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저술가가 전한 질마재의 풍경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미당의 생가는 보존돼 있지만 적막하고, 폐교를 고쳐 만든 미당시문학관에는 육필 원고와 초판본, 유품과 함께 한국 문단을 대표했던 수많은 문인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남아 있다고 한다. 김동리와 유종호, 김현과 김우창, 이어령과 조지훈, 김춘수와 황동규 등 당대 문단의 거목들이 미당의 언어적 천재성을 인정했고, 김환기·천경자·김기창·박노수 같은 화가들이 그의 시와 인연을 맺었다. 한때 문단에서 ‘미당 군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그 평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주만큼 한국어의 음률과 관능, 토속성과 신화성, 생명과 죽음,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든 시인은 흔하지 않다.
1915년 고창에서 태어난 그는 『화사집』에서 원초적 생명과 관능의 세계를 열었고 『귀촉도』에서는 한국인의 한을 정제했으며, 『신라초』와 『동천』에서는 신라와 불교, 윤회와 영원의 세계로 시야를 넓혔다. 『질마재 신화』에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름 없는 사람들과 민간설화, 할머니의 이야기와 토속적인 언어를 현대시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피카소가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를 거쳐 입체파를 열고 다시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영역을 넘나들었듯 미당 역시 하나의 문학적 형식에 안주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다루는 기술과 리듬, 어휘와 이미지의 창조성만 놓고 보면 그는 한국 현대시가 배출한 보기 드문 언어의 장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더 어려운 질문이 시작된다. 위대한 문학적 재능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문학을 완성하는가.
장하석 저술가의 방문기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미당의 열다섯 살 시절이었다. 1930년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이던 서정주는 광주학생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뒤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식민지의 열다섯 살 소년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거리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십여 년 뒤 그의 자리는 크게 달라졌다. 일제 말기 그는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고 조선 청년의 전쟁 동원을 고무하는 작품들을 발표했고, 해방 뒤에도 권력과 가까운 행적을 보였다. 1987년에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송시를 썼다.
문제는 단순히 한 문인의 정치적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열다섯 살에 식민 권력에 저항했던 소년이 왜 중년에는 제국의 전쟁을 노래했고, 노년에는 군사권력의 최고 권력자를 찬양하게 되었는가라는 인간적·철학적 질문이 남는다.
나는 미당에게 부족했던 것이 문학적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능이 너무 컸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통제하고 방향을 정해 줄 더 높은 정신적 기준, 다시 말해 역사 앞에서의 윤리적 자의식과 인간에 대한 책임의식이 아니었을까.
미당은 불교와 신라, 윤회와 영원을 노래했다. 그의 시적 상상력은 천 년을 넘나들었고 때로는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먼 시간과 높은 하늘을 바라보던 시인이 바로 자신의 시대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했다. 여기에 미당 문학의 위대함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하늘까지 올라간 시가 발밑의 인간을 놓친 것이다.
나는 1983년 봄 방배동 자택에서 미당을 직접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열아홉 살 장티푸스로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조선 백자의 흰빛을 보며 삶과 죽음의 ‘벽’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 곧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를 깨달았다고 회고했고, 당시 내 눈에 비친 미당은 그저 천진한 노인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전두환 권력과 거리를 두라고 한마디 쓴소리를 하지 못했던 것이 오래도록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대목에서 피카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가 폭격을 당했다. 피카소는 그 참상을 가로 7m가 넘는 거대한 화폭에 옮겼다.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상처 입은 말, 쓰러진 병사와 부러진 칼이 뒤엉킨 「게르니카」는 미술작품을 넘어 20세기 전쟁과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피카소 역시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사생활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그의 정치적 선택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적어도 「게르니카」에서 그는 자기 시대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예술가가 어느 자리에 설 것인가를 분명히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 민주적 자유가 회복될 때까지 「게르니카」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했고, 작품은 결국 민주화 이후인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예술가가 죽은 뒤에도 그림이 독재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이다.
미당과 피카소를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피카소에게도 그림자가 있었고 미당에게도 광주학생운동에 나섰던 소년의 정의감과 한국어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거대한 문학적 성취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애를 함께 놓으면 예술에 관한 중요한 명제가 하나 드러난다.
예술의 기술적 완성과 예술가의 정신적 완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미당은 전자에서는 거인이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끝내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남겼다.
그가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한국 문단에서 나왔지만, 노벨위원회의 후보 추천 자료는 50년간 비공개되기 때문에 미당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무엇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는지를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친일이나 권력 찬양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러나 그의 문학을 세계문학의 차원에서 평가할 때 이 문제가 끝내 따라붙는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위대한 문학은 언어의 기교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봤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의 기억과 인간의 고통을 문학으로 끌어안았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의 문학에서 주목한 것 역시 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힘이었다.
노벨문학상의 잣대가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은 선전문이 아니며 위대한 작품은 도덕 교과서도 아니다. 그러나 시대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인간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미당의 뒤를 이어 오랫동안 한국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고은의 경우 역시 다른 형태의 질문을 남겼다. 2018년 최영미 시인의 폭로로 성추행 문제가 공론화됐고, 이후 고은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은 최영미 시인이 밝힌 성추행 내용을 사실로 판단했으며 항소심에서도 고은 측은 패소했다. 미당과 고은의 문제는 성격도 시대도 다르므로 하나로 묶어 단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두 사례가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있다.
문학적 성취와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분리할 수 있는가.
과거에는 많은 것이 가려질 수 있었다. 권력자의 잘못도, 예술가의 사생활도, 지식인의 위선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거나 소수의 기억 속에 묻힐 수 있었다. 그러나 AI 시대는 다르다. 인류가 생산한 기록이 디지털 데이터로 축적되고 검색되고 연결된다. 수십 년 전의 글과 사진, 영상과 증언, 판결과 기록이 순식간에 한 화면 위에 함께 올라오는 시대다. AI는 인간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는 동시에 무서운 거울을 들이댄다. 숨길 수 없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역설적으로 AI 시대일수록 인간이 다시 영성(靈性)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특정 종교의 교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더 큰 질서가 존재한다는 자각, 자기 욕망과 재능을 절대화하지 않는 겸손, 다른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본다.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제도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선언이다. 불교는 자비를 말한다. 모든 존재가 고통을 싫어하고 생명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서 다른 생명을 자신처럼 대하라고 가르친다. 『도덕경』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한다.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주역』은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곧 낳고 또 낳는 것이 역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근본 운동을 파괴가 아니라 생성과 생명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주역』 건괘의 첫머리에 나오는 네 글자가 있다. 원형이정(元亨利貞).
전통 역학에서 원형이정은 천도(天道)의 네 가지 덕으로 읽혀왔다. 원(元)은 시작과 근원, 형(亨)은 형통과 성장, 이(利)는 이로움과 조화, 정(貞)은 바르고 굳게 완성되는 질서를 뜻한다. 해석에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동아시아 사상사는 이 네 글자를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고 이롭게 하며 완성해가는 큰 질서로 이해해왔다.
나는 이것을 21세기 AI 문명에 맞춰 조금 다르게 읽어보고 싶다. 원(元)은 종교이고, 형(亨)은 문화예술이며, 이(利)는 철학이고, 정(貞)은 과학이다. 이것은 『주역』 원문의 전통적 주석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의 문명을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현대적 해석이다.
원은 근원을 묻는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을 넘어서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다. 그것이 종교의 영역이다. 형은 그 생명을 펼친다. 인간이 느끼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꿈꾸는 것을 음악과 미술, 문학과 춤과 건축으로 표현한다. 그것이 문화예술이다. 이는 옳고 그름과 이로움의 기준을 묻는다.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정의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성찰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정은 그것을 현실의 질서로 검증하고 완성한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기술을 만들어 인간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킨다. 그것이 과학이다.
종교 없는 문화예술은 방향을 잃기 쉽고, 문화예술 없는 철학은 메마르며, 철학 없는 과학은 위험해질 수 있다. 과학 없는 종교와 철학 역시 현실에서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힘을 잃을 수 있다. 네 가지는 서로 적이 아니다. 하나다. 원형이정이다.
미당의 비극을 이 틀에서 다시 보면 흥미롭다. 그에게 ‘형’, 곧 문화예술은 넘쳤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미적 감각, 한국인의 정서와 신화를 시로 바꾸는 힘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러나 그 찬란한 ‘형’을 붙잡아 줄 ‘원’과 ‘이’, 곧 인간보다 큰 가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영성과 역사와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적 윤리가 충분했는지는 다시 물어야 한다. 기술은 있었으나 그것을 지휘할 나침반이 약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때로 하늘까지 올라갔지만 시대의 가장 낮은 곳에서 피 흘리는 사람에게 내려오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질마재로 돌아간다.
장하석 저술가의 방문기에는 미당시문학관의 흥미로운 풍경이 나온다. 아래층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남긴 찬사가 있고, 위로 올라가면 미당의 친일과 권력 찬양 관련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고 한다. 그 구조 자체가 오늘 우리가 미당을 읽는 방법인지 모른다. 찬사만 읽어서도 안 된다. 친일 작품만 읽어서도 안 된다. 「국화 옆에서」와 「동천」을 읽고 『질마재 신화』를 읽되 「오장 마쓰이 송가」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서정주가 보인다. 그리고 그래야 우리 자신도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과 비겁함, 용기와 나약함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당을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깊이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 「국화 옆에서」의 한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르치는 동시에,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한 사람이 왜 역사 앞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다. 찬양만 하면 우상화가 되고 과오만 가르치면 역사의 삭제가 된다. 위대한 인간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주고 다음 세대에게 판단하게 하는 것이 역사교육이고 인문교육이다.
윤동주가 왜 오늘까지 사랑받는지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언어가 미당보다 화려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식민지의 밤하늘 아래에서 시가 너무 쉽게 쓰이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다. 김수영 역시 완벽한 인간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비겁함까지 돌아보았다.
부끄러움을 아는 능력. 어쩌면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영성 가운데 하나인지 모른다. 성경의 회개도, 불교의 참회도, 유교의 반성도 결국 자신을 돌아보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은 완전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설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미당에게 가장 아쉬운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만일 그가 말년에 자신의 친일과 권력 찬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단 한 편의 시를 남겼다면 어땠을까. 열다섯 살에 광주학생운동의 거리로 나섰던 소년 서정주가 노년의 서정주에게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묻는 시를 썼다면 어땠을까. 그만한 언어의 천재라면 자신의 부끄러움마저 한국 현대문학의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침묵이 더욱 아쉽다.
이제 우리는 AI라는 전혀 새로운 문명의 문턱에 서 있다. AI는 인간보다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인간보다 빠르게 계산하며, 머지않아 상당수 영역에서 인간보다 정교한 판단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봇과 피지컬 AI가 인간의 육체적 능력까지 확장하면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힘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AI가 대신 결정해 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사람을 살릴 것인가, 지배할 것인가.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인간을 통제할 것인가. 전쟁에 사용할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GPU도 알고리즘도 아니다. 인간이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철학이 더 필요하고, 철학이 깊어질수록 문화예술이 필요하며,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인간을 넘어서는 가치와 생명을 존중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다시 원형이정이다. 원은 근원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형은 인간답게 꽃피우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이 인간에게 이로운가를 끊임없이 물으라는 것이다. 정은 그 모든 것을 바르고 굳게 완성하라는 것이다.
종교와 문화예술과 철학과 과학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AI 시대의 새로운 인문주의라고 생각한다. 성경과 불경, 도덕경과 주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오래된 천지인 사상이 결국 서로 다른 언어로 가리키는 곳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 사람, 인간과 자연과 우주는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서 연결돼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을 향해야 한다. 정의는 인간을 지켜야 한다. 자유는 인간을 살려야 한다. 문화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높여야 하고 과학은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한다. 종교는 그 모든 힘이 인간의 오만으로 변하지 않도록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미당 서정주는 한국어의 거인이었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지울 수도 없고 지워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질마재의 바람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에만 있지 않다. 아름다움만으로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천재성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지식도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 위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한강의 문학이 세계의 독자에게 역사적 상처와 인간의 연약함을 환기한 것도 결국 예술이 인간의 고통과 만나는 지점에서 더 큰 보편성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미당의 삶은 그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귀중한 질문을 남긴다.
아무리 위대한 재능도 역사와 인간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완성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이제 미당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니다. AI 시대를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는 질문이다. 모든 기록이 남고, 모든 정보가 연결되며, 인간의 말과 행동이 과거처럼 쉽게 망각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래서 미래는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된 곳으로 우리를 돌려보낸다. 영성이다. 원형이정이다. 종교와 문화예술과 철학과 과학이 서로 떨어져 경쟁하는 문명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을 중심으로 다시 하나가 되는 문명이다. 기술은 앞으로 가되 정신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학은 우주로 나아가되 인간은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것은 지능보다 높은 것, 곧 양심과 사랑과 부끄러움을 아는 영성이다. 그것이 없다면 천재의 언어도 권력의 장식품이 될 수 있고, 세계 최고의 AI도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있다면 문학도 예술도 철학도 과학도 인간을 살리는 힘이 된다.
원(元)에서 시작해 형(亨)으로 꽃피고, 이(利)로 인간과 세상을 이롭게 하며, 정(貞)으로 바르게 완성되는 것. 그것이 우주의 질서이고 인간 문명의 길이어야 한다. 장하석 저술가의 질마재 방문기를 읽다가 미당을 생각했고, 미당을 생각하다 피카소와 고은과 한강을 생각했으며, 그들을 생각하다 마침내 AI 시대의 인간을 생각하게 됐다.
결국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수천 년의 종교와 철학이 내놓은 답 역시 하나로 모인다. 사람이다. 우주와 역사는 결국 인간의 삶의 가치를 묻는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그 높은 곳에서 다시 얼마나 낮은 곳의 인간에게로 내려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이 진리이고 정의이며 자유다. 그리고 AI 시대에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영성의 길, 원형이정(元亨利貞)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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