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 한 마리가 부산을 들썩이게 했다. 3m 길이의 흑상어. 영화에서는 인간을 위협하는 포식자로 그려지지만, 북항에서는 달랐다. 사람들은 녀석에게 '부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안부를 궁금해하고, 바다로 돌아가기를 응원했다.
부캉이는 지난달 18일 부산 북항친수공원 인공 수로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후 한 달 넘게 머물며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10월 21일 당국의 3차 유도 작업 끝에 수로 밖으로 이동했으나, 22일 오전 제1~2보도교 사이 수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부캉이가 발견된 이후 21일까지 북항친수공원을 찾은 방문객은 약 167만 8800명에 달했다. 모두가 부캉이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만, 상어 한 마리가 지역의 명물로 떠오른 건 분명하다.
상어는 경계하거나 피해야 할 동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 부캉이 앞에서는 걱정과 애정이 먼저 나온다. 수로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은 부캉이에게 건강하게 바다로 돌아가라고 인사를 건넨다. 사람들은 왜 두려워하던 존재에게 마음을 빼앗겼을까.
▲ 이름이 붙는 순간, 상어는 달라졌다
'상어'와 '부캉이'는 같은 동물을 가리키지만,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정보는 다르다.
식별 가능한 대상 효과(identifiable victim effect)는 사람들이 익명의 다수보다 이름과 얼굴, 사연이 있는 대상에게 더 강한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현상이다. 동물에게도 이름이 붙고, 사진이 공개되고, 구체적인 사연이 생기면 반응은 달라진다.
바다에는 수많은 상어가 살아간다. 그중 일부는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대다수 상어의 삶과 죽음은 사람들의 일상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부캉이는 달랐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오늘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볼 수 있었으며, 내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할 수 있었다. 멀고 막연했던 생명에 이름과 사연이 생기자 관심의 무게도 달라진 것이다.
▲ 우리는 왜 상어에게 사람의 마음을 입힐까
부캉이를 둘러싼 보도에는 종종 사람의 감정이 묻어났다. 수로 출구 부근을 배회하는 모습은 마치 바다로 나가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묘사됐다.
부캉이가 실제로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기 싫었던 것인지, 새로운 공간을 경계한 것인지, 다른 이유로 특정 구역을 오간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행동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입힌다.
의인화(anthropomorphism)는 인간이 아닌 대상에 인간의 감정, 의도, 욕구를 부여하는 심리적 경향이다. 낯선 존재를 이해할 때 가장 익숙한 기준인 인간의 경험을 활용하는 것이다.
강아지가 현관 앞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생각하고, 고장 난 컴퓨터에는 "나한테 왜 이러냐"고 말하고, 오래 탄 자동차가 폐차될 때 괜히 미안함을 느낀다. 사람은 세계에 마음을 입히는 동물이다.
부캉이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수로에 오래 머무는 상어는 생태학적 관찰 대상이다. 하지만 부캉이는 어딘가에 갇혀 있는 존재이자, 사람들이 돌아갈 곳을 걱정하는 대상이 됐다. 그렇게 상어는 포식자를 넘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가 됐다.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의인화는 공감을 키우는 가장 빠른 통로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도 관심과 도덕적 배려를 기울이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인간의 감정을 지나치게 투영하면 동물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혼동할 수 있다. 상어의 야생성과 현실적인 위험은 지워지고, 인간이 상상한 이야기만 남을 수도 있다.
▲ 우린 부캉이가 떠난 뒤에도 상어를 사랑할까
사람들은 앞으로도 상어를 사랑할까. 부캉이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었고, 근황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응원 속 수로를 떠나는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바닷속의 다른 상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인간의 공감은 편향적이다. 가까운 대상, 구체적인 대상, 이름 붙은 대상, 얼굴이 보이는 대상에게 먼저 간다. 멀고 추상적인 고통은 밀려난다. 그래서 한 마리의 부캉이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지만, 수많은 동물은 일상의 풍경으로 남는다.
사람은 모든 고통을 같은 강도로 느낄 수 없다. 그랬다면 우리는 하루도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모든 재난, 질병, 전쟁, 동물 학대, 빈곤을 같은 강도로 느낀다면 정신은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좁힌다. 하나를 붙잡고, 그 하나를 통해 세계 전체를 조금 느낀다.
부캉이는 그런 통로가 됐다. 한 마리의 생존을 걱정하면서 바다의 생태계와 멸종 위기 동물의 처지를 돌아볼 수도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냥 귀여워했고, 누군가는 그냥 걱정했고, 누군가는 그냥 기사 제목이 보여 눌렀다. 그래도 사회적 감정은 그런 얕은 반응들의 집합 속에서 깊은 질문을 만들곤 한다.
반대로 부캉이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관심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인간의 공감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다. 한 존재에게 깊이 마음을 주는 능력과 그 밖의 수많은 존재에게 무심해지는 경향.
▲ 부캉이를 향한 마음의 정체
부캉이를 향한 반응은 인간의 선함만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들의 편향, 상상력, 구경 욕망, 책임감도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대상을 선택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어떻게 사랑을 주고, 어떻게 책임을 묻고, 어떻게 소비하는지.
우리는 무언가를 걱정하면서도 그걸 즐길 수 있다. 재난 생중계를 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화면을 끄지 못하는 마음, 유명인의 불행에 아파하면서도 관련 기사를 계속 클릭하는 마음, 동물 구조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음 영상을 넘겨보는 마음…그 안에는 자신의 연민에 만족하는 심리도, 남의 불행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하는 본능도 숨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부캉이를 걱정했고, 부캉이를 이야기로 소비했다. 부캉이가 무사하길 바랐고,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물의 안위에 마음을 졸였고, 다른 수많은 동물의 고통에는 무심했다. 이런 모순을 인정하지 않으면, 부캉이의 사건도 귀여운 미담이나 과장된 호들갑 중 하나로 납작해질 테다.
우리는 부캉이를 사랑했을까, 부캉이를 걱정하는 시간을 사랑했을까. 그 둘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마음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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