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뭉케의 남송원정도]
▶ 남송원정, 뭉케가 주도
[사진 = 중국 불모지]
그래서 이곳을 통한 군대의 행군과 보급이 어려웠다. 그 곳을 지나면 또 다시 장강이 가로막고 있어 이중의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좌측의 다가차르 군대는 불모지를 피해 중국의 중앙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한수를 따라 남하한 뒤 장강 중류지역을 제압하고 우랑카타이군은 운남(雲南)에서 베트남을 거쳐 남쪽에서 협공해 들어간다는 전략이었다. 그 작전이 효과를 거두면 뭉케가 이끄는 몽골 본대가 남송으로 서서히 진군해 들어간다는 도식이었다.
▶ 쿠빌라이의 재기용
[사진 = 양양과 번성]
[사진 = 황하]
[사진 = 황하]
▶ 갑작스럽게 숨진 대칸 뭉케
여기에서 고비 때마다 대몽골 제국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최고 지도자의 죽음이라는 돌연 변수가 다시 등장한다. 사천지방에서 발생한 뭉케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 것이다. 서하 정벌에 이어 남송으로 향하던 칭기스칸의 죽음이 남송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자져오기는 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죽을 만큼 연로했고 후계자도 지명해 뒀다는 점에서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이후 오고타이의 죽음은 유럽 정벌을 멈추게 만들었고 구육의 죽음은 친족 사이의 혈전을 막아줬다. 이제 뭉케의 죽음은 향후 제국의 향방을 혼미하게 만들 상황이었다.
▶ 대권 향방이 최대 관심사
[사진 = 고비 사막]
이듬해 여름, 뭉케의 주변 인물들은 사천지방의 폭염을 피하기 위해 북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권유를 물리치고 뭉케는 강경 일변도의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이 때 역병이 사천의 뭉케군을 엄습했고 뭉케는 그 역병으로 갑자기 숨졌다. 이질이라는 설도 있고 콜레라라는 주장도 있고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 그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대칸이 갑자기 죽었다. 무리한 시도가 죽음을 부른 것이다. 다시 누가 대권을 잡을 것인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 후계자 경쟁 신호탄
[사진 = 아릭부케 초상화(집사)]
그 것으로 몽골제국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남송과의 전쟁은 이제 뒷전으로 밀려난 채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하는 것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뭉케의 죽음은 곧바로 후계자 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찾아올 것을 기다린 듯이 준비해온 쿠빌라이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뭉케의 세 동생, 즉 쿠빌라이와 훌레구 그리고 아릭 부케였다. 뭉케에게 네 아들이 있었지만 어린 탓에 경쟁자로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집사)]
▶ 아릭 부케가 가장 강력한 후보
결국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두 사람 중에서는 막내 아릭 부케가 단연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는 수도 카라코룸에 있으면서 몽골 서쪽 아르항가이에서 알타이 지역에 이르는 툴루이가의 영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통성 면이나 세력 면에서 쿠빌라이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진 = 카라코룸의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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