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 경희대학교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9월 30일 일방적으로 우리의 알래스카 가스관 투자를 선언했다. 정부의 반응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선언이 미국의 경제 안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당한 느낌이 들까. 경제 안보 시대에서 두 개의 전 정부와 현 정부가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췄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관련 부처에 경제 안보를 전담하는 부서까지 신설했다. 그럼에도 정부의 대응 모습은 납득하기 어렵다. 작년 8월 투자에 이미 합의했다. 그 내용을 사전에 가늠하지 못하고 트럼프의 발표에 ‘상업적 합리성’을 검토 중이라며 미확정이라는 소극적인 정부의 대답에 국민으로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혈세가 장기간 한 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에선 미국의 경제 안보 정책의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제 안보 정책은 트럼프 1기 때부터 지금까지 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경제 및 통상 전반의 이슈를 경제 안보의 프레임에서 추진됐다. 오늘날 미국이 추진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외자 유치와 해외 미국 기업의 본국 회귀 등이 이런 경제 안보 개념에 근간한다. 그는 2기 취임 직후인 2025년 1월 20일에 ‘미국 우선 무역 정책’을 위한 전수 조사를 지시(presidential memorandum)했고 4월에 관련 부처들이 정책 건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핵심 내용은 다자와 양자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발생한 불공정한 교역 상황,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한 상호주의 관세, 중국의 무역 합의서 이행 및 미국의 수출 규제 상황 등의 전수 조사 등이었다. 적용 대상은 우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이 취한 정책적 조치는 다양하다. 상호주의 관세 부과뿐 아니라 미국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차별 해소, 해외 기업과 외국 정부의 투자 유치, 자국 기업의 귀환(reshoring) 또는 우방으로의 이전(friend shoring), FTA의 개정, 미국의 경제 안보 수호를 위한 해외 수출 규제 강화 등이다. 트럼프는 이런 명분으로 우방도 거침없이 압박했다. 미국의 경제 안보 강화와 국가적 비상 상황 해소가 이유였다. 전자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미국의 경쟁력 증강을 위한 적극적인 해외 투자 유치가 핵심이다. 특히 4차 산업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첨단 과학기술 산업(반도체, 이차전지 등)의 생산 공장을 미국 내에 건설을 촉구하는 법(2022년의 인플레이션감축법과 반도체법 등)을 제정하고 실효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경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기업과 기업인의 과학기술 산업에 대한 해외 투자 및 수출 등이 핵심 규제 내용이다.
기존의 법 동원과 새로운 법의 제정, 그리고 상호주의 관세와 과학기술 제품의 해외 수출 및 투자 규제 등 다양한 압박 수단을 동원하면서 미국은 자국 내 첨단 과학기술의 산업 기반을 닦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제 미국의 경제 안보의 초점은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을 수반하는 데 중요한 자원의 공급망 구축으로 이전됐다. 특히 에너지 자원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감축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미국 알래스카주의 가스관 건설을 위한 투자 유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밖에 원자력 발전소와 발전소 건설도 적극 추진 중이다. 4차 산업의 핵심 자원인 희토류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국내 개발·생산뿐 아니라 해외 공급망도 재편하는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우리의 대미 투자를 연신 압박했다. 이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와 반도체법 등으로 우리의 관련 기업은 미국 내 투자를 진행한 바 있다. 이차전지 생산 공장은 이미 가동된 지 오래고, 자동차 공장은 추가 건설 중이다. 반도체 공장은 지난 8월에 착공식(SK하이닉스)을 가졌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를 또 압박했다. 미국의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변화는 정책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 결과 작년 8월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3500억 달러 장기 투자 합의가 이뤄졌다. 이 중 2000억 달러가 10년간 연 200억 달러의 현금 투자 명목이다. 1500억 달러는 미국과 조선 협력을 위한 우리의 투자분이다. 이밖에 알래스카의 액화천연가스(LNG)를 1000억 달러어치 구매하는 데도 동의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투자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다. 알려지기로는 반도체, 원전, 이차전지, 바이오(의약품), 에너지 등의 분야에 대한 투자였다. 그런데 지난 9월 30일 트럼프는 구체적인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알래스카주의 LNG 가스관, 텍사스주의 6기가와트급의 발전 시설과 함께 원자력 발전소 2기의 건설 사업이었다. 10월 2일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서 한국이 ‘원유 회수 증진(EOR)’ 프로젝트에 84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한다고 알렸다. 우리 정부는 이에 ‘상업적 합리성’을 검토 중이라며 미확정 사업으로 일축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개탄스러운 점은 미국의 ‘일방적’인 주문에 정부가 끌려가는 모습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국 정부의 경제 안보 정책과 국가적 상황을 감지라도 했으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정책 흐름과 그 취지와 목적을 사전에 간파했으면 이런 일방적인 발표에 당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트럼프 1기, 바이든 시기와 트럼프 2기로 이어지는 일관성과 지속성을 가진 미국의 경제 안보와 국내외 안보 인식을 분석하는 데 소홀했다. 이 기간 우리 정부도 바뀌었으나 동일한 과오를 저지른 책망을 피하기 어렵다. 이들의 공통된 책임에는 경제 안보 개념의 부재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조직을 관련 부처 내에 설립했지만 그 효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책무는 임기응변에 집중되어 보인다.
경제 안보는 경제와 안보를 접목해서 봐야 하는 개념이고 지경학의 논리에 근간한다. 그래서 이 세 개념의 상호작용과 연관성, 연계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경제에 안보를 접목하면, 안보는 불편하거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모든 변화를 피하는 의미로 확장된다. 세계 시장에 대한 경제 개방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 경제 안보를 이용한다. 가령, 식량 안보는 농업 보호를 위해 제기되어 온 강력한 논거였다. 경제 안보가 다시 한번 자급자족이라는 과거의 의미에 가까워짐에 따라, 국내외 시장 모두에서 적절한 식량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적 전략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처럼 경제 안보가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비록 두 나라 모두 번영이 증대되더라도 한 나라의 이득(우위)이 다른 나라의 손실(종속)을 상쇄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내재적 함정을 함유함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루트왁(Edward Luttwak)은 이런 의미에서 지경학을 상업적 수단으로 적대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즉, 국가 안보는 이 같은 경제 전쟁에서 승리를 뜻한다.
경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세계화와 상호 의존의 병폐 극복을 전제한다. 국경 없는 세상에서 에너지 자원과 희귀 광물 및 특수 기술의 공급망 안보 확보, 그리고 이중 용도 기술의 규제 등은 최대의 당면 과제이다. 이를 예방하는 명분으로 세계화 시대에 중상주의적 무역 정책이 부활하는 씁쓸한 시대가 개진되는 중이다.
중상주의 대응책은 ‘공급의 안보’ 정책으로 이어지는 전통이 있다. 자원에 집중한 탓이다. 오늘날 석유와 같은 에너지원뿐 아니라 희귀 광물 및 특수 기술의 공급망 안보 문제가 조명받는 이유다. 이들의 불안한 공급은 경제적 취약성을 심화시켜 군사력과 무기의 투사 능력을 상대적으로 약화할 수 있는 논리가 복선에 깔려 있다. 그래서 경제적 대응이 필요하고 그 결과로 양산된 개념이 ‘지경학(geo-economics)’이다. 지경학의 프레임에서 경제 안보도 ‘승리’를 위한 ‘제로섬’ 게임과 같은 논리적 동기에서 발현되었다.
종합하면, 미국의 경제 안보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선 ‘지피지기’가 전제된다. 의도와 목적, 목표가 선명해 보여도 미국이 당면한 내부적 구조 문제를 보면 해결이 쉽지 않다. 알래스카는 에너지자원 보고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이 아직 개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내법, 국가환경정책법(NEPA) 때문이다. 연방 기관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추진하려는 주요 조치들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도록 의무화를 요구하는 1970년에 제정된 법이다. 역사적으로 미 의회가 알래스카주의 에너지 자원 개발 사업을 거의 비준하지 못한 근거이다. 트럼프는 이를 해결하려 한다. 선제적인 해결 없이 그는 우리에게 540억 달러라는 전체 예상 개발비를 청구했다. 오는 11월 3일 중간선거를 목전에 두고 알래스카에 그가 공들이는 이유다. 무관하게 공화당의 패배는 알래스카 개발 사업을 무력화할 것이다.
NEPA법과 중간선거는 우리의 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트럼프에게 더 호탕하게 대응했어야 한다. 가스관에 540억 달러가 아닌 2000억, 3000억 달러도 투자할 배포를 보였어야 한다. 무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미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소극적이다 못해 막대한 투자에 비해 얻은 것이 없어 보인다. 투자 이익 환수분도 우리에게 불리하게 설정됐다. 우리의 청구 리스트는 길 수 있다. 몇 개만 꼽으면 군사 및 과학기술 이전의 규제 완화, 미 군함의 국내 건조 및 유지보수 허용 및 관련 방어망 구축, 관세 인하, 핵농축 문제와 비자 등 우리 국민과 교민에 관한 영사 문제의 해결, LNG 50년 장기간 동일 가격 공급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우리의 청구서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 것만 보이는 현실에 우리의 혈세가 일방적으로 유출되어야 하는 상황에 국민으로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웨슬리언대 정치학 학사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석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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