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VIEWS 아주경제 - 아주 잘 정리된 디지털리더 경제신문

오늘의 추천 뮤직
검색
5개국어 서비스
실시간속보

[인민화보]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공예의 ‘등불’을 켜다

김미령 기자입력 : 2017-09-30 07:36수정 : 2017-09-30 07:36
페이훙빈(裴鴻斌), 1955년생, 타이위안(太原) 사람, 산시(山西)대학교 퇴직.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 고건축에 심취했고 옛사람들의 창조력에 감탄해 크면 장인이 되어 자기 힘으로 옛사람의 신공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옛 정취를 물씬 풍기는 그의 목공 모형이 하나 둘 씩 세상에 나왔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30%는 기술, 70%는 문화라는 ‘전통’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과 집착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있다.
 

페이훙빈이 백년 건축인 ‘산시대학당’ 축소 모형을 만들고 있다.[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좁고 습한 지하실의 백열등이 비추는 작업대에 커터칼, 줄 같은 목공 도구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다. 벽쪽에 있는 작은 책장에는 각종 부품 병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그 곳에서 풍채 좋은 페이훙빈이 대학당 건축 모형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 장면은 그가 가진 ‘성실, 현실적, 평온’의 마음가짐과 잘 맞아떨어진다.
목공 모형이란 목재로 다양한 공예품의 축소판을 만드는 것으로 경관 축소, 소형 건축, 물건 축소 등이 있다. 페이훙빈의 작품은 이런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역사자료를 존중하면서 디자인에 창작을 가미해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독창적이며 대범한 이미지라는 예술적 특징이 있다.
 

몽고마차[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양치기 마차[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전차(戰車)[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서양식 마차[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중국식 건축[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뼛속 깊이 새겨진 마차(馬車) 사랑
페이훙빈은 어린시절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책을 빌려 읽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가져온 회화본 <까따메린(嘎達梅林)>을 본 그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고 그 책을 좋아하게 됐다. “너무 좋아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초원 위의 사람, 군마, 마차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책을 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지만 점점 비슷해졌다. 나중에는 평면도를 입체조형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골판지로 입체적인 마차 모형을 만들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타이위안으로 온 내 조상이 대장장이 골목에 터를 잡고 대장장이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주로 말의 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집안에 학자가 나오고 명예를 얻고 관직에 오르면서 자금이 마련되자 온가족이 지금의 페이자샹(裴家巷)으로 이사해 거주하게 됐다. 때론 나 스스로에게 왜 이렇게 마차를 좋아하지? 혹시 조상이 말의 편자를 만들었던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 핏속에 수공업자의 유전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묻곤 한다. 하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가족 이야기는 알 수가 없었다!”
페이훙빈은 마차에 대한 ‘애정’을 품고 공부를 했다. 이후 시골로 내려갔고 가정을 이루고 일을 했다. 이런 애정 때문에 그는 마차 관련 자료와 문화를 계속 수집하고 공부했다. “우연히 다른 사람이 파는 대나무 삼륜차를 봤는데 아내가 사고 싶어했다. 그런데 37위안이나 했다. 너무 비쌌다! 그때는 한달 월급이 100여 위안이었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봐요!’ 아내가 계속 칭찬을 해대는데 나는 ‘그게 뭐라고, 나도 만들 수 있어!’라고 말했다.” 페이훙빈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간단한 도구와 재료로 다양한 마차의 축소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우연히 알게된 목공예 재주
아버지의 작은 그림책이 어린 페이훙빈의 마음에 예술의 씨앗을 심었고 부인의 말 한 마디가 잠들어있던 그의 마차 왕국을 깨웠다. 어느새 16년이 흘렀고 목공예 모형 만들기가 페이훙빈의 주업이 됐다. “마차 모형은 같은 비율로 축소해 만든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다. 정확한 계산과 정교한 제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충할 수 없다. 바퀴의 경우 옛 사람들은 목재 9조각을 연결해 원형을 만들고 바퀴살 18개로 잡아당겼다. 이를 ‘9망18복(九網十八輻)’이라고 한다. 바퀴를 만들려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원형을 잘 이루고 수평을 잘 맞춰야 한다. 옛날에는 수평기가 없었기 때문에 바퀴를 만든 다음 연못에 넣고 수평이 맞는지 봤다. 바퀴가 가라앉으면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바퀴를 마차에 장착하면 사람은 흔들리고 말은 힘들다.” 페이훙빈은 진지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옛 사람의 장인정신을 자신의 창작에 담았고 여러 해 동안 열심히 파고들어 고차(古車) 모형만 20종 가깝게 설계하고 제작해냈다.
그가 만든 고차 모형은 대부분 옛 것을 모방했지만 그렇다고 모방에만 그치지 않는다. 단륜에서 양륜까지, 단원(單轅)에서 쌍원까지 구조가 정교하고 장식도 일일이 다 조사하는 정성을 들였다. 전국(戰國)시대의 마차는 병기가 우뚝 솟아 위풍당당해 단숨에 우리를 고각이 울리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전쟁터로 데려간다. 공자의 주유차(周遊車)는 모서리가 강인하고 수레 위의 일산(日傘)은 위엄이 넘쳐 마치 스승님과 열국을 주유하며 유세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고조선 궁궐 마차로 붉은색 마차 몸체가 화려하게 빛나고 아치형 끌채가 있고 마차 위에는 복희의 팔괘가 있다. 또한 천정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위로 향해 있으며, 첩창으로 된 격자창과 자주빛 시폰 휘장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것은 고조선 궁궐 마차로 영화 <신화(神話)>에서 영감을 받았다. 진시황제가 6국을 통일하고 고조선 공주를 비로 삼으면서 보낸 친위대는 위풍당당했다. 공주가 탄 궁궐 마차에서는 황가의 기상이 느껴질 뿐 아니라 창문과 문이 모두 옆으로 미는 형태로 당시 조선(한)반도 주민의 특징이 반영됐다. 전체적인 조형도 전국 말기 마차의 특징에 부합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화하민족의 <역경(易經)> 문화가 한반도까지 퍼졌다는 것이다.”
9층 누각도 흙 다지는 일부터 시작한다고, 창작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말하는 페이훙빈은 “내가 일하는 지하실은 면적이 좁고 좋은 재료와 도구가 없어 제작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옛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것도 좋은 것이다. 사실 제일 어려운 점은 자료 수집이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너무 적다. 또한 자료가 있다고 해도 대부분 평면도라 이를 기반으로 입체 조형을 만드는 것이 어렵고 크기 비율도 잘 맞춰야 한다”고 토로했다.
 

고조선 궁궐 마차[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교자차(轎子車)[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독주차(獨辀車)[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상차(象車)[사진=인민화보 장궈웨이(張國偉) 기자 ]


가장 아끼는 작품은 한국의 ‘초가집’
문(文)은 물(物)의 영혼이고 물은 문을 담는 그릇이다. 페이훙빈은 제작에 들어가기 전 자료를 많이 보고 연구해 그것의 문화적 배경과 연원 출처를 알아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다. “70%는 문화이고 30%가 기술이다. 문화적 기반이 없이 만들어낸 것은 모방에 지나지 않아 영혼이 없다. 예를 들어 중화민족의 ‘인문 시조’인 황제(黃帝)의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헌원의 뜻은 수레의 끌채다. 재임기간 그는 온갖 곡식과 초목의 씨를 뿌리면서 생산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또 의관, 수레, 배, 음율을 만들고 의학을 창제했다. 이를 통해 화하민족의 마차 제작 역사는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고차 모형은 화하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 이 선에서 멀어지면 내가 만든 작품에는 계승과 기맥이 사라진다.”
페이훙빈의 책장은 집안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책이 많고 분야도 다양하다. 특히 화하민족의 역사, 지리, 건축 등의 주제가 많다. 지식이 많아지면서 그의 창작 주제도 민가, 다리 등으로 확장돼 제갈량 초가집, 두보 초당, 동북 목조주택, 북방 민간 도자기 가마, 아치형다리, 한국의 초가집 등 다양해졌다. 오랫동안 하다보니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장관을 이루게 됐다. 이 가운데 한국의 초가집은 그가 아끼는 작품 중 하나다. “한국의 지리적 조건은 산시(山西) 지역과 비슷해 산이 많고 평지가 적으며 흙이 적어 벽돌을 굽기가 어렵다. 그래서 건축 재료가 나무 위주다. 나무를 쪼개고 연결해 판잣집을 만들고 지붕에 볏짚을 얹으면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며 바람을 막아주고 통풍이 된다. 다섯칸 방 중에 중간이 거실이고 제일 왼쪽이 부엌이다. 여기에서 불을 때면 온돌 전체가 따뜻해진다. 제일 오른쪽은 외양간으로 소는 가장 소중한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가족과 같이 둔다. 중간의 침실에는 온돌이 깔려있고 창문과 방구들 높이가 비슷하다. 이 작은 창문을 통해 마당 밖 상황을 볼 수 있다. 처마가 있고 보호 벽체가 비와 벌레를 막아준다. 아래에 있는 계단이 넓어 흐리고 비오는 날에는 처마 밑에서 가사일이나 농사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집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고 제주도에 조금 보존돼 있다. 이런 독특한 조선반도의 민가 문화가 보이지 않게 한(漢)문화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페이훙빈은 “유서 깊은 화하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문자와 옛 생활용품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옛 사람들은 흙, 나무, 청동, 가죽, 마 (麻) 등 단순한 재료와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장인정신과 아름다운 삶에 대한 바람이 녹아있다. 출토된 문물을 활화석이라고 한다면 옛 문화 모형을 만드는 것은 세상을 떠난 문화를 부활시키는 과정이다. 이는 나의 문화 관점이자 문화에 대한 내 마음”이라고 결연하게 말했다.
그는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공예의 ‘등불을 켰다.’ 페이훙빈은 자기 길에 충실했고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그 길을 걸었다. 이를 통해 얻은 것은 비단 가족과 친구들의 칭찬과 지지뿐이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이다. 그는 이것을 자기 인격 속에 깊숙히 새겼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중국의 마차, 민가 건축, 물건 등을 내 생전에 다 만들어 후세가 참고하고 기념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세계 중국어 매체들과 콘텐츠 제휴 중국 진출의 '지름길'
뉴스스탠드에서 아주경제를 만나보세요
아주경제 기사제보 -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