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메인거리. 약국 쇼윈도마다 여러 국내 제약사의 여드름·흉터·색소침착 관리 연고 포스터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제품명 아래에는 '여드름 자국(ニキビ跡)' '기미·주근깨(シミそばかす)'처럼 효능을 풀어 쓴 일본어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일부 약국 입구에는 대기 줄을 정리하는 차단봉까지 설치할 정도로 'K-약국 쇼핑'이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약국에 들어서자 내부는 화장품 편집숍을 연상케 했다. '기미·잡티(DARK SPOT)' '보습(HYDRATION)' '주름(ANTI-WRINKLE)' 등 피부 고민별 안내판 아래 제약사에서 내놓은 크림과 앰플 등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일부 제품 앞에는 '테스터(TRY ME)'라고 적힌 노란 스티커까지 외국인 손님들이 직접 둘러보고 고를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는 '약국 1위 PDRN(Pharmacy No.1 PDRN)'을 내건 재생 크림이 차지하고 있었다. 평일 낮 시간임에도 흰 가운을 입은 약사와 외국어가 가능한 직원들이 외국인 손님 응대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인근 다른 약국에서는 '부기 1일 세트' '집중 부기 1일 세트'라는 이름의 세트 제품이 진열대 한 칸을 채우고 있었다. 부기·멍 완화용 일반의약품 등을 투명 봉투 하나에 포장한 것이다. 한국어 제품명 아래 영어·중국어·일본어로 '오늘 부기는 오늘 안에'라는 안내도 눈에 띈다. 시술 직후 얼굴 부기를 빨리 완화하려 관광객을 겨냥한 것이라고 직원이 설명했다.
바퀴가 달린 빨간 장바구니에 PDRN 크림과 앰플을 가득 담고 쇼핑 중이던 20대 일본인 여성 관광객들은 이날 오전 강남 피부과에서 시술을 마치고 오후에 명동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사토 미사키씨(28)는 "피부과에서 레이저 시술을 받고 재생 크림을 사러 왔다"며 "두 달에 한 번꼴로 한국에 오는데, 보통 1박 2일 동안 시술을 받고 쇼핑까지 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시술 부위에 맞는 제품을 약사에게 바로 물어볼 수 있고 일본어 안내도 잘되어 있는 등 장점이 많아 약국도 꼭 들르는 '필수 쇼핑 코스'가 됐다"고 덧붙였다.
일본 관광객 사토 미사키씨(28)가 PDRN 크림 등 화장품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끌고 있다. [사진=이효정 기자]
'부기 1일 세트'라는 문구 아래 영어와 일본어·중국어로 안내가 되어 있다. [사진=이효정 기자]
◆ 명동 중앙 거리에서 손님 맞는 대형 약국 … 관광객, 피부과 시술 후 약국으로
명동 메인 거리에 화장품 로드숍 양옆으로 대형 약국이 나란히 영업하고 있다. [사진=이효정 기자]명동에 위치한 또 다른 대형 약국 앞에 관광객이 모여 있다. [사진=이효정 기자]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명동 거리는 약국이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 화장품 로드숍이 빠져 나간 명동 상권을 약국이 메우고 있었다. 행정안전부 공공데이터포털에 따르면 올해 1~9월 명동 거리에 새로 문을 연 약국은 23곳에 달했다. 지난해 연간 개설된 약국 수(11곳) 대비 두 배를 이미 넘어섰다.
이 같은 배경엔 급증한 의료 관광객이 있다는 분석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201만1822명으로 전년보다 71.9% 늘며 통계 집계 이후 처음 200만명을 넘었다. 진료 과목별로는 피부과가 131만2700명으로 전체 중 62.9%를 차지했고 전년 대비 증가율도 86.2%로 가장 높았다. 국적별로는 중국인이 30.8%(61만8973명), 일본인이 29.8%(60만9명)로 두 나라가 약 60%를 차지했다.
미용·의료 관광객들의 소비는 시술에만 그치지 않는다. 시술을 마친 뒤 피부 관리용 크림을 사려는 수요가 이어지며 K-약국을 찾는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외국인 관광객의 약국 소비는 전년 동기보다 196.8% 늘어 약 세 배에 달했다. 올해 1~9월 외국인 약국 소비액은 2297억9400만원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소비액(1257억6800만원)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외국인 의료 소비액은 1조8398억원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소비액(1조7228억원)을 넘어섰다. 피부과(55.7%), 성형외과(19.4%)에 이어 약국 비중도 12.5%에 달했다. 결제 건수 비중으로는 약국이 69%에 달해 피부과·성형외과가 고액 시술 소비를 이끌고 약국에선 소액 제품 구매가 많음을 보여줬다. 시술 이후 관리를 위한 수요뿐 아니라 소셜미디어(SNS)에서 유행하는 한국 약품을 사려는 쇼핑객까지 더해지면서 2030 여성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 약국이 '핫플'로 등극한 셈이다.
관광객들이 약국을 찾는 이유로는 '전문성'과 '가격'이 꼽힌다. 명동 약국에서 근무하는 직원 A씨는 "약사와 직접 상담을 할 수도 있고, 재생 크림 같은 일반의약품을 일부 국가와 달리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창고형 약국은 재생 크림·여드름 치료제 등을 대량 매입해 '값이 싸다'는 입소문이 온라인을 통해 퍼지면서 외국인 방문객이 더 늘었다고 A씨는 설명했다.
◆ 제약사, 이제는 유통업계 '더마 전쟁' 격화
[사진=이효정 기자]
제약사들은 약국을 피부 관리 시장의 접점으로 삼고 있다. 이날 명동 약국 쇼윈도에도 파마리서치의 PDRN 크림 '리쥬비넥스'와 동아제약의 '노스카나' '멜라토닝' '리큐번' 광고가 전면에 걸려 있었다. 파마리서치는 시술용 의료기기 '리쥬란', 약국용 일반의약품 '리쥬비넥스크림', 화장품 '리쥬란코스메틱'으로 시술부터 가정 관리까지 이어지는 수요를 공략한다.
기존 뷰티 유통업체도 맞불을 놨다. 올리브영은 올해 3월 제약사들과 함께 개발한 고기능 스킨케어 카테고리 '어드밴스드 더마'를 선보인 뒤 4개월 만에 전용 매대를 전국 650개 매장으로 늘렸다. 6월 매출은 론칭 직후인 4월보다 260% 이상 증가했고, 매출 중 약 70%를 외국인이 차지했다. 무신사는 온누리약국과 손잡고 '무신사 뷰티 홍대' 지하 1층 전체를 '뷰티온누리약국'으로 꾸몄다.
'더마 화장품'에 대한 외국인 수요 증가로 약국 프리미엄이 더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오린아 LS증권 연구원은 "소비자 수요가 이제는 의약외품과 가까운 효능 중심의 화장품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라며 "올리브영과 다이소에는 또 다른 경쟁 채널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