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특별기획 | OBITUARY] 한국 정신사의 큰 별을 보내며

  • 다석의 얼을 지킨 마지막 큰 제자 박영호, 이름표 하나 남기고 하늘로 돌아가다

  • 11일 오후 7시 39분 별세, 향년 91세…13일 낮 12시 발인, 수원 연화장 공원묘역 안치 예정

아주경제 DB
아주경제 DB

“부고도, 빈소도, 묘역도 만들지 말라”…유족 대표 박은홍 성공회대 명예교수 “어머니와 제자들의 뜻에 따라 이름표 하나만 남기기로”

함석헌·류달영·김흥호 등 다석 문하의 걸출한 인물들 가운데 스승의 가르침을 삶의 전부로 삼은 정통 계승자…톨스토이에서 씨알농장으로, 동서양 종교의 회통에서 ‘얼나’의 철학까지

세상에는 살아서 이름을 남기려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세상의 명예를 좇지만 후자는 명예마저 내려놓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고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재산인가, 권력인가, 학문인가, 아니면 한평생 지켜온 정신인가. 이 물음 앞에서 한국 현대 사상사의 한 구도자가 조용히 생애의 마지막 문을 닫았다.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의 정통 제자이자 다석사상연구회를 이끌어온 박영호 선생이 지난 11일 오후 7시 39분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의 마지막 당부는 생전의 삶만큼이나 특별했다. 부고를 알리지 말라, 빈소를 차리지 말라, 부의금을 받지 말라, 묘역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화장한 뒤 유골마저 뿌려달라는 뜻을 남겼다.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평생 자신을 낮추고 진리를 높였던 구도자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유족 대표인 아들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아주경제 곽영길 회장과의 통화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뜻을 전했다.

“아버님은 부고도 알리지 말고, 빈소도 만들지 말고, 묘역도 남기지 않고 유골을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제자들의 뜻을 받아들여 수원 연화장 내 공원묘역에 작은 이름표 하나를 남기는 것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고인의 발인은 13일 낮 12시 수원 동수원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다. 이후 인근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한 뒤 같은 날 오후 연화장 내 공원묘역에 안치될 예정이다. 고인의 유지를 존중해 별도의 빈소를 차리지 않고 부의금도 받지 않는다.

작은 이름표 하나. 그것은 어쩌면 수많은 기념비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이름을 크게 새기지 않아도 한 사람의 정신은 남을 수 있다는 사실, 세상의 권위를 얻지 않아도 진리의 세계에서는 큰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박영호는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대학 졸업장도, 박사학위도, 세속적인 높은 벼슬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에는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과 경전이 살아 있었다. 예수와 석가모니, 공자와 노자, 톨스토이와 간디, 그리고 무엇보다 다석 류영모가 있었다. 그는 평생 흙을 일구고 책을 읽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했다.

다석의 문하에는 한국 현대 정신사를 빛낸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씨알사상의 함석헌, 농촌과 생명운동의 류달영, 종교철학과 대학 교육의 김흥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다석의 정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박영호의 길은 달랐다. 함석헌이 다석의 정신을 역사철학과 민주주의·평화사상으로 확장했다면, 류달영은 농촌과 생명운동으로, 김흥호는 종교철학과 교육으로 발전시켰다. 반면 박영호는 다석 자체를 평생의 공부이자 생활의 중심에 두었다.

누가 더 위대한 제자인가를 가릴 수는 없다. 다만 다석의 가르침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자신의 생애 전체로 구현하는 데 이토록 철저했던 제자가 또 있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박영호의 삶은 각별한 무게를 지닌다. 그를 다석 사상의 가장 충실한 정통 계승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전쟁의 죽음에서 톨스토이를 만나고, 함석헌을 거쳐 다석에게 이르다

박영호의 사상적 여정은 젊은 시절의 고통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을 경험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일제 말기에는 우리말 책을 구하기 어려워 일본어로 된 책을 읽어야 했다. 그러던 중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접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종교와 진리에 관한 질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톨스토이는 그에게 단순한 문학가가 아니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스승이었다.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뜻인가.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들은 젊은 박영호의 내면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1956년 1월 그는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서 함석헌의 글을 읽었다. 제목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제도와 형식에 갇힌 종교를 비판하고 참된 신앙을 묻는 글에서 그는 톨스토이의 정신을 발견했다. 감동한 그는 함석헌에게 편지를 보냈고, 함석헌은 직접 답장을 보내왔다.

두 사람은 대구 YMCA 강연을 계기로 만났다. 박영호는 함석헌에게 함께 일하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톨스토이와 간디가 실천한 노동과 신앙의 공동체를 한국에서도 구현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 만남은 훗날 천안 씨알농장으로 이어졌다.

씨알농장에서는 젊은이들이 과수원을 가꾸고 고구마와 채소를 재배했다.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농사가 곧 수행이었고, 공부가 곧 삶이었다. 다석 류영모와 류달영 등 여러 사상가를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 박영호는 훗날 아주경제 인터뷰에서 이 시절을 생생하게 회고했다.

그는 함석헌을 하늘처럼 존경했다. 그런데 그 함석헌에게도 스승이 있었다. 바로 다석 류영모였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시절 다석에게 배웠고, 이후에도 그를 깊이 존경했다. 함석헌을 통해 다석의 존재를 알게 된 박영호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셈이었다.

1959년 그는 다석의 가르침을 직접 듣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 YMCA 연경반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강의에 참석했다. 경기도 의왕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서울까지 올라와 강의를 들었고, 때로는 스승의 집을 찾아가 질문했다.

다석의 강의는 일반적인 성경 강해와 달랐다. 성경을 이야기하다가도 노자와 장자를 인용했고,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하다가 공자의 인(仁)과 성(誠)을 논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서로 배척해야 할 종교로 보지 않았다. 인간이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여러 길로 이해했다.

박영호는 그 가르침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스승의 말씀을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 했다. 다석이 농사를 지으며 진리를 탐구했듯이 자신도 땅을 일구며 공부했다. 다석이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정신적 생명을 키우려 했듯이 자신도 소유와 명예보다 내면의 성숙을 추구했다.

그에게 다석은 학문적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었다. 그리고 이 점이 박영호를 다른 많은 제자와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스승의 ‘단사’,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졸업장 ‘마침보람’

1965년 박영호의 인생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찾아왔다. 다석이 그에게 ‘단사(斷辭)’를 명한 것이다. 이제는 스승을 찾아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평생 스승을 따르려 했던 제자에게 이보다 더 가혹한 명령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명령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를 영원히 자신의 그늘 아래 두지 않는다. 제자가 스스로 서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참된 가르침이다.

박영호는 눈물을 흘리며 스승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 관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는 혼자 공부하며 자신의 정신세계를 정리했고, 5년간의 독학 끝에 『새 시대의 신앙』을 펴냈다. 그 무렵 다석으로부터 한 장의 봉함엽서가 도착했다. 붓으로 쓴 ‘마침보람’이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졸업장이 있다. 명문대학의 졸업장도 있고 박사학위 증서도 있다. 그러나 박영호에게 가장 소중했던 졸업장은 스승이 보낸 그 한 장의 엽서였다. 다석이 제자에게 내린 정신적 독립의 인정이었다.

박영호는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다른 제자들에게 송구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스승의 ‘마침보람’을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증거가 아니라, 육체적 욕망에 얽매인 ‘제나’를 넘어 참된 정신적 존재인 ‘얼나’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다석 사상의 핵심이 있다. 다석은 인간을 단순한 육체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경쟁하는 생물학적 자아가 있지만, 그것을 넘어 진리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적 자아가 있다고 보았다. 그 참된 자아가 ‘얼나’다.

‘얼나’는 다석이 동서양 종교를 회통하면서 창조한 독창적인 우리말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예수의 거듭남, 불교의 깨달음, 유교의 수양, 도교의 무위와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정신적 지평을 열었다. 물론 각각의 종교가 지닌 고유한 교리와 역사적 차이까지 없애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생명과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었다.

박영호는 그 ‘얼나’의 철학을 책으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원리로 삼았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일상의 노동과 절제, 사색과 저술 속에서 실천하려 했다. 대학에서 학문적 권위를 얻지 않고도 평생 학문을 했고, 종교기관의 높은 직책을 맡지 않고도 평생 종교적 진리를 탐구했다.

그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지식은 얼마나 많이 아느냐로 평가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는 대로 얼마나 살아가느냐로 평가해야 하는가. 학문은 학위를 얻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인가. 종교는 소속과 의례인가, 아니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는 삶의 길인가.

박영호는 자신의 인생으로 이 질문들에 답하려 했다.
 
사진박영호 선생 측 제공
사진=박영호 선생 측 제공
 
다석의 사상을 기록한 사람, 한국 정신사의 소중한 유산을 지키다

스승 다석이 1981년 세상을 떠난 뒤 박영호의 삶은 더욱 분명한 방향을 갖게 됐다. 스승의 생애와 사상을 기록하고 후대에 전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1971년부터 다석 전기 집필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승이 읽은 책들을 찾아 읽고, 스승에게 직접 생애를 구술받았으며, 스승이 남긴 일기를 필사했다. 다석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뿐 아니라 그 말이 태어난 삶의 배경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준비와 집필에 무려 14년이 걸렸다. 마침내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가 세상에 나왔다. 한 사상가의 일생을 기록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바친 것이다.

그 후에도 박영호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 류영모 명상록』, 『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을 통해 스승의 언어와 정신을 후대에 전달했다. 『잃어버린 예수』,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깨달음 공부』 등을 통해서는 다석의 종교관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을 325회 연재하고 이를 전 5권의 『다석사상전집』으로 펴낸 일은 그의 평생 작업을 상징한다. 난해한 종교철학을 일반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흩어져 있던 사상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 저술들은 오늘날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박영호가 없었다면 다석 사상이 오늘날처럼 전해질 수 있었을까. 물론 다석을 연구하고 기억한 사람은 그밖에도 많았다. 그러나 스승의 생애와 말씀을 직접 기록하고, 그 사상을 평생 해석하고, 스승의 생활방식까지 자신의 삶으로 이어간 박영호의 공헌은 특별하다.

그는 다석 사상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다석을 직접 만날 수 없는 후학들은 박영호가 남긴 책을 통해 스승을 만났고, 그의 강의를 통해 다석의 철학을 배웠다.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저술 목록이 아니라 한국 정신사의 한 줄기였다.

아주경제와 함께 이어온 다석의 정신,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깊어지는 질문

아주경제와 박영호 선생의 인연도 각별하다. 아주경제는 2021년부터 다석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릴레이 인터뷰를 기획해 직접 제자들과 연구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그 중심에 박영호가 있었다.

당시 고령이었던 박영호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직접 만나기 어려워지자 우편으로 받은 질문지에 정성껏 답했다. 그의 답변에는 톨스토이와 함석헌을 만나던 청년 시절의 기억, 천안 씨알농장에서의 생활, 다석에게서 배운 진리, ‘마침보람’을 받았던 감동이 담겼다. 아주경제는 이 기록을 통해 한국 현대 정신사의 중요한 증언을 독자들에게 전했다.

다석사상연구회의 후학들은 박영호가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증언했다. 특히 다석을 우상화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스승이라는 인간을 절대화하지 않고, 스승이 가리킨 궁극적인 진리를 바라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빠르게 확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계가 글을 쓰고, 정보를 분석하고,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며, 때로는 인간보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지식이 늘어난다고 반드시 지혜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반드시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정의인가. 자유로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과학기술은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어떻게 더 풍요롭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이 스스로 성찰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다석 류영모의 철학과 박영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석이 말한 ‘얼나’는 인간이 자기중심적 욕망을 넘어 더 높은 정신적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박영호는 그 가능성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의 사상적 유산은 과거의 종교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술과 자본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에 인간의 내면과 양심, 절제와 생명의 가치를 다시 묻게 한다. 이것이 박영호가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다.
 
묘비 대신 이름표 하나, 마지막까지 ‘제나’를 내려놓다

박영호 선생의 마지막 길은 그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인은 부고도 알리지 말고, 빈소도 만들지 말고, 부의금도 받지 말고, 묘역도 만들지 말라는 뜻을 남겼다고 한다. 화장 후 유골마저 뿌려달라고 했다. 평생 세속적인 명예를 구하지 않았던 사람이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유족과 제자들은 고인을 기억할 최소한의 표지를 남기기로 했다. 유족 대표 박은홍 성공회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어머니와 제자들의 뜻에 따라 수원 연화장 내 공원묘역에 작은 이름표 하나를 남기는 것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 이름표는 고인을 기념하는 최소한의 표지다. 그러나 그 작은 표지에는 한평생의 철학이 담겨 있다.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큰 묘비인가, 화려한 장례인가, 수많은 사람의 조문인가. 박영호는 그런 외형보다 자신이 평생 지켜온 진리의 정신을 더 소중히 여긴 듯하다.

다석은 인간이 육체적 자아인 ‘제나’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했다. 인간이 소유와 명예와 욕망을 넘어 참된 정신적 자아인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박영호는 그 가르침을 평생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세속적인 이름을 내려놓으려 했다.

이보다 더 일관된 삶이 있을까.

물론 그의 장례 방식만으로 한 사람의 사상적 깊이를 모두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하나의 철학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한다. 젊은 날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으며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묻던 청년이, 함석헌의 씨알농장에서 노동과 진리를 배우고, 다석의 가르침 속에서 ‘얼나’를 탐구한 끝에,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일마저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은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자기 삶의 완성이었다. 자신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일이었다. 세상에 무엇을 더 많이 남기는가보다 무엇을 더 깊이 깨닫고 떠나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스승은 떠나도 얼은 남는다, 박영호가 한국 정신사에 남긴 질문

한국 현대 정신사에서 다석 류영모는 아직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사상가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넘나들며 인간과 우주, 생명과 진리를 탐구했다. 동서양의 종교를 한국인의 언어와 정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은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독창적인 종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다석의 사상을 평생 지켜온 사람이 박영호였다. 그는 스승의 사상을 이용해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스승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스승이 가리킨 진리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다.

그가 남긴 저술은 앞으로도 읽힐 것이다. 그가 기록한 다석의 말씀은 새로운 연구의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평생 실천한 노동과 절제, 공부와 사색의 삶은 새로운 세대에게 인간의 참된 성공이 무엇인지를 묻게 할 것이다.

다석의 문하에는 훌륭한 학자와 사상가들이 많았다. 함석헌은 한국 민주주의와 평화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류달영은 농촌과 생명운동에 헌신했으며, 김흥호는 대학 교육과 종교철학을 통해 다석의 사상을 널리 알렸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창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박영호는 세상이 알아주는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다석의 길을 걸었다. 스승의 사상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석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한 의미의 정통 계승자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다석에게 직접 배운 세대의 중요한 한 축이 사라졌다. 그러나 사상의 역사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승이 제자에게 전한 정신은 다시 제자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다석이 박영호에게 전한 ‘얼나’의 철학도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석은 제자에게 ‘마침보람’을 주었다. 이제 박영호는 자신의 일생으로 그 ‘마침보람’의 뜻을 완성했다. 스승에게서 배운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고, 그 진리를 후대에 남긴 것이다.

세상은 그에게 박사학위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 진리를 공부했다. 세상은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다. 세상은 그에게 화려한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저술과 삶으로 한국 정신사에 지워지지 않을 자취를 남겼다.

이제 수원 연화장의 작은 이름표 하나가 그의 마지막 흔적이 된다. 그러나 그 이름표가 그의 전부는 아니다. 박영호라는 이름은 다석의 책 속에, 그가 남긴 기록 속에,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한국의 정신적 뿌리를 찾으려는 후대의 질문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진리를 향한 물음은 죽지 않는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한 사람이 평생 지켜온 정신은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다석이 말한 ‘얼나’의 철학을 박영호의 삶과 연결해 생각한다면,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 생명의 연속성일 것이다.

박영호 선생은 떠났다. 그러나 다석의 얼은 남았다.

그가 남긴 작은 이름표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위해 꿈꾸는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가.

박영호는 평생의 삶으로 그 질문에 답했다.

다석이 진리의 길을 열었다면, 박영호는 그 길이 사라지지 않도록 평생 걸어간 사람이었다.

이제 그 길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일을 넘어,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있는 정신으로 만드는 일이 우리의 과제로 남았다.

고인이 남기려 하지 않았던 이름표 하나. 그 작은 이름표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큰 묘비일지 모른다.

삼가 박영호 선생의 영면을 기원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1
0 / 300
  • 인류는 만물의 근원.창조주 하느님(乾,天)의 섭리하에,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된,인간의 도리를 가르치신,근본적 하느님 아들 유교 공자님(先聖,聖天子)과,기독교세계 하느님의 독생자 주 예수를 떠나살수 없음.짐승같은 불교 부처Monkey는 창조신에 도전하는 나약한 원숭이! @@유교경전,가톨릭경전이 중요.만물의 근원 창조주 하느님(乾,天)께서는,단순한 생물형 피조물이 아닌,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신것.공자님.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인간의 도리추구해야!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