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별을 보면서 발밑을 잊은 나라

밤하늘
밤하늘


이솝 우화에 밤마다 별을 살피러 나가는 천문학자가 나온다. 어느 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깊은 우물에 빠졌다. 살려 달라는 외침을 듣고 달려온 이웃은 사정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하늘에 있는 것은 알아내려 하면서 땅 위에 있는 것은 왜 살피지 못하는가?’

최근 금융권 해킹 사고가 이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AI가 상담하고 대출을 심사하며 자산 관리까지 돕는 금융의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이에 은행과 저축은행, 캐피털사에서 고객정보가 새어나갔다. 공격에 AI가 활용된 정황도 드러났다.

더 뼈아픈 것은 첨단 AI를 앞세우던 은행들이 정작 직원용 시스템의 기본적인 인증을 허술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고객정보에 접근하는 사람의 신원과 조회 권한을 확인하는 절차가 충분하지 않았다. 해커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정보를 조회하고 빼갔다. 공격에 AI가 쓰였다는 사실이 은행의 허술한 문단속을 가려서는 안 된다.

같은 공격을 받고도 정보 유출을 막아낸 금융회사들이 있었다. 다중 인증과 접근 통제 등 기본적인 방어 장치가 작동한 덕분이다. 다중 인증은 아이디와 비밀번호 외에 추가 인증을 요구해 접속자 신원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미 쓰이던 보안 장치를 제대로 갖췄느냐가 피해를 갈랐다. 금융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은행들이 오늘의 고객정보를 지키는 기본부터 놓친 셈이다.


큰 미래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모습은 정치권에서도 볼 수 있다. 서울 일극 체제를 바꾸겠다는 약속이 그렇다. 지방에 사람과 기회를 돌려주겠다면 그 말을 하는 권력부터 자신의 자리를 옮길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국회 세종의사당은 추진되고 있다. 11개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옮겨가면 입법과 예산 심의의 상당 부분도 세종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법안과 예산을 최종 의결하는 본회의장과 국회의장실은 서울에 남는다. 국회 업무가 두 도시로 나뉘는 구조다. 지난달 국회의장이 세종에서 완전 이전을 위한 입법을 약속했지만 세종의사당은 여전히 본회의장이 빠진 채 설계를 앞두고 있다. 완전 이전을 약속하면서도 그에 맞춰 의사당을 지을 여건은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완전 이전은 새로운 약속도 아니다. 2024년 총선 당시 여당도 국회를 모두 세종으로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여야가 완전 이전을 말해왔지만 실제 계획은 아직 분원에 머물러 있다. 약속은 거듭됐고, 약속을 이행할 과제는 남아 있다.

국회 이전에는 법적 쟁점과 비용, 정치적 합의가 따른다. 그런 난제를 풀어 실행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 정치의 책임이다. 권력과 기회가 서울에 모이는 구조를 바꾸겠다면 권력 자신도 움직여야 한다. 지방의 가능성을 믿으라는 말은 자신이 먼저 그 가능성을 선택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고객정보 보호와 국회 이전은 성격도 난도도 다르다. 그러나 자신이 내건 미래에 필요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은 같다. 은행은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는 만큼 기존 시스템의 보안도 챙겨야 한다. 정치는 완전 이전을 선언한 만큼 이를 가로막는 쟁점을 풀고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그 일을 남겨둔 채 더 큰 비전을 보태봐야 약속과 현실의 간격만 벌어진다.

우화 속 천문학자는 발밑을 놓쳐 자신이 우물에 빠졌다. 금융과 정치가 놓친 책임의 대가는 고객과 국민에게 돌아간다. 미래를 말하는 이들의 책임이 더 무거운 이유다. 하늘의 별을 읽는 동안에도 발은 땅 위를 걷는다. 미래를 아무리 멀리 내다봐도 발밑의 책임을 건너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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