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93]경작농에게 소유 부지 무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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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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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93)

  • 제5장 재계활동 - (88) 덕망(德望)의 승리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자를 낸 정당은 여야(與野)를 합하여 도합 12개 정당이나 되었다. 공화·민정·민주·자유민주·국민의당 및 보수·자유·국민당, 추풍회와 신구·신민 및 한독당 등이 그것으로 11대 1의 난립상이었고 선거부별로 보아도 평균 5.7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보인 것이다. 무소속 출마 금지와 선거구의 대폭 축소도 원인이었지만, 4·19 이후 국민들의 사회참여 의욕이 왕성해진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입후보자의 난립은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켜 숱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영천 지구는 공화당 후보인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지킨 선거도의(選擧道議)로 모범선거를 치를 수 있었고 목당은 인격자로 인정을 받아 차점자(次點者)와 1만5000여표 차이로 압승을 거두었다.

지구당 사무국은 법정 선거운동비만 가지고 운동을 하려니 힘겨웠지만 운동원들은 목당의 간곡한 부탁을 어길 수가 없었다. 유권자들은 목당으로부터 돈으로 치르는 부패선거(腐敗選擧)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들었으므로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부정으로 당선되고 싶지 않다는 신념으로 선거에 임하고 있는 목당을 눈여겨 본 유권자들은 새삼 그의 인격을 평가하고 있었다.

지난 7·29 선거 때의 일이다. 김을 매던 노인이 목당이 탄 선거용 지프를 보고는 지게를 짊어진 채 길가로 나와선 차를 세우고 태워 달라고 하여 선거운동원이 거절하자 “이놈, 이활 찍어주나 봐라!”하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입후보자들의 지나친 저자세(低姿勢) 운동이 저질러 놓은 병폐의 한 풍경이었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긍지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목당으로선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은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 선거를 치르면서 영천의 유권자들은 목당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사랑방 좌담을 통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의회정치(議會政治)를 말하고 경제입국(經濟立國)을 설파하는 목당의 이야기는 유권자들에게 참지식이었고 모범이 되었다. 목당의 당선은 덕망(德望)의 승리였다. 목당은 당선이 확정되자 운동원을 풀었다.

목당가는 토지개혁 때 소작경지(小作耕地)를 모두 정부에 내놓았고, 그 땅은 정부에 의해 경작자(耕作者)의 소유로 되었었다. 그런데 워낙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는 땅이어서 한 두 마지기의 자투리땅은 정부수매(政府收買)에서도 누락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들 땅은 현재까지 목당가의 소유로 되어 있는 채 경작자들이 농사를 지어 왔다. 등기이전(登記移轉)이 안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었다.

목당은 이들 농가(農家)들을 위해 소유권 말소 조치를 취해 주기로 하였다. 운동원들을 푼 것은 그런 땅을 경작하고 있는 농가들을 조사하여 땅 문서를 가지고 와서 수속을 밟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운동원들은 그의 그런 조치에 새삼 놀랐다. 그리고 소유권(所有權) 말소를 받아 가는 농민 또한 목당의 그런 조치에 감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제6대 국회는 12월 17일 개원(開院)하였다. 선거 결과는 공화당이 원내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야당의 참패가 증명됐다.

공화당(共和黨)        지역구(地域區)  88석   전국(全國)  22석
민정당(民政黨)       〃                   27〃   〃            14〃
민주당(民主黨)       〃                    8〃    〃             5〃
자유민주(自由民主) 〃                    6〃    〃             3〃
국민의당              〃                    2〃    〃             2〃

원내(院內) 교섭단체는 10석 이상이어야만 등록이 가능했으므로 공화당과 민정당·민주당만이 교섭단체 등록이 가능했는데 민주당은 단독으로 등록하지 않고 자민당과 국민의당을 규합하여 삼민회(三民會)로 등록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회 개원에 앞서 16일 하오 2시, 스스로 해산을 결의했으므로 국회 개원과 동시에 개정헌법(改正憲法)은 발동된 것이다. 이날 하오 3시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됨으로써 군사통치(軍事統治)는 그 막을 내리고 헌정(憲政)의 면모를 갖춘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날 국회는 공화당의 이효상(李孝祥) 의원을 의장(議長)으로 선출하고 부의장(副議長) 2석 가운데 1석을 공화당 장형순(張炯淳)에서 나머지 1석은 제1야당인 민정당(나용균(羅容均))에서 각각 선출하였다. 그리고 12개 상임위원장 선정은 22일에 있었는데 공화당이 독점하였으며, 목당은 상공분과위원회에 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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