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이뤘다. 반도체로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섰다. K팝으로 시작된 K컬쳐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어느 때 보다 한국의 위상은 높다.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만할 때다.
하지만 외교 무대의 존재감은 보잘것 없다. 동북아는 물론 국제 무대서도 입지가 좁아 설 자리가 없다. 통상·안보 전략을 재편하며 한국을 강력히 압박하는 미국, 한국은 철저히 무시하며 '핵무력 확충'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북한 사이에 꼈다. 전쟁이 장기화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마저 최악이다.
동북아 경제·문화의 핵심 리더이자 글로벌 중추국가를 자임하지만 외교 전선의 전략 부재가 문제다. 주요 사안마다 플레이어 자격을 버리고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의 관세 협박에 매번 양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통상은 물론 안보마저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 우대 통상 정책과 에너지 협력 참여 종용, 나아가 방위비 분담 및 정보 공유 원칙 준업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명확한 전략적 대안이나 신속한 협상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불만은 가득한데 말은 못하고 표정만 찌푸리고 있는 모양새다. 미국이 한국을 건너뛰고 북한과 직접 협상판을 짜려는 기류가 명확해지는데도, 뒷짐만 지고 있다. 주도는 못해도 우리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유효 카드는 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북한과의 관계는 좋은가? 정부는 인도적 지원이나 대화 재개 제안을 지속해 왔으나, 북한은 이를 '정치적 도발'로 규정하며 차갑게 외면하고 있다. 남북 간 대화 채널이 사실상 완전히 마비됐다. 한국이 북·미 협상의 '페이스메이커'나 '중재자' 역할을 맡겠다는 구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에 가깝다.
북·미 대화가 본격화할 경우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 미사일과 핵전력이 동결 대상에서 제외되는 악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음에도,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개입이나 예방적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와의 마찰 또한 한국 외교의 전략적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치 외교와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강조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와 대러시아 외교 사이에서 결단력 없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사업에 우리나라가 설 자리도 좁아지고 있다. 유럽 안보 네트워크와의 연대에서 주도권도 잃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지만 서로 합의점을 찾아야 할 상황에서 불편한 트집만 서로 잡는 것은 스스로 우리 입지를 좁게 만드는 일이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은 경계심을 더 크게 만든다. 국제사회가 수차례 경고했다. 우방국과 전문가들은 한국이 외교적 불확실성을 방치할 경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동북아 안보 구도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경제적으로는 K반도체와 첨단 산업, 문화적으로는 K컬처를 바탕으로 막강한 소프트 파워를 보유한 한국이 정치·외교 무대에서는 스스로 '원외 플레이어'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동북아의 중심 축이자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마땅히 내야 할 당당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다. 그저 사태를 관망하는 무기력한 태도만 되풀이되고 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국익을 확보할 수 없다. 행동해야 한다. 안보와 경제가 직결된 '안보통상 복합위기' 시대에 방관은 곧 국익의 손실이자 국가 위상의 추락을 의미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외교 정책 전반에 대한 엄중한 점검과 대전환에 나서야 한다.
미·북 대화의 가능성에 대비해 한·미 간 안보 공조와 통상 협상의 원칙을 조속히 정립하고,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국제사회와의 연대에서도 명확하고 책임 있는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경제와 문화의 위상에 걸맞은 외교적 주도권과 전략적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은 안보는 물론 경제까지 타국의 손에 맡기는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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