농민들에게 포위돼 싫든 좋든 익숙하지도 않은 농업에 종사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여기에 한인상인들이 활개를 치면서 빚까지 크게 늘어났다. 자연히 몽골인과 한인 사이에 감정의 대립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 말기 들어 내몽골 각지에서 발생한 몽골인들의 반한봉기(反漢蜂起)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몽골인들의 저항은 비단 한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각 호쇼의 영주도 겨냥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인농민들을 불러 들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체 상태에 놓인 몽골사회에 한인들의 잠식이 가속화되면서 몽골 유목사회는 고유의 특성을 잃어버린 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의 사회를 무력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종교를 이용한 통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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