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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93] 유목민들은 왜 바다로 갔나? ③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7-11-23 10:03수정 : 2017-11-23 10:0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천자가 나루를 건넌 곳
직고가 지금의 천진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明)이 들어선 얼마 후였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조카인 혜제(惠帝)와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면서 북평(北平)에서 군사를 몰아 천진에서 강을 건너 남하했다.
 

[사진 = 영락제 초상화]

그가 바로 명나라의 성조(成祖), 즉 영락제(永樂帝)로 후에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북경으로 천도한 뒤 과거 이곳을 지났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에 천진(天津)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천자가 나루를 건넌 곳'이라는 의미의 천진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도시의 이름이 됐다.

▶ 쿠빌라이가 정비한 남북대운하

[사진 = 천진의 대운하]

천진의 나루터에서 천자가 배를 타는 일은 그 후에도 종종 있어서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는 천진에서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기도 했다. 천자가 배를 탔다는 나루터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운하는 그 모습이 다소 변한 채 옛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진 = 건륭제 초상화]

운하 위를 지나는 근검교(勤儉橋)위에 서서 운하를 가까이 내려다보니 물의 양도 얼마 되지 않았고 오염도 심했다. 도심을 지나는 운하가 지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됐다. 경항대운하를 말할 때 그 출발점은 북경이고 종착점은 항주다.
 

[사진 = 천진의 대운하]

그러나 북경에서 천진까지의 수로인 통혜하와 백하를 통한 운하의 기능은 쿠빌라이 때 들어서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전에는 남북대운하의 기점을 천진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쿠빌라이가 대대적인 공사를 펼쳐 운하를 정비하고 확장하면서 비로소 운하는 수운 교통의 동맥 역할을 하게 된다. 모습을 갖춘 운하가 북경에 이르는 수로와 이어지면서 1,794Km에 이르는 경항대운하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 동서교류 활발, 남북 간 이질감

[사진 = 황하]

중국의 강은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니 큰 강의 흐름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두 강인 황하와 장강(양자강) 모두 그렇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수단으로서도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강을 따라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 사람도 흐르고 물자도 흐르고 문화도 흐른다.

자연히 과거 중국의 문화는 주로 강을 따라 동서로 흘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니 남북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거리감이 생겼고 거리감이 생기다 보니 이질감까지 생겼다. 같은 중국 땅이라도 북쪽의 황하를 따라 형성된 문화와 남쪽의 장강을 따라 형성된 문화가 각기 서로 다른 특징과 차이를 나타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역 정서 또는 기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과 북의 이질감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부담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남과 북을 잇는 교통수단으로서 말(馬)이라는 매개체가 있었지만 그 것만으로는 넓은 지역의 통합을 이루고 물류시스템을 갖추는 데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남과 북을 물길을 통해 인위적으로 잇는 시도는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 장강 회수 연결이 최초의 운하

[사진 = 장강 삼협]

그러나 중국의 남북 운하 건설작업은 처음부터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대규모로 단행된 것은 아니고 국지적인 필요에 의해 시작됐다. 춘추전국 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 오(吳)나라의 왕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장강과 회수를 수로로 연결한 것이 최초의 운하 건설로 추정된다.

이후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 등이 군사목적 또는 조세 징수 목적으로 국지적으로 운하를 건설했으나 현재의 남북대운하의 기본 틀이 만들어진 것은 수(隋)나라 양제(煬帝)때였다.

▶ 수양제의 남북대운하 건설
수양제는 즉위 후 곧바로 조서를 내려 전국적으로 수륙교통이 편리했던 낙양(洛陽)을 정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의 성을 쌓았다. 동시에 대운하 건설작업에 착수해서 6년에 걸친 역사적 토목공사를 펼쳤다. 대운하는 영제거(永濟渠), 통제거(通齊渠), 한구(邗勾)와 강남하(江南河)의 네 단계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영제거는 낙양에서 탁군에 이르는 전체 길이 2천여 리의 수로다. 통제거는 낙양에서 산양까지의 4천여 리가 넘는 수로로 강소와 절강의 광대한 지역을 경유하면서 남북 교통의 대동맥을 이뤘다. 강남하의 공사까지 마무리되면서 남북대운하는 황하와 해하, 회하, 장강, 전당강 등 5개강이 하나로 연결됐고 그 결과 수나라는 전당강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됐다.

대운하의 건설은 중앙정권이 지방에 대해 통제력을 확립하고 남북 경제교류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적 토목작업을 펼쳤던 수나라는 그러나 무리한 운하 건설 작업에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대운하에 담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수나라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그대로 다음 왕조에게 물려져 당나라는 운하 덕분에 강남지역의 풍부한 물자에 의지하며 번영을 누렸다.

▶ 경항대운하로 확대 정비

[사진 = 경항 대운하]

남북대운하의 동맥인 통제거는 당나라 경제를 지탱시켜 주는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다. 송나라가 개봉을 도읍지로 삼은 것도 남북 대동맥의 중심지에서 수운을 이용해 강남개발에 따른 혜택을 최대한 누리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쿠빌라이의 대도 건설은 바로 기존의 남북대운하의 기능을 극대화해 활용하겠다는 구상 아래서 출발했다.
 

[사진 = 대운하 뱃길(그래픽)]

통혜하의 건설을 통한 남북대운하와 북경의 연결 작업은 그래서 시작됐다. 동시에 남북대운하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와 증설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남북대운하를 경항대운하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제 대도는 남북대운하를 통해 항주와 상해 등과 연결되고 그곳에서부터는 바다를 통해 천주와 광주 등 강남의 해안도시와 이어지게 됐다.

▶ 역사 전면에 등장한 상해(上海)

[사진 = 상해]

지금 인구 2천 만 명이상이 살고 있는 중국 최대의 도시 상해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화정현(華亭懸)이라 불리던 송강부(松江府)의 조그마한 어촌은 쿠빌라이 치세인 1292년에 들어서 화정현에서 분리되면서 상해현(上海懸)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상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사진 = 항주]

그러니까 북경과 천진, 상해, 항주 등 지금 중국의 거대도시가 한꺼번에 역사에 등장하는 것도 바로 쿠빌라이에 의해서였다. 직고에서 연결되는 바다로의 뱃길은 항주와 천주, 광주, 복주 등 중국 대륙의 해안도시에 머물지 않고 동으로 고려와 일본, 남으로는 동지나해를 거쳐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거쳐 중동의 이슬람 지역까지 이어졌다. 초원으로 말달리며 내륙으로 내달았던 유목민들이 바다로 가게 된 동기는 군사력이 아니라 통상과 교역에 의해 바다를 정복하겠다는 쿠빌라이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바다와 연결된 유목민

[사진 = 항주 서호 유람선]

유목민과 바다! 이 엇갈린 이미지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몽골제국은 비로소 세계제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칸발릭(Khanbalic)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국제도시로 우뚝 서게 된다. 유목민들이 말에서 내려 물과 배를 통해 나아가려 했던 바다로의 길! 몽골이 구축한 세계와 연결하는 환상의 네트워크는 육지를 주름잡은 역참제(驛站制)와 바다를 장악한 수로(水路)였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던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의 연결 고리로 묶어 본격적인 접촉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중국이 아니라 몽골인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황금의 쟁반을 머리에 이고 지나도 안전했다는 몽골 지배의 시대의 동서 교역은 쿠빌라이의 바다 장악에 의해 더욱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말 대신 배를 택했던 쿠빌라이의 선택은 그러나 아직은 출발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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