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재조명] 우리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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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입력 2023-08-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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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⑤제왕학으로 본 우남(雩南) 이승만

박종렬 논설고문


 세계적 거물(巨物),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그를 형용하는 수많은 표현이 있지만 ‘한국인 최초 박사’로 통칭 ‘이 박사(Dr. Rhee)인 그는 세계적 거물(巨物)이었다. 거물은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beyond description)는 뜻을 함축한다. 조선조 말 개혁적 선각자로 혁명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독재자 등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남자’를 뜻하는 ‘독부(獨夫)’(심산 김창숙)라고 하는가 하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저서 ‘이승만 평전: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에서 “이승만의 수많은 과오, 반민족·비민주적 행적은 그의 업적을 덮고도 남는다”고 비판한다.

숱한 훼예포폄(毁譽褒貶)에도 이승만(李承晩:1875.3.26.~1965.7.19.) 박사는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예지와 배짱을 겸비한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다. 국제문제에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경륜, 뚜렷한 주관을 갖춘 국제정치학자이기도 한 그는 어떤 석학(碩學)보다 ‘일찍이’ 1920년대에 세계를 풍미하던 공산주의 붕괴(1989년 소련 해체)를 예견한 탁월한 통찰력과 난마처럼 얽힌 국제정세 속에서 ‘멸망한 조선’을 되찾아 ‘대한민국’을 건국한 창업자다.

일찍이 ‘조국 광복’이라는 원대한 포부로 만난을 극복하며 도전하는 승풍파랑(乘風破浪) 기세로 일관된 풍운아(風雲兒) 이 박사의 일생은 투쟁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청년 시절에는 왕조 후손이면서도 왕조체제와 싸웠고, 중년에는 ‘망명 임시정부 프레지던트’라는 명함 한 장 들고 일제에 투쟁했고, 말년에는 미국과 중공-소련과 처절한 전쟁을 벌였다. 항상 그의 상대는 당대의 ‘최정상급’ 인물이었다. 20대에 조선 임금 고종과 대결했고, 30대에는 조선의 밀사로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대립했고, 6·25 때는 트루먼, ‘상비군 작전(Operation Ever ready)’으로 자신을 세 번이나 축출하려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들었다. 건국 2년 만에 대한민국 적화를 노린 스탈린(1878~1953), 모택동(1893~1976), 김일성(1912~1994) 3자 간의 합의된 ‘작품’인 6·25 때 한반도 운명을 건 혈투에서도 이 박사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전범국 일본을 경제 초대국으로 만든 국가전략을 설계한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수상(1878~1967), ‘프랑스의 영광’을 실현한 드골 대통령(1890~1970), 패전국 독일을 ‘자유 독일’로 서구사회에 착근케 한 아데나워 수상(1876~1967) 등에 비견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들에 비해 천하대세나 국제 정치에 대한 식견, 세계 최고의 학력 등 국가경영이나 경륜에 있어 손색 없는 거물이었다. 특히 이름도 없는 약소국 지도자로 동서학문을 겸비하고, 대의(大義)를 위해 투쟁해 온 그의 이력이 오히려 돋보인다.

특히 36만여명의 인명피해(사망자 18만3108명, 丹東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 기념관’ 기록)를 입으며 혈투를 벌인 중공은 ‘항왜(일)원조전쟁’이라는 임진왜란에 빗대 6·25를 한국보다는 북한을 구원하기 위하여 미국과 싸운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 명명한다. 그 전쟁으로 애지중지하던 장남을 잃은 모택동(毛澤東) 측근으로 고위 관리직에 있던 중 홍콩으로 탈출한 주경문(周鯨文)은 ‘모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동양의 인물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전했다. ‘김일성 절친’ 캄보디아 시아누크는 “이 박사는 급(級)이 다른 고단수(高段手) 지도자”로 “많은 지도자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쟁취하려 했는데, 그는 외교를 통하여, 즉 세계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김일성의 친구’ 시아누크, “李承晩은 級이 다른 高段手의 지도자”, 조갑제, 뉴데일리, 2015.6.2.)

 ‘우남이 형님’ ‘백범 아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해방공간에서 상징적인 두 지도자 이 박사와 백범 김구 선생은 ‘우남이 형님’ ‘백범 아우’라며 ‘브로맨스’로 부러움을 샀던 황해도 동향이자 한 살 터울. 이들은 ‘항일·반공·반탁·기독교 신자’라는 공통점으로 어려운 시절에는 ‘공동의 적 일본’에 힘을 합쳐 대응했지만, 새 나라의 ‘주인’을 놓고 운명적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레닌이 소련 혁명기 애용한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iots)’ 활용전술을 원용하여 권력을 확보했던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 공산정권 두목으로 선택, 이어 한반도 적화에 필요한 인물로 김구와 김규식을 ‘적임자’로 점찍었다.(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국가정보학회, 2007). 권력은 나눌 수 없고 우두머리가 둘일 수 없듯이 자웅을 겨루는 두 세력은 공존이나 화친할 수 없는 세불양립(勢不兩立)임을 꿰뚫어 본 한반도 공산화 총책 슈티코프(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북한과 만주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한 통치 책임자)는 “고립된 김구를 이용하라”는 스탈린 지령에 따라 백범의 노욕(老慾)을 자극했다.

스탈린의 참모로 정치공작의 달인인 모사(謀士) 슈티코프는 김일성을 앞세워 “미-소 공위도 끝났으니 이제 외국 간섭 없이 통일적인 민주주의 중앙정부를 세우기 위해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치정세를 토의하자”는 명분하에, ‘통일전선’ 전술로 추진된 남북협상에 백범을 초대한다.

백범은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국공합작 때 첩자로 맹활약, 주은래(周恩來)가 북한에 추천한 김일성 측근 ‘거물 간첩 성시백’을 통해 던진 ‘통일 대통령 김구, 부통령 김일성’ 추대라는 미끼에 낚였다. 임정을 이끈 항일투쟁 경력이나 국민적 인기는 꿀리지 않지만, 경륜 학력 인맥 등 우남에게 한 수 접어야 했던 백범의 콤플렉스를 놓치지 않고 ‘약한 고리’를 찾아 공작을 벌인 것이다. ‘일산일호(一山一虎)’, 즉 ‘산 하나에 호랑이 한 마리가 주인’이라는 말대로 백수의 제왕은 같은 산에 둘이 있을 수 없듯 백범과 우남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UN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던 백범이 하룻밤 새 돌변, “김일성과 통일 협상”을 주장하며 남북협상 참석을 위해 북행을 결행했다. 이 박사는 “평양은 무엇하러 가나? 갈 테면 모스크바로 가야지. 김일성을 백날 만나봤자 무슨 소용 있나, 남북통일을 논의하겠다면 분단의 원흉 스탈린을 직접 만나서 담판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유 총선거를 무산시키려는 남북회의에 참여하면 스탈린의 목적에 이용만 당할 뿐이다. 한국 지도자 중에서 이것을 홀로 모른 채 평양행을 고집한다니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오.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국가 대사에 방해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승만 담화, 이승만 건국사⑴ 스탈린과 40년 전쟁, 인보길, 뉴데일리, 2022.11.23./ 이승만 건국사(51) 스탈린-김일성-성시백의 화려한 입체공작 성공...궁지의 김구-김규식 낚이다. 인보길, 뉴데일리, 2023. 8. 11)며 안타까워했다.

30대부터 ‘세계 정상’들과 겨뤘던 73세의 이 박사는 72세의 백범이 ‘통일전선’ 전술 함정에 낚여 스탈린의 괴뢰(傀儡), 즉 꼭두각시로 구상유취(口尙乳臭)한 36세의 ‘가짜 김일성’인 ‘김성주’에 말려든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렇게 이 박사의 ‘스탈린과의 40전쟁’은 얄타회담 음모와 해방 3년을 거쳐,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까지 이어진다. 국가의 생존을 놓고 글로벌한 시각에서 국제정세를 조망(眺望)하며 당대의 최고정상들과 대결해 온 이 박사는 ‘고향에는 영웅이 없다’는 말대로 나라를 세운 국부(國父)임에도 국영방송 KBS에서 ‘국립묘지 파묘(破墓, 2019. 3. 16)’에 이어, 2020년 광복회장까지 같은 주장을 할 정도로 매국노, 독재자로 혹평받고 있다.

6·25 전쟁 당시 전시 대통령이던 그는 30여년 미국 현장에서 국제 정치의 작동원리와 세계정세를 관찰해온 국제정치학자로서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적화를 막아냈다. 6·25가 부분적으로 내전적 성격이지만, 그 본질은 세계이념 전쟁으로 “세계냉전체제가 한반도서 폭발한 사실상 3차대전”이며, 삼국통일·임진왜란·동학 전쟁 등 한반도의 패권변동은 늘 국제문제로 외교가 중시되었다는 박명림 교수의 지적대로 이 박사는 탁월한 외교술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움직였다.

“역사적으로 한국문제는 단 한 번도 지역 및 국제질서와 유리되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대륙과 해양, 중국과 일본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가교와 요충으로 존재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각각 중화체제, 동서 조우, 일본 제국주의, 냉전체제로 변전될 때 한국의 위상이 각각 조공국가, 부유(浮遊)국가, 식민국가, 분단국가로 정확히 조응했다는 점은 한국문제의 위상과 본질은 국제질서의 변천과 불가분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을 증거한다.” (“6·25는 세계냉전체제가 한반도서 폭발한 사실상 3차대전”. 박명림, 한겨레, 2013.7.29.)

광복 직후 당시의 한반도 내외정세를 감안할 때 난마처럼 얽힌 해방정국에서 대전략가이자 싸움의 고수(高手)였던 이 박사는 미·소 강대국과 힘겨루기를 하며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 24장 6절)”를 체현했다. 미국 최고 학력으로 형성된 인맥을 중심으로 미 국무부 등 최고위 인적 네트워크를 엮은 탁월한 정보력과 독립운동의 좌우 대립 속에서 연마된 백전노장의 뛰어난 권모(權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등 민심을 뒤흔드는 레토릭의 대중동원술로 혼란을 수습하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대학 1학년 때 ‘이승만 타도’를 외치며 데모에 나섰던 4·19세대로 5공의 이데올로그이자 책사(策士)로 극일(克日)을 화두 삼아 천착해온 일본 전문가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은 이 박사를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는 등 하나님이 ‘실력을 위해 40년, 인격을 위해 40년’을 준비시킨 ‘유대교 속에서 부활한 모세’에 비유, “불퇴전의 주권의식과 민족적 아이덴티티, 국제 정치에 대한 마키아벨리적 전략 감각, 국가의 전(全)기능에 대한 고도의 장악력 견지, 온 국민의 성망(聲望)이 일신에 집중할 때만 가능한 고양된 정신의 사명감 등을 가진 지도자였다”(월간조선, 1995년 1월호)라고 뒤늦은 반성의 회고를 했다.

40대 망명정부 대표, 주변 반대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명함 새겨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홍사용(洪思容, 1900~1947),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白潮)》. 1923년 9월호.


일제 강점기 망국(亡國)의 고통을 겪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설움이 담긴 정한(情恨)을 그려낸 시처럼 이 박사는 30대부터 70대까지 망국의 설움 속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이역만리를 떠돌며 풍찬노숙했던 ‘눈물의 왕’이었다. 1875년(고종 12년) 황해도 평산군 대경리에서 몰락한 왕손 이경선 공의 셋째아들(손위 두 형 조기 사망)로 태어난 그는 조선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16세손. 그는 40이 다된 자당(慈堂)이 북한산 문수암(文殊庵)에서 백일기도를 올려 얻은 6대 독자로 귀한 아들이었다. 이 박사 부친은 구한말 파락호(破落戶) 대접을 받던 대원군이 12살 된 둘째 아들 ‘개똥이’를 기묘한 책략으로 26대 왕 고종으로 등극시킨 전말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비록 방계 후손이지만 타고난 왕재인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좇았다.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라, ‘자식에 대해 친아버지 이상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경선공은 아들이 왕기(王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초 용꿈 태몽을 기화로 ‘용을 잇는다’, 즉 왕손의 긍지를 담아 승룡(承龍)이란 아명을 지었지만, 사주팔자가 초년에는 죽을 고생을 하지만 ‘늦을 만’자를 쓰면 ‘늦게라도 왕이 된다’고 해 승만(承晩)으로 개명도 했다. 비록 가난한 왕손이었지만 이 말은 이 박사에게 ‘자기암시(自己暗示)’로 작동, ‘자의식’만큼은 망명 중에도 최면(催眠)을 걸어 ‘잠룡(潛龍)’으로 살았다.

그는 철이 들며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천하경영에 나섰다. 30세 무명의 서생에 불과한 그가 1904년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주선한 고종 처조카 민영환 대신이 ‘임금’과의 만남을 주선했지만 한마디로 딱 거절한다. 견디기 힘든 처절한 고문과 사형으로 내몬 무능한 고종을 경멸(輕蔑)했던 그의 자존감이 허락지 않았다. 심중에는 자신의 선조 양녕대군이 세종대왕이 된 동생에게 양위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고종’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식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 직하다. 부처님 가피로 태어났다고 자당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듣고, 생일 때마다 찾아갔던 문수사에서 배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실천했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 하면 어디서나 참된 것이지 헛된 것은 없다”(당나라 임제의현:臨濟義玄, ?~867)는 경구를 새기며 어디서나 ‘주인 된 왕’으로 살아갔다.

대한제국 밀사가 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 상하이 임정의 수반으로 추대된 뒤 ‘대한민국 대통령’, 즉 ‘Dr. Syngman Rhee,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표기된 명함을 새겨 1945년까지 30여년 ‘왕’으로 ‘행세’했다. 워싱턴 DC에 사무실을 열고 미국 37대 국무장관 존 헤어에서 48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장관까지 무려 11명의 장관이 교체되는 긴 세월 동안 천대와 괄시 속에서 미 국무부를 드나들며 ‘대통령’을 자처했다. 세계 각국을 방문할 때도 항상 ‘president’ 명함을 들고 다녔다. 이는 스스로 자신에게 명령한 엄숙한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였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8개의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는 등 최고위직 정상은 항상 이 박사 몫이었다. 해외에서 이승만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소개했지만, 이는 국무총리 제도인 임시정부 헌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런 갈등은 당시 주고받은 전보에도 담겨 있다. 임정 내 기호파와 서북파의 대립 구도 속에서 서북파를 대표한 도산 안창호는 라이벌로 등장한 이 박사의 ‘president’ 집착을 힐난(詰難)했다.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중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세를 하지 마시오.”(1919년 8월 25일 안창호 국무총리 대리)

정치적 맞수를 용납하지 않고, 자기가 중심이 아니면 못 견디는 이 박사는 다음날 “내가 대통령 명의로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시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라고 답장, ‘대통령(President)’ 직함을 고집했다.

‘대통령 호칭’ 갈등은 임시정부가 9월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로 바꾸고 이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일단락된다. ‘망명정부 프레지던트’가 직업이었던 그의 70평생 노정(路程)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는 ‘유심소현(唯心所現)의 법칙’을 확신한 삶이었다. 1919년 재미교포들과 3·1운동 지지시위를 한 뒤 필라델피아 미국독립기념관을 방문, 평소 흠모했던 ‘조지 워싱턴 대통령’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고 자신에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약속한 대로 천신만고 끝에 독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꿈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22살 때 ‘조선의 독립’ 영어연설로 장안의 화제

‘신동(神童)’ 이 박사는 서당 선생 따님으로 한자를 익힌 자당의 가르침으로 6살에 천자문을 떼고 부친 소원대로 과거시험을 목표로 불철주야 매진, 11세에 『통감절요(通鑑節要)』 15권을 독파했다. 이어 『시전(詩傳)』 10권과 『서전(書傳)』 2권을 암송하였고, 틈틈이 『삼국지(三國志)』 『서상기(西廂記)』 『전등신화(剪燈新話)』 등 소설도 탐독하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암송, 유학의 오의(奧義)를 터득한 이 박사는 평생 한시를 지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의 한시집 『체역집(替役集)』(154 題, 196수: ‘신체적’인 노역[役]을 정신적인 노역으로 바꾸겠다[替]”는 뜻)에는 『당음(唐音)』 『고문진보(古文眞寶)』 등 문학서는 물론, 『사기(史記)』 『한서(漢書)』 『장자(莊子)』 등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서가 두루 인용되어 있다.

그는 제왕의 덕목인 ‘자신을 수양하여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익히기 위해 왕실에서 경연(經筵)시 제왕학 교재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 『한비자(韓非子)』 『손자병법(孫子兵法)』 『육도삼략(六韜三略)』 등 병법서도 익혔다. 특히 그가 경복궁 안에 정자를 만들 정도로 평생 도락(道樂)으로 삼은 낚시는 『육도삼략』 저자인 강태공을 닮은 듯하다. ‘물고기나 곤충, 들짐승 날짐승 사이의 낚시’, ‘사람 사이의 낚시’ 등 생태계의 먹고 먹히는 낚시를 ‘전쟁의 한 형태’로 보고 낚시를 심층 연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병법서를 지은 강태공. 타고난 투쟁가인 이 박사는 정국 구상이나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 전 낚시에 열중했다. 탁월한 권모술수(權謀術數)의 전략 전술은 낚시에서 다듬어진 것으로 유추된다.

‘낚시꾼’ 강태공이 80이 되도록 나이에 지지 않고 큰 꿈을 꾸며, 세월에 굽히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뎌내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리고, 준비한 것처럼 이 박사도 조국의 자주독립과 새 나라 건국이라는 대망을 한시도 잊지 않고, 언젠가 올 조국의 광복(光復)을 기다리며 준비했다. 꽃도 철마다 다르게 피듯, 사람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른 ‘결정적인 순간’이 있듯 각기 다른 시간에 때가 찾아온다. 강태공이 낚시터에서 기다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시간. 강태공은 그 ‘때’를 낚기 위해 무려 70여년의 세월을 기다린 것이다.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 즉 80년은 초야에 묻혀 은거하다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천하를 얻어 영광스럽게 살다 160살에 죽은 강태공의 삶은 초라한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신산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박사에게 위로가 됐다.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강태공이 때를 기다린 것처럼 이 박사의 삶 또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14세부터 과거에 13차례나 응시했으나 부정이 판치던 당시 시험제도 속에서 낙방을 거듭했다. 마침내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등으로 세상이 격변하는 대전환기 속에서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인생에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21살의 유생(儒生) 이승만은 1896년 4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배재학당(培養英材에서 두 글자를 따 고종 작명)에 영어를 배우려고 입학, 뛰어난 실력으로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두각을 드러냈다.

영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영어교재는 물론, 서양 역사·지리 등 원서들까지 암기, 입학 6개월 만에 영어 ‘보조교사’가 되어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년 3개월 만인 1897년 7월, 정동감리교회에서 왕실 인사들과 관리, 각국 외교관, 귀족 자제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Corea)을 주제로 국내 최초로 영어연설을 했다. 당시 청일전쟁(1894년), 명성황후 시해(1895년), 아관파천(1896년) 등 강대국들의 한국 쟁탈전으로 조선의 독립이 위태로워진 위기상황을 분석, 자주독립과 자유 정신은 물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절실함 등 총체적 국가개혁의 절박함을 역설했다. “일본이 왕비를 살해하고 나니 러시아가 국왕을 인질로 잡는구나”라며 비분강개하던 그는 종주국 청나라 패배가 조선 멸망의 시그널임을 간파, ‘조선과 청나라 관계, 청일전쟁과 아관파천 등 국가위기상황’에 대한 경륜을 설파한 우국지사(憂國之士)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이다.

새로운 국가지도자 탄생을 예고하는 극적 이벤트가 된 졸업식 마지막에 ‘독립가’ 노래를 영어로 불러 그는 ‘22살 청년 정치인’을 넘어 당대 최고의 경세가(經世家)이자 웅변가로 이름을 날렸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몸통을 드러낸 용이 들판에 있느니, 훌륭한 영도자를 만나면 이로우니라(見龍在田 利見大人). 즉 ‘때를 만나 물에서 나와 능력을 발휘’하는 ‘현룡’(見龍)이 되었지만 대역죄인으로 ‘사형선고’라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옥 생활, 제왕학(帝王學) 연마의 기회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갑신정변 주역으로 일본에 망명,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서재필과 미·중·일 유학생 윤치호 등이 주도해 1896년 7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한 ‘독립협회’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23세 때인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시위 연사로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 왕정 개혁과 국민계몽 운동을 전개해 개혁파 학생세력의 대표가 된 그는 신세대 리더로 부상했다.

‘제국신문’ 창간부터 5개월간 기자 겸 주필로 활약하던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중추원 의관(조선 최초 의회) 시절 ‘고종 황제는 나이가 많으니까 물러나고,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전단지를 돌리다 박영효(朴泳孝)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황제 폐위 역모 사건’에 연루, 체포됐다. 투옥 중 동료 죄수들의 권유로 고향 후배인 주시경(한글 학자)이 밀반입해준 권총으로 간수를 위협, 탈옥하려다 다시 붙잡혀 사형에 직면했다. 생사를 오가는 절망 속에서 김옥균 암살자이자 보부상을 동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탄압, 정적(政敵)관계였던 홍종우 평리원 판사(고등법원 판사 격: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의 ‘불가사의’한 배려로 사형을 극적으로 모면했다.

24살부터 29살까지 20대의 황금기 5년 7개월(1899년 1월 9일~1904년 8월 9일) 한성감옥(중앙일보 사옥 서편)의 옥중생활은 그의 사상과 학문, 인생관과 세계관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곤궁하게 하여,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게 한다. 그러한 이유는 그 마음의 참을성을 담금질하여 비로소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역량을 키워서 전에는 이룰 수 없던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라”라는 맹자의 명언대로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숙한 그는 감옥살이를 축복이라며 오히려 감사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소설가 이병주는 ‘잠꼬대 같은 말을 쓰기 위해서는 겨울밤은 길어야 한다’면서 제왕학에 대해 이렇게 독백하고 있다. 

“하늘 아래 누구고 황제 아닌 사람이 있을까만 대개의 경우 사람은 감옥 속에 유폐되어서만 스스로가 황제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의 운명을 인류의 운명과 결부시켜 명상하는 황제다운 습성을 익히고, 번거로운 생활의 늪에 분실해 버린 역사상의 자기좌표(自己座標)를 되찾아 황제다운 고독을 오만하게 침묵할 줄 알게 되기 위해서도 사람은 감옥이란 이름의 궁전에 거처를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겨울 밤』 -‘어느 황제의 회상’, 1974, 문학사상)

‘위기가 기회’이듯 ‘왕’이 될 미래의 자신을 위해 제왕학(帝王學)을 철저하게 익히는 고행의 수련 기간으로 작심, ‘황제의 길’이 고난의 역정임을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다짐하며 자신을 달랬다, 국가의 리더로서 국가개조를 ‘라이프워크’ 삼고, 위국헌신(爲國獻身)을 평생의 신념으로 무장하는 고행의 기간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감옥살이 중에도 1901년 1월부터 1903년 4월까지 27개월간 ‘제국신문’ ‘신학월보’ 등에 500여편의 논설과 한시(漢詩) 여러 편을 투고했다. 반정부 혐의로 투옥된 혁명 동지들과 학당을 열어 무지한 재소자들에게 영어와 역사 등을 가르쳤고, 선교사들에게 부탁해 520여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도 개설했다. 감옥이란 공간을 ‘복당(福堂)’으로 치부하며 ‘소규모 왕궁’ 삼아 백성인 죄수들을 교화하고 간수들까지 부리는 치인술(治人術)을 통해 연단(鍊鍛)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독실한 불자인 자당의 ‘예수쟁이만 되지 말아달라’는 신신당부에 “절대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서약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던 그였다. 사형선고를 받아 목에는 무거운 칼이 내리누르고 발은 착고에 끼인 채 두 손은 수갑을 차고, 칼날이 있는 큰 나무판에 팔다리가 전부 꽁꽁 묶여 최고 흉악범으로 무자비한 고문도 받았다. 감옥 안에 몰래 들여온 신문을 어떤 노인 죄수가 읽어 주는데 이승만이 지난밤에 처형되었다는 등, 부친이 이 박사 시신을 찾아 묻으려고 감옥을 찾아 왔다는 등 소문이 흉흉했다.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이 박사는 자신이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신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배재학당 시절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성경을 몰래 들여보내 줘 ‘죄수 한 명은 간수가 오는지 보기 위해 파수를 섰고 한 명은 책장을 넘겨주어 읽던 중’ 갑자기 경험한 ’성령체험’을 이렇게 간증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해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1899년 예수님을 영접한 ‘성령체험’을 하고 난 뒤, 감옥에서 전도와 성경 읽기에 몰두했다. 간수장을 포함, 40여명에게 전도해 ‘예수당’도 조직하고, 중국에서 선교사 겸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앨런(Young J. Allen)과 중국 언론인 채이강(蔡爾康)이 공동 편저해 1897년 전체 18권으로 출판한 『중동전기 본말(中東戰紀本末)』을 발췌·번역한 『중동전기』에 이 박사가 순 한국어로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여 『청일전기』를 집필했다. 잉크는 물감을 풀어 만들고, 종이가 없어 영어신문 여백에 원고를 썼다. 돈이 없어 국내에서 출판을 못 하고, 1917년 미국 하와이 태평양잡지사가 출간했다.

이 박사는 20대에 『청일전기』를 집필하는 동안 “임진왜란보다 더 큰 난리인 청일전쟁으로 조선은 독립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굴욕적으로 반환했다. 일본 열도 전국이 분노로 들끓었고 서구 열강과의 외교 중요성을 절감, 일본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외교활동과 홍보 공세에 총력을 경주했다. 일본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미국 내 유력 신문과 잡지에 근대화된 일본의 실상을 알리는 글을 파상적으로 게재하는 등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홍보전을 더 강화했다. 전후 사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이 박사는 일본이 300여년 전 무력으로 침략한 임진왜란의 실패를 철저히 징비(懲毖)하는 차원에서 ‘조선’을 ‘전쟁이 아닌 외교’로 합병하려는 국가전략으로 전환했음을 간파했다. 이 박사는 ‘외교로 잃은 조선을 외교로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통감, 그의 독립 전략이 외교에 집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한제국 운명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외교 주권을 박탈당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긴 했지만,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이완용 총리대신과 일본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간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라는 ‘한 장의 외교 문서’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이 타이완처럼 군사 침공을 하지 않고도 한일병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연이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대한제국 강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에 외교력을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무렵에 대한제국 강점은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의 외교 사절들을 불러 모아 사전 통보하고 곧바로 양해받을 만큼 간명한 사안이 되어 있었다. 1905년 외교 주권을 상실한 후 대한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외교적 선택들은 정치가 아니라 다분히 운동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일본은 전면적 군사 침략이 아니라, 먼저 외교 주권을 빼앗은 뒤 서구 열강에게 강점을 양해받는 과정을 거쳐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외교, 총성 없는 전쟁”, 김정인)는 지적은 ‘조선이 외교로 망했다’는 사실을 실증한다. 임진왜란처럼 전쟁하지 않고도 외교로 대한제국을 합병한 역사적 경과를 지켜본 이 박사는 총성 없는 전쟁인 외교를 독립운동의 최우선 과제로 확신하고 신념화했다.

이승만은 영어사전 편찬작업을 하던 중 ‘러일전쟁’이 터지자 조선 개화를 위해 국민계몽이 시급하다고 판단,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순 한글로 『독립정신』 저술에 온 힘을 쏟았다. 이 책은 근대 초기의 국민 계몽사상서이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처음 꿈꾸었던 ‘독립국’에 대한 비전을 담은 설계도이자 청사진이다. 1902년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로 하루 17명이 죽는 등 4~5일 동안 60여명이 죽어 나가자 전염병 감염에 두려워 시체 처리를 꺼리는 교도관들과 달리, 시신을 직접 닦고 수습했다. 알고 지내던 선교사 의사들을 총동원, 많은 환자를 살려내 이미 그는 감옥 안에서 무기수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구세주’로 ‘황태자’ 대접을 받았다.

성리학에서 경세제민은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고, 나라를 어떻게 바로잡아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강구한 정치 방법론이다. 응대사령(應對辭令)은 눈앞의 냉엄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성찰한 인간관계학이다. 경세제민과 응대사령을 두 기둥으로 삼고 있는 ‘인간학의 보고(寶庫)’라 할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감옥에서 실습하며 담금질된 그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인물로 성장했다. 치세(治世)의 학문인 유학으로 무장된 한학 실력에 영어가 유창한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6년 가까운 영어(囹圄) 생활을 통해 조선을 대표하는 ‘큰 인물’로 거듭난 것이다.

사망기사가 보도돼 부친이 시신 수습을 위해 세 번이나 감옥을 찾을 정도로 대역죄인이었던 그는 아펜젤러 등 선교사와 ‘인물됨’을 알아본 주변의 끈질긴 구명운동에 힘입어, 무기에서 20년, 10년으로 감형됐다가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으로 감옥에서 풀려난다. 그는 그해 11월 4일 고종의 처조카인 민영환 대신이 추천한 밀사(密使) 자격으로 조선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8월 5일, 이승만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육군장관 주선으로 윤병규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 “1882년에 체결한 ‘조선·미국 약조’에 따라 미국이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달라”고 독립 보존을 청원했다. 루스벨트는 청원이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외교통로를 통해 미국 정부에 제출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의례적인 ‘레토릭’ 수준을 넘어선 ‘기만(欺瞞)’ 행위였다. 이날은 루스벨트가 태프트를 시켜 도쿄에서 ‘태프트 장관·가쓰라(桂太郞) 일본 총리 간’에 ‘한국-필리핀을 나눠 갖기로 합의’한 밀약(7월 29일)을 맺은 지 1주일 뒤였다.

이 밀약은 1924년에야 밝혀졌지만 1904년 일본 정부가 루스벨트와 하버드대 동문인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에 파견, 치밀한 로비로 루스벨트를 일본 편으로 만들었다. 그는 1900년 부통령 당시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 슈테른베르크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이제까지 해온 것으로 보아 일본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밝힌 골수 친일파였다.(제임스 브레들리, 『임페리얼 크루즈(The Imperial Cruise)』, 프리뷰, 2010.8, 216p)

‘대한제국 침탈 비밀외교 100일’을 기록한 『임페리얼 크루즈』에는 루스벨트가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포츠머스조약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첫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았지만, 그가 대한제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아시아 대륙에 대한 영토 확장 계획을 도와주었던 결과 때문에 수십년 뒤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 제32대: 1933∼1945 재임)이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이 불안정한 상태의 일본과 전후 필리핀 군도에 대한 일본의 야심을 우려하던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미국은 일본을 적극 지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는 과정을 착실히 밟아 나간 것이다.

특사 활동이 실패로 끝나자 이 박사는 미국에 머물며 공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혈혈단신으로 건너간 그는 고학 생활을 하며 5년 만에 조지워싱턴대(1907·학사), 하버드대(1908·영문학석사)를 거쳐 프린스턴대(1910·정치학 박사)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을 주제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36세가 된 그는 1910년 한일 합방되던 해 10월 월남 이상재 선생초청으로 귀국, YMCA 강사로 일하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1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 해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한성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도 이 박사를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추대하는 등 국내외 조직들이 항상 대표로 옹립했다. 1925년 좌파들이 장악한 임시정부 의정원이 탄핵할 때까지 수반 자리를 유지했고, 수반에서 물러난 뒤에도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미 외교위 원부 대표직을 맡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중경 임시정부는 1932년 11월 10일 이 박사를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1917년 볼셰비키 소련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자 자신이 발간한 『태평양잡지』(1923년 3월호)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세계 최초의 '반공 논문'에서 세계가 열광하는 공산주의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인류의 꿈을 시현한다는 ‘장대한 실험’인 공산주의가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무시하고 ‘평등’ 한 가지만 빼고 모두 인간의 자유를 박멸하는 ‘최악의 독재체제‘이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독립운동에 분주하던 65세의 이 박사는 1941년 6월 『일본내막기 혹은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를 영문으로 미국 현지에서 출간했다. 일본의 미국 기습침공을 6개월 전에 경고한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미군 해군기지가 일본군에 폭격당하자 이 책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걸쳐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 박사는 한국 최초의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대지:The Good Earth』의 저자 펄벅 여사는 “놀라운 책이며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으나 진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렵다!”고 극찬했다.

20대의 감옥 시절 오늘의 ‘러시아 원형’을 300여년 전 구축한 피터대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 박사는 ‘피터대제가 남긴’ 고명(顧命)을 벤치마킹한 듯 독립운동 시절 그의 정치, 사회, 국가관 등을 압축한 팔조시(八條詩)를 남겼다. 오늘날에도 손색이 없을 국가경영의 대강이 될 그의 경륜은 새롭다.

圖治先在篤交隣 내치와 외교를 병진, 국제협력관계 확고히 하고

臨事當問達變人 무슨 일이든 경륜과 전문성 있는 이와 숙의하라

憂國戒存孤立勢 국제적 고립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나라 걱정하고

導民務作自由身 국민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쓰라

法僞恐後無泥舊 후일이 두렵다고 거짓을 일삼아 옛것을 더럽히지 말고

從善爭前寞厭新 앞을 다투어 좋은 것 따르되 혁신을 주저치 말라

敎育俊英今最急 우수한 인재교육은 가장 시급히 서둘러야 하고

養兵唯止壓邊塵 국군병력 유지 규모는 자주 수호에 알맞게 하라


미국 참전으로 수백만명이 전사하는 공방이 벌어진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2년 6월 13일 이 박사는 라디오 방송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있다”는 내용을 한반도에 전했다. 이 소식은 입에서 입을 통해 국민에게 널리 퍼졌고 이를 계기로 이 박사는 폭발적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 박사는 그해 10월 16일, 김구와 상하이 임시정부 사람들은 11월 23일 귀국했다. 이 박사 나이 만 70세 때였다.

반공포로 석방 승부로 얻어낸 ‘한미동맹’

이 박사는 미국에서 조선 독립에 우호적이었던 그의 장인 소개로 국방성에 근무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소령(1880년 1월 2일~1964년 4월 5일)과 인연을 맺었다. 30여년 우정을 나눈 친구 맥아더는 대한민국 건국과 6·25 때 이 박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공병 소위 임관, 38세 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육사 교장을 지낸 맥아더는 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의 미국인 황제’, ‘태평양의 황제’로 불리던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깊은 신뢰 속에 그의 부하인 하지 군정사령관을 부하처럼 부리며 찬탁 반탁 등 고비마다 휘몰아치던 격랑을 해치며 대한민국을 세웠다. 예수님의 “너희는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우라”라는 말대로 뱀 같은 남다른 지략(智略)으로 빈틈없는 전략(戰略) 전술(戰術)을 구사해 혼란정국을 헤쳐나간 것이다.

집권 1년여 만에 일어난 6·25 전쟁을 거치며 이 박사는 냉전시대의 국제 정세에 대한 혜안을 갖춘 통찰력으로 확고한 반소·반공 정책을 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초석을 다졌다. 외교에 귀신(鬼神), 내정에 등신(고 김상협 고대 총장 인물평), 인사에 병신 등 삼신(三神) 대통령으로 회자된 이 대통령은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을 시행, 초등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문맹률이 80%에서 10년 만에 22%로 낮아졌으며, 2만5000여명의 국비 장학생을 길러냈다.

헌법 제121조에 경자유전의 원칙(耕者有田-原則, Land to the Tiller)을 명기,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땅을 매입하여 유상으로 농민에게 배분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1956년에 이 박사 지시로, 원자력연구소 설립 등 과학 입국의 기초도 마련했다. 한반도 주변 4대 강국 중 지정학적으로 영토적 야심이 없는 해양세력인 미국 편에 줄을 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대한민국 안보 초석을 다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는 전략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대담한 발상으로 강대국 대통령을 어르고, 달래며 ‘한미동맹’을 이끌어냈다.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완강히 휴전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힘겹게 탄생한 조약이다. 6・25전쟁 37개월 동안 170만명의 참전, 전사 3만3629명(최근 3만3870으로 수정), 부상 10만3384명, 실종 및 포로 5000명 이상의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2년 가까이 지속된 막판 휴전협상을 파탄위기로 몰고 간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지루하게 협상해온 휴전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연합국 측이나 스탈린의 죽음으로 맥이 빠져 있었던 공산 측 양쪽 모두에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에 거제, 광주, 군산 등지에 수용되었던 반공포로 2만5000여명이 한국군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민가로 숨어들었다. 미국은 한국의 독단적 행동에 크게 경악, 격분했으며, 공산 측은 당연히 미국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대통령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모두 휴전을 원하던 상황에서, 국익 및 인도주의 명분에 부합하는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상대로,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혼자서라도 북쪽의 김일성 군대와 중공군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북진통일’ 의지를 거듭 표명,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어르고, 달래는 노회(老獪)한 외교술로 한미동맹을 이끌어냈다.

혼자 거대한 미국을 상대로 외롭게 투쟁한 약소국 지도자의 외교 책략으로 모든 과정이 치밀하게 계산된 이 박사의 끈질긴 승부사적 기질이 빚어낸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벼랑 끝 전술은 세계 지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영국 총리 처칠은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떨어뜨렸고, 극단적인 용어로 이 박사를 비난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대통령 재임 8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건 그때가 유일했다”라고 했다. 심지어 중공 대표 오수권(伍修權)은 적국인 미국과 힘을 합쳐 이 박사를 고립시켜야 한다고까지 했다.

전 세계를 경악시킨 충격적인 이 사건을 통해 이 박사를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예측 불가능의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다. 반공포로석방에서 휴전 조인까지의 약 한 달간이야말로 외교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쟁취해낸 극적인 순간이었다. 외교책략가 이 박사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미국의 반공 전초기지로서 자유 세계의 사활적 중요지점임을 환기, ‘휴전에 동의해 주는 조건’만으로 미국 정부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 한미동맹 체결 및 경제 원조와 무기지원 요구를 이끌어 낸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 그의 공과(功過) 재평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은 한편의 거대한 대하 드라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고, 5월 10일 치러진 선거 결과 서울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출마한 이 박사를 비롯, 모두 198명이 당선되어 제헌의회가 개원했다. 곧이어 7월 20일 국회에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180표를 획득, 16표를 얻은 한국독립당 김구 후보를 제치고 그해 7월 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귀국 3년 만인 73세에 그가 온 천하의 괄시 속에서 명함에 새기고 다니며 열망했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새 통치이념으로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내세웠다.

이후 직선제로 바뀐 2대(1952), 3대(1956년) 대통령 선거에 연이어 당선, 85세까지 12년 동안 집권했다. 하지만 6·25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췌 개헌, 이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헌정을 유린하며 장기집권을 위한 과오를 저질렀다. 6·25전쟁 후 대선에서 이 박사에 맞선 조봉암 신익희 조병옥 모두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했다. 2대 대선에서 조봉암(1899~1959)은 자유당 시대 국부(國父)로 추앙받던 이 대통령의 첫 대항마였다. 3대 대선에도 출마해 패배한 그는 1959년 7월 31일 61세에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는 50여년이 흐른 2011년 대법원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실정법에서는 유죄지만 역사 법정에서는 무죄였다.

3대 대선에서 이 박사에 맞선 신익희(1892~1956)는 당시 서울 유권자 70만여명 중 절반가량인 30만여명의 인파가 모였다는 한강 백사장 연설 등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심으로 압도적 정권교체 열망을 한 몸에 받았지만, 대선을 불과 열흘 앞두고 심장마비로 영면했다. 3·15 부정선거가 치러진 1960년 조병옥(1894~1960) 대통령 후보는 출마 중 갑작스러운 신병으로 치료를 위해 도미(渡美)했다가 불과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 워싱턴의 육군병원에서 급서(急逝)했다.

민주 공화정 시대지만 ‘왕’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절대권력자가 된 이 박사의 정적들이 결정적 시기에 극적으로 사라지자 지지자들은 ‘하늘이 낸 분’이라고 아첨을 떨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구대로 80대의 노쇠한 ‘왕’이 된 그의 측근들의 과잉 충성은 금도를 넘었다. 73세에 등극해 85세까지 12년 동안 장기집권한 그는 부패한 측근들에 의해 저질러진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가 4·19 혁명으로 드러나 책임지고 하야(下野)했다. ‘청빈한 대통령’이었던 그는 망명지 하와이에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채 ‘비행기 삯’으로 쓴다며 방문객들이 가져온 돈을 침대 밑에 보관하며 귀국을 기다렸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거부로 귀국을 못 한 채 1965년 90세에 쓸쓸하게 자기가 ‘왕’으로 있던 ‘꿈에도 잊지 못한 나라’ 조국 대한민국에 주검으로 돌아와 가족장으로 영면했다.

‘후손들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며 이 박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성사시킨 ‘한미동맹’으로 대한민국은 전쟁 없이 70년 동안 국민소득 60달러 수준의 최빈국 이름 없는 나라가 세계 200여 국가 가운데 10대 강국반열에 올랐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한 인간으로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 훼절하지 않고 70평생을 바친 ‘시인 정치가’이자 언론인, 웅변가, 혁명가, 병법가, 선동가, 외교가, 낚시꾼 등으로 위대한 일생을 살았다. 극과 극의 평판 속에 진영논리에 매몰된 평가로 훼예포폄은 끝이 없어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 없다. 유방백세가 아니라 ‘유취만년(遺臭萬年)’의 블랙 이미지가 더 강하다.

지난 4월 19일,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를 외친 4·19혁명 원로들은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면서 “비록 과오는 있었지만 이 전 대통령의 공로를 외면할 수 없다”며 “지도자의 피할 수 없는 공과 과로 늦게나마 그의 공에 대해 상응한 평가와 대우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냈다.

중공 문화혁명 최대 피해자인 등소평(鄧小平:1904~1997)은 집권 후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수십 차례 논의를 거친 ‘역사적 결의’로 모택동을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했다. 즉 과오보다는 공이 많다는 논리를 내세워 “모(毛)의 과오에는 내 과오도 있다. 그 과오는 내가 앞장서서 바로잡아 나가겠다”고 감싸 자칫 격하 운동으로 중공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구출했다. 즉 모의 혁명이념과 중국 건국에 대해서는 그 공이 70%이고, 문화혁명을 일으켜 홍위병을 동원하여 수많은 탄압과 숙청을 일으킨 과오를 30%라 평가한 것이다. 등은 모가 일으킨 문화혁명은 중국의 역사를 약 30년 이상 후퇴시킨 씻을 수 없는 잘못임이 분명하지만, 그를 독재자니 피의 숙청자니 하는 평가는 결국 중국의 국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니만큼 나라의 장래를 봐서라도 지나친 격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3번이나 하방되고, 아들을 문화혁명 광풍 속에서 불구로 만든 모(毛)였지만 ‘위대한 인물도 완전무결하지는 않다. 멀리서 봤을 때는 거의 신과 같이 보이는 존재도 가까이 가보면 불완전한 인간’이듯 정치보복을 끊어낸 등소평의 결단이 오늘의 중국을 만든 밑거름이 된 것이다.

‘울음의 왕’이었던 그는 1902년 6월 11일, 27살이던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성서 번역 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로 배가 침몰할 때 구명조끼를 옆의 청년에게 양보하고 마흔네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배재학당 사부(師父) 아펜젤러 소식을 듣고 하루 반 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미국에 밀사로 보내고,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 단식하다가 자결한 민영환(1861~1905)의 부음을 듣고 사흘 동안을 울었다고 전한다.(자결 8개월 후 피 묻은 옷이 있었던 방에 血竹이라 부르는 청죽이 솟아올라 ‘피의 충군애국’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65년 7월 21일 오후 4시 30분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기독교회에서 진행된 영결식장에 이 박사가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로 갈 때 여비가 부족해 중국인 노동자들의 관을 실은 배를 이용하여 밀항시켜준 50년 친구 윌리엄 보스위크가 고인의 관을 붙들고 ‘마른 눈물’을 감춘 채 ‘울음의 왕’을 마지막 떠나보내며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 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소중한 친구여.”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이켜보면, 한평생 노심초사하며 우리 민족의 번영과 자유의 초석을 깔았던 이 박사에 대한 예우(禮遇)에 한국인은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
    서울연합뉴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여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장과 함께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2023719 국가보훈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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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7월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여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장과 함께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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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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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던 백범" 등등....
    진실과 다른 부분도 있는 듯 합니다.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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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내용은 이승만 평전이라 할 만큼 국부 이승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기고이며, 이를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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