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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44] 칭기스칸 무덤은 어디 있나? ③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7-09-12 11:15수정 : 2017-09-12 11:15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오르도스 에진호르에 가묘

[사진 = 칭기스칸 가묘(에진호르)]

시신이 묻힌 곳은 찾지 못하고 있지만 칭기스칸의 시신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머물렀던 중국 내몽골 지역에는 가묘(假墓)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운반해 가던 시기가 무더위가 심한 8월이었고 당시는 부패를 막기 위해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느린 장례 행렬이 고향 땅 근처에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수레가 멈춰 섰던 오르도스 지역에 매장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장례행렬이 몽골 본토에 도착했을 때 황금 시신은 없고 빈 관만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르도스 지역에 묻힌 것은 그의 유품들이고 시신은 부르칸 칼둔에 묻혔다고 보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부르칸 칼둔쪽이 설득력이 있다. 그래도 그의 후손들은 그의 시신이 머물렀던 곳을 에진호르라 부르고 그의 가묘가 만들어진 곳을 나이만 차강 게르라고 부르면서 신성시했다. 지금 그 곳은 중국 땅 내몽골 지역 안에 자리하고 있어 주로 내몽골의 몽골인들이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 직접 찾아가 본 가묘

[사진 = 칭기스칸 가묘]

내몽골 자치주의 주도(州都) 후흐호트에서 에진호르를 찾아가는 데는 차량으로 다섯 시간 가량 걸렸다. 칭기스칸의 가묘, 성길사한능(成吉思汗陵)을 지키는 사당지기 격인 관리소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몽골인이 아니라 한족 출신이었다. 여기에서도 소수민족의 단합을 방지하려는 중국 민족 정책의 기본 방향을 엿볼 수 있었다.

▶ 다얀칸의 즉위식도 이곳에서
원래 칭기스칸의 가묘는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처의 다른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몽골족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됐다. 15세기 몽골족의 부흥을 주도했던 다얀칸이 여걸 만두하이의 지도 아래 즉위식을 올린 곳도 이곳이었다.

▶ 강과 송림 사이의 초원지대에 위치
정자처럼 보이는 세 채의 돔형 건물로 이루어진 칭기스칸의 가묘는 송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가묘의 앞쪽으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일부분은 노란 들꽃들로 채워져 있었다.

가묘의 뒤쪽은 소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우거진 구릉을 이루고 있었고 그 구릉을 내려가면 초원 지대가 다시 펼쳐지다가 이곳을 지나는 강과 만나고 있었다. 강과 송림 사이의 초원 지대는 목초지로 수백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 칭기스칸이 남긴 유품들

[사진 = 칭기스칸 유품]

세 채의 가묘는 현대식 건물로 복원 공사를 해서 그런지 겉에서 보기에는 고풍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세 채의 가묘 옆에는 칭기스칸의 유품을 모아 놓은 조그마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당 안에는 칭기스칸이 사용했다는 술잔과 장신구, 손 칼, 말 젖 받는 통 등 유품들이 안치돼 있었다.

칭기스칸의 가묘 안 중앙에는 세 채의 게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앙에 있는 것이 칭기스칸과 그의 부인 부르테를 모셔 놓은 사당이었고 그 양쪽 옆에 있는 게르 사당은 칭기스칸 후궁들의 영혼을 모셔 놓은 곳이었다. 또 세 채의 가묘 가운데 동쪽에 있는 가묘는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와 그 부인의 영혼을 모신 곳이었다.

▶ 벽화로 새긴 몽골의 역사

[사진 = 칭기스칸 가묘 벽화]

사당의 긴 벽을 따라서 벽화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1162년 칭기스칸의 탄생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고난의 세월을 보낼 당시의 어린 시절, 1204년 나이만 정벌, 1206년 대몽골제국의 탄생, 1219년부터 1225년에 걸친 호레즘 원정 등 칭기스칸의 일생이 벽화 속에 표현되고 있었다.

몽골 위구르문자의 창제와 쿠빌라이의 즉위 등, 의미 있는 사건들을 담은 벽화들도 있었다. 이 그림들은 중국풍이나 몽골 풍이라기보다는 이슬람 색채가 강했다. 본 채 건물의 중앙에 돌로 깎아 만든 칭기스칸의 앉아 있는 좌상과 바깥에 말을 타고 있는 동상, 그리고 본 채 뒤편에 새워져 있는 거대한 비석 등이 칭기스칸의 용맹성과 지도력을 찬양하고 있었다.
중국 땅에 남아 있는 다른 몽골의 유적지가 대부분 폐허로 변해 방치되고 있는데 비해 이곳은 나은 편이었다.

▶ 일 년에 여러 차례 제사 행사

[사진 = 오보 참배하는 몽골인]

칭기스칸의 가묘에서는 일 년에 여러 차례 칭기스칸을 위한 제사가 행해진다. 원나라를 세운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음력 3월 21일과 5월 15일, 8월 12일, 12월 3일에는 반드시 칭기스칸 제사를 지내도록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매년 봄과 매달 제사를 올리는 등 1년에 여러 차례 제사상이 13세기부터 지금까지 몽골인들에 의해 차려지고 있다.

각 경우에 따라 받쳐지는 제물 등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살아 있는 양을 직접 잡아 제물로 바치거나 삶은 양고기를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마유주를 하늘에 뿌린 뒤 제사상에 올리고 하닥이라고 부르는 흰색, 푸른색 천을 올려놓기도 한다. 제사를 올리는 것을 포함한 이곳의 모든 행사는 이제 관광 상품으로 개발돼 때를 맞춰 관광객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 그의 유산을 되짚어봐야 할 시점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 세상을 뒤흔들었던 칭기스칸은 다시 하나의 점으로 돌아갔다. 그는 평생 가슴에 품어 왔던 텡그리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 점의 흔적을 누구에게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의 시신이 잠시 머물렀던 에진호르에 그의 후손들이 손때 묻은 그의 유품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아쉬움에 대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사진 = 몽골초원의 석양]


육신조차 남기기를 거부했던 칭기스칸! 그러나 그는 그 육신의 몇 백 배, 몇 천 배의 많은 것들을 남겨 놓았다. 그가 세계를 품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많은 것들, 그 많은 것들은 후손들에게 갈 길을 제시해 줬고 또 보다 넓은 세계를 감싸 안아 대몽골제국을 완성하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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