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 아방강역고-3]일제가 10리를 4㎞로 축소 조작한 까닭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입력 : 2020-09-18 07:00
대한영토 '사천리'를 '삼천리'로 축소 조작한 일제 10리 거리 5㎞→4㎞로 축소 조작한 일제 중국 역대 1리 거리 변화 일제가 대한 영토를 2중 축소 조작한 까닭은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대한영토 '사천리'를 '삼천리'로 축소 조작한 일제

노래의 힘이 헌법보다 강하다. 우리나라 국민의 국토관을 대한의 고유 영토 4천리에서 3천리로 축소하게 한 원흉은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한 헌법 제3조가 아니라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후렴의 무한 반복 학습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사고전서』 등 조선 시대와 중국의 명·청(明·淸) 시대 거의 모든 문헌에는 우리나라의 강역이 ‘삼천리’가 아닌 ‘사천리’로 표기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① 선조 26년(1593년) 6월 29일, 조선 국토의 넓이는 동서로 이천리 남북으로 사천리(朝鮮幅圓,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② 고종3 4年(1897 년) 9월 29일: 육지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③ 고종 34년(1897년) 9월 30일: 우리 영토의 넓이는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다스리는 나라(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④ 고종 34년(1897년) 10월 13일: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중국의 명·청(1368~1910) 시대 대표 총서·사서·지리지·지도들에도 조선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로 기록돼 있다. ①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② 『함빈록(咸賓錄)』 ③ 『황명경세문(皇明經世文)』 ④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⑤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⑥ 『대청만년일통지리전도(大清万年一統地理全圖)』 ⑦ 『사고전서(四庫全書)』 「조선부(朝鮮賦)」 ⑧ 『사고전서』 「외사이관고총서(外四夷館 考總敍)」 ⑨ 『사 고전서』 「조선도설(朝鮮圖說)」 ⑩ 『광여도전서(廣輿圖全書)』 등

반면, ‘삼천리’는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부터 일본의 강압에 의한 강화도조약 체결 1876년 이전까지 한국의 영토범위로 쓰인 적이 단 한번도 없을 뿐더러 조선 시대 최악의 유배 형벌 용어였다.

1876년부터 ‘삼천리’는 ‘삼천리 유배형’에서 ‘삼천리 강토’로 둔갑해갔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윤치호(1865~1945년, 애국가 작사자, 일본 제국의회 귀족의원 역임) 등을 비롯한 종일매국노들은 물론 일제의 흉계를 알 수 없는 송병선(1836~1905년) 같은 순국지사들도 자주 삼천리 강토를 입에 올렸다. 특히 윤치호는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

고종황제는 국토를 ‘사천리’라 하는데 신하는 천리나 참절한 ‘삼천리’라 하다니. 윤치호가 얼마나 ‘삼천리’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 ‘윤치호’와 ‘삼천리’가 「고종실록」 3회, 『승정원일기』 3회 모두 여섯 차례나 등장한다.

‘사천리 금수강산’에서 천리나 국토를 참절한 ‘삼천리 강토’ 그 추악한 변신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종일매국노의 선구자 격인 일진회장 이용구가 발표한 <일한 합방 성명서>(1909년 12월 4일)에서다. 윤치호가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 추도위원장을 역임할 무렵 그가 작사한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가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10리 거리 5㎞→4㎞로 축소 조작한 일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경기 아리랑 1절>

가장 보편적이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아리랑이다. 흔히들 대한민국 대표민요 아리랑을 문제 많은 ‘애국가’를 대체할 새 국가 후보 1순위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서 10리는 몇 ㎞까? 4㎞쯤으로 알고 있다. 국민상식이다. 그럼 조선시대에 10리는 현재 몇 km인가?

현존하는 조선시대 후기 자의 길이를 mm 단위까지 측정 후 1리(里)로 환산하면 약 459m다(대한지리학회지 2018).(1)*

현재 사용되고 있는 1리 거리는 대한제국 1905년(광무 9) 때 제정된 도량형 규칙에 의한 길이로 392.7m이다. (『고종실록』 제45권, 고종 42년 3월 21일 2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이는 일본이 1886년 미터법에 가입한 후 1891년 제정하고 1893년 시행한 도량형법(度量衡法)에 따라 길이 30.303㎝인 곡척(曲尺)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2)*

1905년 이전의 우리나라 1리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됐을까?

중국의 도량형을 도입하여 차용하였다. 고려시대까지 주로 주나라 1리를 약 300보(약 498m)를 차용하였다. 조선조에는 명청시대 1리 360보 (약 567m)를 1리의 기준을 차용했다.

◆중국 역대 1리 거리 변화

*주周대 1里= 300보= 300 X 8척 = 300 X 8 X 19.496cm =497.9m
*당唐대 1里= 360보= 360 X 5척 =360 X 5 X 29.591cm = 532.6m
*명明대 1里= 360보= 360 X 5척 = 360 X 5 X 32cm = 576m
*청淸대 1里= 360보= 360 X 5척 = 360 X 5 X 32cm = 576m
*1929년 이후 현재 중국 1리=500m

“지금 중국 조정(명 나라)(3)*의 이수(里數)에 준하여 주척(周尺)을 사용하고, 6척(으로 1보를 삼고 매 3백 60보로 1리(里)를 삼는다.”- 태종실록』 제30권, 1415년 태종 15년 12월14일(정축)(4)*

태종 임금이 1425년 정한 이수里數가 1905년 대한제국 고종황제까지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었다(조선왕조실록 78회 출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 후기 1리=주척6척×360보. =주척2,160척. =20.8㎝×2,160=449.3m.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2018년 김현종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의 “『大東地志』 「程里考」에 기반한 조선후기의 1리(里)” 대한지리학회지 제53권 제4호 2018(501~522쪽)은 조선후기 리(里)의 거리를 역사지리정보시스템(HGIS)을 이용해 계산하고 1리 거리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전국의 1리 거리는 약 459m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종전의 449.3m설을 보다 더 정확하게 산정한 것으로 학계에서 공인받고 있다.

구한말 이전 우리나라 10리 거리는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대한지리학회의 4.59㎞나 조선왕조실록의 5.67㎞나 현대의 10리 3.927㎞보다 훨씬 길다. 전자를 기준으로 15%, 후자를 기준으로 30%, 전자와 후자 1리 단위 중간치를 5㎞로 산정한다면 약 20%을 축소당했다. 

즉 일제는 대한영토 사천리를 삼천리로 25% 축소한 것도 모자라 거기에서 다시 10리 거리 단위 5㎞를 4㎞로 다시 20% 축소, 대한 고유 영토의 40%를 축소해버렸다.

◆10리 미터 환산

1905년 이후 현대까지 :3.927㎞ (조선통감부 조선총독부)
1905년 이전 조선시대 :4.59㎞ (대한지리학회·한국학중앙연구원)~5.67㎞(조선왕조실록)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사천리를 삼천리로 축소한 종일매국노는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작사자겸 무궁화 도입자 윤치호라면 10리를 5㎞에서 4㎞로 축소한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종일매국노는 누구일까?

이재완(李載完, 1855~1922년)으로 종일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 백작보다 높은 작위 후작을 받은 친일인명사진 등재인물이다.(5)* 

이재완은 1897년(광무 원년)에 한성은행의 창립을 주관했다. 1902년 10월 10일, 이재완은 “도량형은 물건을 헤아리는 표준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믿는 것으로써 사민의 학문과 기술, 한 나라의 문명과 부강은 모두 이를 통하여 발전합니다. 지금 외국(일본)과 좋은 관계를 맺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고, 통상 무역이 나날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그 제도를 바로잡아서 외국(일본)의 것과 대략 같게 만들지 않으면 상업 권위와 공적인 이익에 대해 피해를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1902년(고종 39년) 10월 10일 「고종실록』에 나와있다. 

이재완은 1903년 3월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밀명을 받은 일본공사관 소속 무관과 밀의해 경의철도 부설에 관한 각서를 교환했다.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추천으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임명되었고, 영남지역의 철도 지선도 일본이 부설할 수 있도록 권리를 넘겼다.

이재완은 1905년(광무 9년) 1월에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2월에 귀국하였다. 3월 21일 드디어 도량형법을 비준해 반포하게끔 하였다.

이재완은 1910년 10월 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며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에 봉작됐고, 은사공채 33만,000엔을 하사받았다.

◆일제가 대한 영토를 2중 축소 조작한 까닭은

일제가 10리 거리 단위마저 원래의 4.59~5.67㎞에서 3.93㎞로 단축한 까닭은 무엇일까?

일제는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윤치호 등 종일매국노를 통해 대한영토 삼천리로 날조 유포하고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후렴으로 반복 주입시켜 한국민의 영토관을 사천리를 삼천리로 축소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축소 날조된 삼천리조차도 기존의 거리단위 10리를 4.59~5.67㎞로 측정할 경우 가깝게는 만주의 흑룡강성 중심도시 하얼빈(지도2), 멀게는 흑룡강성 북부의 치치하얼까지(지도3)
여전히 한국영토로 속하게 되는 난관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일제는 이런 모략을 획책하여 종일매국노 이재완등을 시켜 기존의 10리 거리마저 일본도량형법기준을 도입 4킬로미터 축소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일제는 사천리에서 삼천리로 축소, 거리단위마저 5㎞에서 4㎞로 축소, 2중의 축소 조작을 통해 대한의 영토관에서 만주를 완전히 분리해내어 한민족의 시공을 한반도내로 축소해 내는데 성공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언제나 일본제국주의자와 종일매국노만을 탓하는데 어찌 그들만의 잘못인가?  일제보다 10배 나쁜 자들은 옛 종일매국노이고 그들보다 100배 나쁘거나 멍청한 자들은 현재 대한민국 위정자와 우리 국민들이다. 네 탓이나 그들 탓이 아닌 내 탓이자 우리 탓이다.

◆◇◆◇◆◇◆◇각주

(1)*김현종, 『大東地志』 「程里考」에 기반한 조선후기의 1리(里) 대한지리학회지 제53권 제4호 2018(501~522쪽) 요약: 본 연구는 김정호가 저술한 『대동지지』 「정리고」를 바탕으로 조선후기 리(里)의 거리를 역사지리정보시스템(HGIS)을 이용해 계산하고 1리 거리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대동지지』 「정리고」는 모두 1,459개의 구간으로 구성되며, 이 중 경유지와 경로의 비정 정확도가 높은 1,244개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했다. 각 경유지와 경로는 노드링크(node-link)모델에 근거하여 공간정보 레이어로 구축하였다. 『대동지지』 「정리고」의 전체 리수는24,620리이며 전체 거리는 약 11,289km이다. 전국의 1리 거리는 약 459m이다

(2)*小泉袈裟勝, 『歴史の中の単位』, 総合科学出版,1974년.

(3)*里作为长度单位,《大戴礼记》:“三百步为里”,《度地论》说:“三百弓为一里”。周代制度六尺为步,里是一百八十丈:唐以后五尺为步,直至宋、明,里都是三百六十步,也是等于一百八十丈。清代规定里是长度系统中的单位,它的长度也定为一百八十丈。
里作为地积单位,叫做平方里,到清代,称为方里。周代制度是一井等于一平方里,合九百亩;唐以后,五尺为一步,一平方里合五百四十亩。一平方里同一亩的比较数,清《数理精蕴》就有“方里,积五百四十亩”的记载。

(4)*『續大典』,工典, 橋路, 八道路程; 『大典會通』, 工典, 橋路, 八道路 程; “팔도의 도로는 주척을 사용하고, 1보는 6척, 1리는360보, 1식은 30리” 기준에 근거에 계산했다.

(5)*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3』, 109-111쪽

◆◇◆◇◆◇◆◇주요 참조 문헌

-김현종 “『大東地志』 「程里考」에 기반한 조선후기의 1리(里)” 대한지리학회지 제53권 제4호 2018)”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고종실록」
-『대전회통』, 『속대전』, 『大戴礼记」, 『数理精蕴』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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