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에서 “혼돈의 시대일수록 지혜와 성찰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온 것도 이 자리가 단순한 현상 진단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발언의 분야는 달랐지만 문제의식은 하나로 수렴됐다. 변화의 방향은 분명한데, 국가의 속도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작동하지 않는 제도, 느려진 정치의 시간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헌정 질서의 작동 문제를 넘어, 헌법 체제 자체가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현행 헌법이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전제로 설계된 체제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디지털 전환과 AI 시대에 접어든 지금, 국가 운영의 기본 틀 역시 이에 맞게 재설계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맞게 진화하지 못하면 견제와 균형은 형식에 그칠 수밖에 없다.
· 느린 정책, 떠나는 자본과 인재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은 경제 시스템의 경직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그는 “성장 없는 분배는 지속될 수 없으며, 시장 친화성을 잃은 정책은 결국 민간의 도전 의지를 꺾는다”고 말했다.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기업은 결정을 미루고 투자는 멈춘다. 앞날이 보이지 않으면 누구도 돈을 쓰지 않고 사람을 뽑지 않는다.
사람과 자본은 구호나 이념보다 기회가 빨리 열리는 곳을 선택한다. 도전할 수 있는 길이 빨리 열리고,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동한다. 독일 경제학자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 역시 이런 조건에서만 작동한다. 새로운 시도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실패 뒤에 곧바로 다음 도전이 가능할 때 혁신은 이어진다. 속도가 느린 국가는 결국 변화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 대학의 기업가정신, 변화의 출발점
이제 해법의 방향이 보다 분명해진다. 신성철 전 KAIST 총장은 “대학의 성과가 논문에서 멈추는 한 국가 경쟁력은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며 대학에서 시작되는 기업가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스탠퍼드대학을 대표 사례로 들었다.
스탠퍼드대학은 연구 성과를 논문으로 끝내지 않는다. 실패를 허용하고 시도를 장려하며, 기술이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대학이다. 그 결과 수만 개의 스타트업이 실리콘밸리를 만들었고, 젠슨 황의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등장했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빠르게 시도하고 빠르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환경의 문제였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신 전 총장의 메시지를 이렇게 읽는다. 대학의 기업가정신이란 창업 숫자를 늘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패를 감내하고 시간을 단축하며 도전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문화를 말한다. 대학은 그 출발점일 뿐이다.
· 국가의 기업가정신, 속도를 허용하는 제도
이종호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이 논의를 국가 차원으로 확장했다. 그는 “AI 경쟁의 본질은 기술 보유 여부가 아니라 통찰과 속도”라고 강조했다. 주권 AI와 강점 AI를 병행하자는 전략,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 실증 과정에서의 책임 문제는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국가는 변화의 위험을 개인에게만 맡길 것인가, 아니면 함께 짊어질 것인가. 필자는 이 질문을 ‘국가의 기업가정신’으로 해석한다. 대학의 기업가정신이 ‘시도의 문화’라면, 국가의 기업가정신은 속도를 허용하는 제도다. 결정을 늦추지 않고 실패를 범죄화하지 않으며 위험의 일부를 국가가 함께 부담하는 구조다. 대학만 바뀌어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가 바뀌어야 한다.
· 기술은 달리는데, 제도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서정희 아주경제 논설고문은 기술과 제도의 시간차를 짚었다. AI는 이미 산업 현장을 바꾸고 있지만 규제와 제도는 과거의 기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기술은 하루 단위로 진화하는데 제도는 몇 년 단위로 움직인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사회적 비용은 빠르게 늘어난다.
AI가 상징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속도와 변화다. 문제는 기술은 이미 달리고 있는데 정치·사회·경제·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간차가 저성장 고착, 고령화 심화, 양극화 확대,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각각의 문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타이밍을 놓친 결과가 누적되고 있는 것이다.
· 결단의 시간, 실행을 미루면 기회는 사라진다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는 포럼을 관통하는 현실적 경고를 던졌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위기는 있지만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다”고 말하면서, 위기를 인식하고도 결정을 미루는 순간 기회는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국가는 선언이 아니라 실행으로 평가받고, 정책은 계획이 아니라 결단의 타이밍으로 성패가 갈린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현 전 부총리의 발언은 이번 포럼의 모든 논의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문장이다. 기술도 제도도 전략도 결국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경고다. AI 대전환은 준비가 끝난 뒤 시작되는 과제가 아니라, 움직이면서 완성해야 할 국가적 시험이다.
세계경제사에서 후발국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위험은 단순한 격차가 아니라 단절이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면 따라잡는 데 드는 비용은 기하급수로 커지고 선택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더 늦어지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이번 총장포럼을 통해 필자가 확인한 결론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계획이나 구호가 아니다. AI 기술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국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실행력과 결단이다.
2026년은 준비의 해가 아니라 실행의 해여야 한다. 시간이 우리 편일 때 움직이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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