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기 이천시 H1클럽에서 은퇴식을 마친 뒤 만난 이정민은 이같이 말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통산 11승을 쌓은 그는 손목 부상 탓에 17년간 이어 온 선수 생활을 이날 마무리했다.
은퇴식이 열린 날은 KLPGA 투어 아이스버그골프·서울신문 오픈(총상금 15억원) 개막을 하루 앞둔 공식 연습일이었다. 동료와 후배 선수들이 대회장을 찾아 이정민의 마지막 길을 축하했다. 어린 시절 같은 스승에게 골프를 배운 친구들은 커피차로 힘을 보탰다.
이정민의 표정은 밝았다. 은퇴가 아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내일 당장 어디가 부러지거나 골프를 못 치게 돼도 후회하지 않도록 매일 진심을 다했다. 아웃오브바운즈(OB)가 난 공도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며 "그래서 은퇴를 하니 시원섭섭이 아니라 그냥 시원하다"고 미소 지었다.
2010년 정규투어에 데뷔한 이정민은 그해 5월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신고했다. 이정민은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으로 이 대회를 꼽았다. 그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우승 트로피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가장 임팩트가 있었던 대회"라고 돌아봤다.
정점은 2024년 4월이었다. 이정민은 크리스에프앤씨 제46회 KLPGA 챔피언십에서 최종 합계 23언더파 265타를 기록해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손에 넣었다. 265타는 당시 KLPGA 투어 72홀 최소타 타이기록이었다. 이 대회가 이정민의 통산 11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으로 남았다.
부상은 그 뒤에 찾아왔다. 이정민은 KLPGA 챔피언십 우승 이후 왼쪽 손목 연골이 찢어졌다. 상태가 나아지다가도 날씨가 추워지고 러프가 길어지면 다시 나빠졌다.
이정민은 "다친 곳은 조금만 해도 움츠러들게 된다. 그러다 보니 과감하게 치지 못했다"며 "전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경기력과 기술이 나오지 않으니 지금이 딱 그만둬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정민은 2024년 메이저 우승으로 내년까지 정규투어 시드를 갖고 있다. 다만 은퇴 시점은 시드가 아닌 스스로 세운 기준이 정했다.
올 시즌 하반기 들어 러프가 깊은 코스가 이어지면서 손목 상태는 더 나빠졌다. 이정민은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까지만 뛰기로 마음을 굳혔고 지난 9월 이 대회가 마지막 출전 대회가 됐다. 은퇴 무대인 이번 아이스버그골프·서울신문 오픈에도 나서지 않았다.
이정민은 "치다가 중간에 정말 찢어지면 마지막 경기에서 기권하게 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며 "치지 않고 공식 연습일에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현역 시절 이정민은 승부욕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정민은 "지기 싫어하는 건 똑같은데 그 초점이 상대방이 아닌 나한테 있었다. 긴장돼서 준비한 걸 못 해내면 진 것이고 긴장돼도 해내야 나를 이겼다고 생각한다"며 "남에 대한 승부욕이 없는 거지 나는 승부욕이 세다"고 강조했다.
'걸크러시'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정민의 정교한 아이언 샷을 닮고 싶다는 후배들도 적지 않았다. 후배들이 잘 따르는 이유를 묻자 이정민은 "내가 어릴 때는 골프가 개인 종목인데도 기강이 센 편이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더 편해졌다. 나도 후배들과 장난도 많이 치고 얘기도 많이 나누면서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면서 "후배들을 너무 잡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려고 했던 것 같다"고 답했다.
후배들에게 남긴 당부는 두 가지다. 다치지 않는 것과 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정민은 "작은 부상도 다 연결돼서 몸 전체가 안 좋아진다. 그래서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공이 가면 어디 가겠나. 골프장 안에 있다. 공 하나하나와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은퇴 이후 계획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30대에 접어든 뒤로 은퇴 이후를 미리 준비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이정민은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만둔 뒤를 생각하면 나약해진다고 봤다.
쉬는 동안에는 좋아하는 스키를 탈 생각이다. 이정민은 올해 초 스키 지도자 자격인 티칭 레벨1을 땄다. 이정민은 "겨울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며 "골프는 긴장하면 어떻게 될지 예측이 되는데 스키는 예측이 안 돼서 시험 때 정말 많이 떨었다"고 웃었다.
이정민이 스키를 제대로 배운 지는 5년, 처음 시작한 지는 8년 정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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