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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7] 부처의 가피력(加被力)이 나타났나?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7-12-08 08:48수정 : 2017-12-08 08:48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부처님 말씀 기록한 경전
대장경(大藏經)이란 무엇인가? 가장 쉽게 말한다면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서(聖書), 이슬람교의 코란(Koran)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교리가 빠짐없이 기록돼 있는 경전이라고 보면 된다.

대장경은 범어로 트리피타카(Tripitaka)라 부른다.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인 율(律),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 놓은 논(論)이 그 세 가지다. 광주리에 담긴 것이 이 세 가지이기 때문에 삼장경(三藏經)이라고도 하고 불교경전 전체를 뜻한다는 의미로 일체경(一切經) 이라고도 한다.

▶ 현존 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
일찍이 인도에서는 불전을 나뭇잎에 새겨 ‘패엽경(貝葉經)’이라 불렀다. 하지만 자연재해나 전화 등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다 보니 돌이나 나무에 새겨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바로 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진 팔리어경전(Pali語經典)과 7세기에 만들어진 티베트대장경(Tibet大藏經)이 있지만 우리의 팔만대장경과 같은 종류인 한역대장경은 10세기 송나라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 팔만대장경 인쇄본]

그 것이 최초의 목판 대장경인 북송의 칙판 대장경(勅版大藏經)이다. 이를 시작으로 동양에서는 30여종의 대장경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추종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가장 우수하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재조 고려대장경’(再雕 高麗大藏經)이라고도 불리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 거란침입 격퇴, 가피력의 덕으로 인식
대장경을 만드는 일은 시와 때를 가릴 것이 없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엄청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대장경의 가피력(加被力)으로 외적을 물리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피력이란 부처나 보살이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베푸는 힘을 말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11년, 거란군이 개경까지 쳐 내려와 성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羅州)까지 피신했다.

여기서 부처의 가르침을 받드는 온 국민의 정성으로 외적을 물리쳐보자는 시도로 18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 ‘초조 고려대장경(初雕 高麗大藏經)’이다. 부처의 가피력 덕분인지 강감찬(姜邯贊)장군이 유명한 구주대첩(龜州大捷)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10만의 거란병 가운데 겨우 수천 명만 살아서 돌아가는 등 외적의 침공을 물리쳤다.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했던 이 초조 고려대장경은 몽골이 2차 침공 때 불을 질러 소실됐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불력에 의한 구국을 기대하며 대장경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 16년간에 이르는 대 작업 시작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이 간절한 기원을 들어사, 신통의 힘으로 완악(頑惡)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 다시는 우리 국토를 짓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나라 안팎이 평안하며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제자 등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을 보호하고 부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사진 = 이규보 군신기고문]

이규보는 1237년 대장경판을 새기면서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을 통해 불력으로 몽골의 침공을 물리쳐 주기를 이처럼 기원했다. 이보다 한해 앞서 고려조정은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16년간에 걸친 대장경 제조 작업에 들어갔다. 목수와 각수 등 각 분야에서 이름난 고려 장인들이 대거 이 작업에 동원됐다.

작업은 몽골의 침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대인 강화와 남해 두 곳에서 진행됐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자작나무, 후박나무 등 10여종의 목질이 좋은 나무들이 두 곳으로 실려 왔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였다. 해인사 대장경연구소가 직접 조사한 결과 두 나무가 전체 83%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남해지방에만 분포하는 후박나무와 굴거리나무도 포함돼 있어 판각장소 가운데 한 곳이 남해였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 오․탈자 하나 없이 5천3백만 자 새겨

[사진 = 팔만대장경 조조]

먼저 이들 나무들을 바닷물 속에 3년 동안 담갔다가 조각을 냈다. 조각난 나무를 다시 소금물에 삶은 뒤 그늘에 말려 대패질을 했다. 판각에 앞선 사전 준비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이다. 가로 70Cm, 세로 30Cm 쯤 되는 경판에는 평균 14자씩 23행의 경문이 새겨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경판은 총 8만 천 2백여 판으로 앞뒷면에 판각이 됐으니 쪽으로 따지면 16만 2천여 쪽에, 새겨진 글자만 해도 5천 3백만여 자였다. 그냥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글자를 칼로 나무판에 하나하나 새겼다. 그 것도 마치 한사람이 쓴 듯이 똑같은 필체의 정자로 새겨졌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글자에 오자나 탈자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 같은 결과는 얼마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판각을 하고 교열을 보는데 시간과 공을 얼마나 들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기업들이 품질향상과 무결점 운동을 펼치면서 결함이 없다는 성경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거론하며 본받을 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만하다.

▶ 순도 99.6%의 구리 야금 기술
판각을 마친 뒤에는 경판 양쪽 끝에 경판보다 약간 높게 두꺼운 각목으로 마구리를 만들고 그 네 귀퉁이에 구리판을 붙였다. 경판의 뒤틀림이나 터짐을 막고 경판끼리 서로 부딪쳐서 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구리의 순도는 99.6%, 전기분해기술이 없던 당시 고려인들이 신비에 가까운 야금 기술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팔만대장경 목판]

그 것으로 작업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판마다 특수비방의 옻칠을 해서 부식을 막는 조치까지 취했다. 만들어진 경판들은 최우가 대장도감 옆에 세운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됐다. 현재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자리 잡았던 선원사의 뜰 앞에서는 부두가 보여 목판 재목을 운반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사진 = 선원사지]

147년 동안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었던 선원사는 조선 태조 때 대장경이 한양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겨진 후 황폐화돼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선원사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지난 95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도 추진되고 있다. 선원사 자리에는 팔만대장경 박물관이 들어섰고 복원을 위한 터까지 잡아 놓아서 조만간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 "해인사 이전 이룬 무학대사의 혜안"

[사진 = 가야산 해인사 현판]

1398년 5월, 조선 태조 6년 때 군사 2천여 명의 호위아래 대장경은 지천사로 옮겨졌다. 태조가 지금 원효대교 근처인 용산강(龍山江)에 나가 영접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하고 있다. 9개월 뒤인 이듬해, 정조 원년에 대장경은 다시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안전하게 보존돼 오고 있다. 4Cm 두께의 대장경을 쌓으면 높이가 3,200m 이상으로 백두산 보다 높다. 이 엄청난 분량의 대장경을 한양에서 합천까지 천리 길을 옮겨갔는데도 흠집하나 없는 것도 미스터리다.
 

[사진 = 대장경판전 비석]

조계종의 종정이자 해인사의 큰스님이었던 성철(聖哲)스님은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것은 전적으로 무학 대사(無學大史)의 혜안 덕분이라는 점을 자주 언급했다고 성철스님의 상좌였던 원택(圓澤)스님이 전하고 있다.
 

[사진 = 성철스님]

해인사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즉 화재나 풍수해 등이 없는 명당으로 알아보고 귀하고 귀한 대장경판을 내륙 깊숙한 길지(吉地)인 해인사로 옮기자고 주장해 태조의 마음을 움직일 사람은 무학 대사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성철스님은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판전으로 포행(步行; 천천히 걸으며 참선하는 것)을 나왔을 때 자주 언급했다고 원택스님은 회고했다.

▶ 또 하나의 금자탑 장경판전

[사진 = 팔만대장경 조조]

팔만대장경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는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과 숱한 전란 속에서 이를 훼손시키지 않고 보관해온 기술과 정성이 없었다면 그 가치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고려문화의 금자탑이라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조선 문화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진 = 장경판전]

성철스님이 언급한대로 대장경은 삼재불입지지에 보관됐기 때문에 장경판전을 세운 이후 해인사에서 일곱 번이나 화재가 일어나 사찰 등을 태워버렸지만 장경판전만은 온존하게 보존됐다. 임자호란과 병자호란은 물론 한국전쟁 때도 위기의 순간순간을 넘기며 무사할 수 있었다. 해인사에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보존한 故 김영환(金英煥)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 = 김영환 장군]

대장경 경판을 본떠 만든 비석에는 해인사 주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인민군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부한 김장군의 공적을 칭송하고 있다. 당시 공군 10전투 비행전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1954년 장군으로 승진됐으나 비행도중 순직했다.
 

[사진 = 김영환장군 공적비]

몽골의 침공을 막는 데 특별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부처의 가피력이 이후에 고비 고비마다 나타나 대장경을 무사히 지켜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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