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가운데 대한민국이 있다. 미국은 우리의 핵심 안보동맹국이며 중국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경제적 이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대만해협의 긴장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한때 자유무역과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었던 세계경제는 이제 경제안보와 공급망 재편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정면으로 도전한 책이 김흥규 국립외교원장이 엮은 『격변(激變)―미중 전략경쟁시대 대한민국 생존전략』이다. 외교와 안보, 경제와 산업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 책은 단순히 미국과 중국의 힘을 비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세계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분석하고, 대한민국이 스스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김흥규 원장은 오랫동안 중국과 미중관계, 동북아 국제정치를 연구해 온 학자다. 그가 참여해 발전시킨 민간 싱크탱크 플라자프로젝트는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어 국가의 중장기 대외전략을 모색하는 것을 지향한다. 『격변』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 서 있다. 국가의 생존전략은 정권의 이해관계나 이념적 구호에 갇혀서는 안 되며, 냉정한 현실 인식과 장기적 국익을 바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는 출발점에서 2,500년 전 중국의 병법가 손무와 노자, 그리고 강대국 흥망의 역사를 떠올린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혜는 첨단기술에만 있지 않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축적해 온 전쟁과 평화, 힘과 절제, 경쟁과 공존의 경험에도 있다.
손자병법은 이렇게 말한다.
“상병벌모(上兵伐謀), 기차벌교(其次伐交), 기차벌병(其次伐兵), 기하공성(其下攻城).”
가장 뛰어난 전쟁은 상대의 계략을 무너뜨리는 것이며, 그다음은 외교적 관계를 공략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며,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하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손무가 말하는 최고의 전략은 전쟁에서 많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른바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의 정신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자세도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느 편에 서서 상대를 공격할 것인가만 고민하는 국가는 결국 다른 나라의 전략에 종속된다. 중요한 것은 두 강대국의 경쟁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지킬 수 있는 독자적 전략을 갖추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자는 뜻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이라는 분명한 안보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인간의 존엄이라는 헌법적 가치 역시 흔들릴 수 없다. 다만 동맹을 지키는 것과 외교적 사고를 동맹에만 의존하는 것은 다르다. 굳건한 동맹 위에서 자율적 판단과 다층적 외교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국가의 모습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또 다른 지혜를 전한다.
“유지이위리(有之以爲利), 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
있는 것이 이로움을 만들지만, 없는 것이 쓰임을 만든다는 뜻이다. 수레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에 수레가 움직이고, 그릇 속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힘만이 국가의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군사력과 경제력, 기술력은 국가의 실체를 이루는 힘이다. 그러나 신뢰와 외교적 유연성, 문화적 포용력과 국제사회의 평판은 그 힘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공간이다. 무기와 돈만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는 있어도 존경받는 질서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유엔을 비롯한 국제제도의 형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동맹과 시장, 대학과 연구기관, 문화와 기술혁신을 통해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물론 미국 중심 질서에도 전쟁과 개입, 불평등과 이중기준이라는 모순이 존재했다. 그러나 군사력과 제도, 경제와 문화가 결합할 때 국가의 영향력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임은 분명하다.
중국의 부상 역시 단순한 군사력 증강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세계의 생산기지로 성장했고, 거대한 내수시장과 제조업 생태계를 구축했으며, 오늘날에는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통신장비와 AI, 로봇과 우주기술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대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인구구조 변화와 부동산 문제, 지방정부 부채, 기술통제와 국제적 불신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미국과 중국 어느 나라도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우위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는 어느 한 나라가 모든 규칙을 결정하는 단순한 패권질서보다는 경쟁과 협력, 대립과 상호의존이 복잡하게 얽힌 질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역사는 강대국 사이에 놓인 나라의 운명이 반드시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강대국 경쟁이 공동체 전체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멜로스 대화는 힘이 정의를 압도할 때 작은 공동체가 얼마나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는지 일깨운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을 약소국의 숙명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고대의 멜로스가 아니다. 세계적 제조업과 첨단기술, 상당한 경제규모와 군사력, 높은 교육수준과 문화적 영향력을 갖춘 국가다. 문제는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힘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
19세기 말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질서를 읽는 데 실패했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와 서구 열강의 경쟁 속에서 내부 개혁과 국가역량 강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국권을 상실했다. 물론 식민지배의 책임은 침략과 강제병합을 실행한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극을 되돌아보며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과 국가 내부의 혁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배워야 한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위기를 성장의 계기로 바꾼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교육과 산업화를 추진했고, 민주화를 통해 정치적 자유를 확대했으며,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철강, 정보통신과 문화산업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분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성취는 어느 한 정권이나 기업, 특정 세대만의 공로가 아니다. 수많은 노동자와 기업인, 과학자와 교육자, 시민이 함께 축적한 역량의 결과다.
이제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그 중심에는 AI와 반도체, 피지컬 AI가 있다.
과거의 국제정치에서 석탄과 철강, 석유와 군함이 강대국의 힘을 결정했다면, 오늘날에는 반도체와 데이터, 알고리즘과 전력, 로봇과 첨단제조업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을 이룬다. AI는 단순한 산업기술이 아니다. 경제의 생산성을 바꾸고 군사적 의사결정과 정보활동, 외교와 행정, 교육과 의료, 문화와 언론까지 변화시키는 범용기술이다.
특히 AI 시대의 경쟁력을 이해하려면 기술의 다섯 층위를 함께 보아야 한다. 첫째는 전력과 에너지다. 둘째는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반도체다. 셋째는 데이터와 클라우드 인프라다. 넷째는 AI 모델과 응용 소프트웨어다. 다섯째는 그 지능을 현실 세계에서 움직이게 하는 로봇과 자율주행, 스마트공장과 피지컬 AI다. 이 구분은 국가 AI 산업전략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분석틀이다.
이 다섯 층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취약하면 국가의 AI 경쟁력은 제약받는다.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를 생산해도 전력이 부족하면 데이터센터를 운영할 수 없고, GPU를 확보해도 데이터와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면 산업적 성과를 만들기 어렵다. 뛰어난 AI 모델이 있더라도 실제 공장과 병원, 물류와 국방 현장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경제적 부가가치는 제한된다.
대한민국에는 중요한 기회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 기업들은 자동차와 로봇, 생산자동화 분야에서 축적된 역량을 갖고 있다. 여기에 조선과 방산, 바이오와 의료, 정보통신과 콘텐츠 산업이 결합하면 대한민국은 AI를 실제 산업현장에서 구현하는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2026년 정부 역시 AI 데이터센터와 K-반도체, 피지컬 AI를 핵심 전략산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7월 발표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하반기 업무계획은 대규모 민간 AI 데이터센터 투자 지원과 피지컬 AI 산업 육성을 강조했다. 10월에는 정부와 산업계, 연구계가 함께하는 피지컬 AI 기술·산업 협력 행사도 추진됐다. 다만 투자계획과 정책목표가 곧바로 실현된 성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전력 공급과 인재 확보, 사업화 실적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I 산업정책이 곧 외교안보 정책이 된다는 사실이다.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과 중국, 대만과 일본, 네덜란드와 한국이 서로 연결된 복잡한 국제분업 체계 위에 서 있다. 첨단 반도체 장비와 설계 소프트웨어, 제조공정과 메모리, 패키징과 소재는 한 국가가 모두 독점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술경쟁이 심화될수록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외교적 능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첨단기술 협력을 심화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현실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일본과는 반도체 소재와 장비, 과학기술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고, 유럽과는 기술표준과 산업규범, 기후와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동과 중앙아시아는 시장이자 생산거점이며 미래의 기술협력 파트너다.
이러한 외교는 어느 한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을 줄이는 동시에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연결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다. 공급망의 다변화는 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일이다.
피지컬 AI의 중요성은 여기서 더욱 커진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언어와 지식, 이미지와 정보를 다루는 기술이라면 피지컬 AI는 인공지능이 로봇과 기계, 자동차와 생산설비를 통해 물리적 세계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세계적인 제조업 기반을 갖춘 대한민국에는 특히 유리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회가 저절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거대한 제조업 생태계와 시장을 활용해 휴머노이드 로봇과 산업용 로봇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고, 미국은 AI 모델과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와 자본시장의 강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질서를 주도하려 한다. 한국이 과거의 제조업 성공에 안주한다면 새로운 기술질서에서는 오히려 뒤처질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산업전략은 단순히 반도체 수출을 늘리는 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망과 로봇, 소프트웨어와 제조현장을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해야 한다. 대학과 연구소, 대기업과 중소기업,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각각 따로 움직이는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특히 지역의 역할이 중요하다. AI 산업은 수도권의 데이터센터와 연구개발 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북과 경남의 제조업 기반, 광주의 AI 역량, 대구와 경북의 로봇과 전자산업, 충청권의 반도체와 연구개발, 부산과 울산의 해양·자동차 산업 등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전국적인 AI 산업생태계가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새만금과 같은 지역은 에너지와 산업용지, 첨단제조업을 결합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다만 구호만으로 기업이 모이지는 않는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송전망, 용수와 교통, 연구인력과 주거환경, 투자수익성이 구체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지역균형발전도 국가안보와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국가의 산업역량을 전국에 분산하고 연결하는 것은 수도권 집중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다. 한 지역에 전력과 데이터, 연구인력과 산업시설이 지나치게 집중되면 재난과 사이버공격, 지정학적 충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 지역의 혁신은 곧 국가의 회복탄력성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생존전략을 산업과 기술만으로 완성할 수는 없다. 외교안보의 가장 절박한 문제인 북한과 한반도 평화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한다. 강력한 억제력과 한미연합방위태세는 필수적이다. 동시에 군사적 긴장을 관리하고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며, 가능한 대화의 통로를 유지하는 외교적 노력도 필요하다. 억제와 대화는 반드시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억제력이 대화의 기반을 만들 수 있고, 실질적인 대화가 군사적 위험을 줄일 수도 있다.
한반도 문제를 미중 패권경쟁의 부속 문제로만 취급해서도 안 된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평화의 직접적인 당사자이며, 그 미래에 가장 큰 책임과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이해가 충돌하더라도 대한민국 스스로 장기적인 평화전략과 통일에 대한 비전을 갖추어야 한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단순히 적과 나를 아는 기술이 아니다. 상대의 능력과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태도다. 북한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공포에 사로잡혀 대한민국이 가진 경제력과 기술력, 동맹과 외교적 역량을 스스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국가전략의 목적을 다시 물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무엇을 위해 강해져야 하는가.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고 군사력을 강화하며 AI 강국이 되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일 수는 없다. 그 힘을 통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고, 인간다운 삶과 문화적 번영을 실현하며, 미래세대가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궁극적 목적이어야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고 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국가의 전략에서도 절제는 나약함이 아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알고, 무리한 팽창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것은 고도의 전략적 지혜다.
강대국의 역사는 이를 반복해서 증명한다. 지나친 군사적 팽창과 재정적 부담, 내부의 분열과 제도적 경직성은 많은 제국의 쇠퇴를 촉진했다. 로마와 스페인 제국, 대영제국과 소련의 역사는 서로 다르지만, 국가의 외적 영향력과 내부의 지속가능성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공통된 교훈을 남긴다.
대한민국은 제국이 될 필요가 없다.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아니라 세계가 필요로 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도체와 AI, 자동차와 선박을 잘 만드는 나라, 자유와 법치를 존중하는 나라, 문화와 예술을 통해 세계인과 소통하는 나라, 기후위기와 질병, 빈곤과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한국 문화의 힘이 있다. K-팝과 K-드라마, 영화와 문학, 음식과 생활문화는 이미 대한민국을 세계인에게 친숙한 나라로 만들었다. 문화의 힘은 군사력처럼 상대를 강제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국의 반도체와 AI가 세계의 산업을 연결한다면 한국의 문화는 세계인의 감성과 일상을 연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전략은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첫째는 안보의 자강과 동맹의 신뢰다. 한미동맹을 확고히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정보·감시·정찰 능력과 사이버안보, 우주안보, 첨단국방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강한 동맹과 강한 자주국방 역량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둘째는 기술과 산업의 전략적 자율성이다. 반도체와 AI, 피지컬 AI, 에너지와 바이오 등 핵심 분야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모든 기술을 국산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역량을 갖추면서 국제분업과 협력의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문화와 외교의 세계적 확장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을 넘어 아세안과 인도, 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평을 넓혀야 한다. 정부 외교뿐 아니라 기업과 대학, 언론과 문화예술계,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움직이는 다층적 외교가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전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안보가 불안하면 경제가 흔들리고, 산업이 약하면 국방의 지속가능성이 떨어지며, 문화와 외교의 신뢰가 부족하면 경제적 성취도 국제적 영향력으로 연결되기 어렵다. 국가전략이란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방향으로 묶는 일이다.
김흥규 원장이 엮은 『격변』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하는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이 단순히 강대국의 선택을 기다리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힘과 가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그 답은 어느 한 정치지도자나 외교관, 기업인에게만 맡길 수 없다. 국가의 미래는 정치의 품격과 기업의 혁신, 과학자의 도전과 언론의 책임, 시민의 성숙한 판단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언론은 강대국의 논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데 머물지 말고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해야 한다. 진리와 정의, 자유의 원칙 위에서 사실을 검증하고, 국가의 장기적 이익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인간·문화·자연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기술은 위험하며, 문화를 잃은 성장은 공허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번영은 지속될 수 없다. AI 시대의 국가전략 역시 이 세 가지 가치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산업은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경제성장은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
미중 패권경쟁의 시대에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단순히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의 문제다. 동맹에는 신뢰를, 경쟁에는 실력을, 외교에는 지혜를, 산업에는 혁신을, 문화에는 품격을 갖춘 국가가 되어야 한다.
격변은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다. 과거의 질서가 흔들릴 때 새로운 국가가 도약할 공간도 열린다. 대한민국은 이미 전쟁과 가난, 권위주의와 경제위기를 극복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을 미래의 국가전략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다.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지혜를 가르쳤고, 노자는 강함 속에 절제를 담으라고 일깨웠다. 역사는 강대국의 오만을 경계하라고 경고했으며, AI와 반도체, 피지컬 AI는 새로운 시대의 힘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가르침이 향하는 곳은 하나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다른 나라의 손에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세계가 함부로 흔들 수 없는 나라, 세계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나라,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나라가 될 수는 있다.
그것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생존전략이자 성장전략이며,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나라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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