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에서 인간으로, 통제에서 자유로
축구에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 자신이 만든 전술판에 선수를 끼워 넣는 감독이 있고, 선수의 재능을 먼저 읽은 뒤 그 재능이 가장 빛날 수 있도록 전술판을 다시 그리는 감독이 있다. 전자가 전술에서 출발한다면 후자는 인간에서 출발한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모레노 감독이 이강인을 놓고 던진 말이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그는 우루과이전을 앞두고 이강인의 활용법을 설명하면서 소속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이며 즐겁게 뛰는 자리가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 배치한다면 그것은 무모한 선택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짧은 말이지만 그 안에는 축구의 본질에 관한 긴 이야기가 들어 있다. 감독의 철학이 선수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감독의 철학이 선수의 재능을 해방시키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이강인 한 사람의 포지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축구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이고, 더 크게 보면 조직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술’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다. 포메이션을 그리고 선을 긋고 선수의 위치를 정하고 약속된 움직임을 반복하면 그것이 전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대 축구에서 조직과 규율은 필수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열한 명이 각자 하고 싶은 축구만 해서는 강한 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전술에는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선수를 잘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술을 지키느라 선수가 못하게 된다면 그 전술은 누구를 위한 전술인가. 모레노 감독의 말은 바로 이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가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기본이고 원칙이며 상식이다.
선수가 먼저다, 전술은 그다음이다
이강인은 이미 유럽 최고 수준의 무대에서 자신의 장점을 증명하고 있는 선수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아래 뛰면서 그의 축구는 다시 변화하고 있다. 공을 받아 운반하고 측면에서 일대일을 시도하는 기술 좋은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기존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전방과 하프 스페이스를 오가며 동료와 연결하고 상대 수비 사이의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공격수적 움직임까지 넓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표팀 감독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전술에서 이강인을 어디에 넣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강인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선수가 먼저고 전술은 그다음이다.
물론 감독에게 전술적 원칙은 있어야 한다. 선수의 요구에 따라 매번 포메이션을 바꾸라는 뜻이 아니며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다. 그러나 좋은 감독은 원칙과 자유를 대립시키지 않고 원칙 안에서 자유를 만든다.
이것이 명장의 조건이다.
재즈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아무 규칙 없이 악기를 연주한다고 재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박자와 화성, 다른 연주자에 대한 이해라는 엄격한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 안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감각으로 즉흥연주를 한다.
축구도 그렇다. 전술은 악보이고 선수는 연주자이며 감독은 지휘자다. 훌륭한 지휘자는 모든 연주자에게 똑같은 소리를 내라고 하지 않는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답게, 첼로는 첼로답게, 트럼펫은 트럼펫답게 울리도록 하면서 하나의 음악을 만든다.
축구도 그래야 한다. 손흥민에게는 손흥민의 축구가 있고 이강인에게는 이강인의 축구가 있다. 황희찬에게는 황희찬의 장점이 있고 김민재에게는 김민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수비가 있다. 국가대표 감독의 임무는 그 색깔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포지션은 주소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모레노 감독의 접근이 흥미롭다. 4-4-2라는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이강인이 반드시 투톱으로 뛰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실제 경기에서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이다.
포지션이 선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의 능력이 포지션을 재해석한다.
현대 축구에서 포지션은 주소가 아니라 출발점에 가깝다. 공격수라고 페널티지역 안에만 있지 않고 미드필더라고 중원에만 서 있지 않는다. 측면 공격수가 중앙으로 들어오고 중앙 공격수가 내려와 패스를 연결하며 풀백이 미드필더가 되고 센터백이 공격의 첫 번째 플레이메이커가 된다.
결국 현대 축구의 핵심은 공간이며 그 공간을 읽는 것은 인간이다.
이강인의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공을 잘 다루는 선수이기 이전에 상대와 동료의 위치를 보면서 다음 공간을 찾는 선수다. 좁은 곳에서 공을 받을 수 있고 압박을 끌어당긴 뒤 동료에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런 선수를 터치라인 옆 특정 구역에 고정해놓고 “여기에서만 움직이라”고 한다면 그의 능력 가운데 상당 부분을 스스로 봉인할 수 있다. 새를 키우겠다고 새장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새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새장만이 아니라 날 수 있는 공간이다.
축구선수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가 따라야 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롭게 움직인 선수가 떠난 공간은 누군가 메워야 하고 공격에서 자유를 누렸다면 공을 빼앗긴 순간에는 팀을 위해 뛰어야 한다. 그래서 현대 축구에서 최고의 자유는 ‘아무 데나 가도 되는 자유’가 아니라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다.
이것이 축구지능이다.
모레노의 축구가 정말 성공할 것인지 판단하려면 이강인을 투톱에 세웠다는 사실만 봐서는 안 된다. 이강인에게 자유를 주면서 팀 전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가, 손흥민의 공간과 이강인의 공간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확대하는가, 한 사람이 움직이면 다른 사람이 그 빈자리를 이해하는가, 공을 가졌을 때의 자유가 공을 잃었을 때의 책임으로 전환되는가를 봐야 한다.
그것이 진짜 시험이다.
손흥민과 이강인, 공간의 알고리즘
손흥민과 이강인의 조합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선수는 같은 유형이 아니다. 손흥민에게 가장 무서운 순간은 공간이 열릴 때다. 상대 수비 뒷공간으로 뛰어들 수 있는 순간 그의 속도와 결정력은 세계 정상급 무기가 된다.
반대로 이강인은 공간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한 사람은 공간을 찢고 들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공간을 연다. 이 둘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단순한 ‘스타 두 명의 조합’을 넘어설 수 있다.
이강인이 내려와 공을 받으면 상대 수비가 따라 나온다. 그 순간 뒤에 공간이 생기고 손흥민은 그 공간으로 들어간다. 상대가 손흥민의 침투를 의식해 내려서면 다시 이강인에게 공을 다룰 공간이 생긴다.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만든다. 이것이 축구다.
공은 하나지만 공간은 계속 태어난다. 좋은 선수는 공을 보고 뛰지만 위대한 선수는 다음에 생길 공간을 보고 움직이며, 좋은 감독은 현재 선수의 위치를 보지만 위대한 감독은 그 선수들이 다음 순간 만들어낼 관계를 본다.
그래서 축구의 전술을 단순히 4-4-2, 4-3-3, 3-4-3이라는 숫자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축구의 진짜 알고리즘은 숫자가 아니다. 관계다.
A가 움직이면 B가 움직이고, B가 움직이면 상대 C가 반응하며, C가 움직인 자리에 D가 들어간다. 축구장은 끊임없이 변하는 함수이고 22명의 인간이 매초 새로운 변수를 만든다.
그래서 완벽하게 미리 작성된 전술은 존재할 수 없다. 감독은 원칙을 설계할 수 있지만 순간의 답은 결국 선수가 찾아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선수에게 자유가 필요하다.
자유는 전술의 반대말이 아니라 좋은 전술의 완성이다.
한국 축구가 오래 풀지 못했던 질문
이 지점에서 한국 축구의 과거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역대 대표팀 감독들의 공과는 각각 역사적 조건과 실제 경기 결과를 놓고 따로 평가해야 하며 한 시대의 실패를 한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축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가 오랫동안 안고 있던 구조적 고민은 분명했다.
조직인가 개인인가, 규율인가 창의성인가, 감독의 축구인가 선수의 축구인가.
우리는 때때로 조직력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선수의 개성을 희생했고 ‘팀을 위한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 뛰어난 선수에게 가장 잘하지 못하는 일을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희생은 필요하다. 그러나 희생에도 방향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오케스트라를 위해 북을 치라고 하는 것이 희생인가. 그것은 자원의 낭비일 수도 있다. 선수가 팀을 위해 자신의 장점을 포기하는 것보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팀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더 큰 헌신일 수 있다.
그래서 모레노의 한마디가 중요하다. 선수가 소속팀에서 가장 잘하고 즐겁게 뛰는 자리가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자리에 놓겠느냐는 발상이다.
이것은 단순한 실용주의를 넘어선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글을 잘 쓰고 어떤 사람은 숫자를 잘 다루며 어떤 사람은 사람을 설득하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것을 만든다.
좋은 조직은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 고치는 데 모든 힘을 쓰지 않는다. 강점을 발견해 그것을 조직의 힘으로 만든다.
축구대표팀도 하나의 조직이다. 감독은 조직의 최고책임자이고 선수는 각자의 분야에서 선발된 전문가다. 전문가를 뽑아놓고 그의 전문성을 사용하지 않는 조직은 강해질 수 없다.
그래서 모레노 축구의 혁명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포메이션의 혁명이 아닐 것이다. 인간을 보는 방식의 혁명일 것이다.
전술에서 인간으로, 통제에서 자율로, 지시에서 판단으로, 희생에서 강점으로, 그리고 획일에서 창조로 가는 변화다.
그러나 아직 혁명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말은 철학이고 경기는 증명이다. 손흥민과 이강인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두 선수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줄 것인지, 상대가 그 자유를 봉쇄했을 때 어떤 두 번째 해법을 내놓을 것인지, 공격의 자유를 수비의 균형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는 실제 경기장에서 확인해야 한다.
감독의 명성도 인터뷰도 대신 답해줄 수 없다.
축구는 결국 잔디 위에서 증명하는 스포츠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더 기대된다. 모레노의 철학이 성공한다면 한국 축구가 얻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투톱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유와 질서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자유 없는 질서는 경직되고 질서 없는 자유는 무너진다. 좋은 사회가 자유와 책임을 함께 요구하듯 좋은 축구도 자유와 규율을 함께 요구한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진리는 감독이 독점하지 않는다. 전술책에도 완성된 진리가 들어 있지 않다. 경기장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을 보고 가장 좋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진리가 있다.
그래서 감독에게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겸손이다. 내 전술이 언제나 옳다는 확신보다 내 선수에게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답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선수를 믿는 감독은 자유를 줄 수 있고 자유를 받은 선수는 판단해야 하며 판단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책임 있는 자유에서 창조성이 태어난다.
이것이 축구의 아름다움이다.
축구는 인간의 경기다. AI가 수백만 경기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선수의 이동을 계산하며 상대의 패턴을 예측하는 시대가 와도 마지막 순간 공을 받을 것인지 흘릴 것인지, 슈팅할 것인지 패스할 것인지, 앞으로 갈 것인지 뒤로 갈 것인지는 한 인간이 결정한다.
그 순간에는 데이터도 감독도 대신 발을 내밀어줄 수 없다. 선수가 선택한다. 그래서 축구에는 인간이 있고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
인간·문화·자연
문화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회보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아름답다.
자연도 그렇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모든 나무가 똑같기 때문이 아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서 있고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자라며 이름 모를 풀과 꽃까지 자신의 방식으로 햇빛을 향해 올라가기 때문이다.
좋은 숲은 나무를 똑같은 높이로 자르지 않는다.
좋은 감독도 선수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간도, 문화도, 자연도 다양성 속에서 가장 아름답다.
이강인을 이강인답게 뛰게 하라.
손흥민을 손흥민답게 뛰게 하라.
그리고 그 서로 다른 자유가 하나의 대한민국 축구가 되게 하라.
그것이 모레노가 시작하려는 축구라면 나는 그 혁명의 핵심을 4-4-2라는 숫자에서 찾지 않는다.
한 인간의 재능을 믿는 데서 찾는다.
선수를 전술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전술로 선수를 자유롭게 하는 것, 규율로 창조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서 속에서 창조성을 폭발시키는 것, 감독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선수와 함께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축구의 알고리즘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전술이 좋은 전술이고 재능을 꽃피우는 조직이 좋은 조직이며 자유를 책임으로 연결하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다.
그래서 모레노 축구의 진짜 혁명은 아직 스코어보드에 쓰여 있지 않다.
그보다 먼저 한 문장에 쓰여 있다.
선수를 전술에 가두지 마라. 그의 재능이 가장 잘 흐르는 길을 찾아주라.
강물은 흐를 때 강이고 새는 날 때 새이며 축구선수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때 비로소 선수다. 전술은 인간을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철창이 아니라 인간의 재능이 가장 멀리 날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날개여야 한다.
그것이 모레노 축구의 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축구를 넘어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바라보는 하나의 오래된 진리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하라. 다만 책임 있게.
그때 인간은 가장 인간답고, 축구는 가장 축구다워진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