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프랑스의 거리가 다시 시끄럽다. 교육여건과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교육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증가, 국채금리 상승, 정치적 분열과 정부 불신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국민은 더 나은 교육과 복지, 일자리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회복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국가가 약속한 것과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프랑스의 혼란은 한국에도 낯설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 5극3특 국가균형발전, 첨단산업 육성과 민생안정이라는 야심 찬 국가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와 적극재정을 기반으로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국민의 평가는 비전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국정지지율 하락과 정치적 갈등은 장기 성장전략과 국민이 체감하는 생활경제 사이의 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경제성장수석으로 일해 온 경제학자 하준경을 경제사회정책을 총괄하는 정책실장으로 발탁했다. 이번 인사는 참모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복합 난제를 어떤 경제철학과 정책운영 방식으로 풀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하준경은 경제성장과 기술혁신, 금융과 산업구조의 관계를 연구해 온 경제학자다. 그의 과제를 이해하는 데는 세 명의 사상가가 유용한 좌표가 된다. 경제의 불안정과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존 메이너드 케인즈, 혁신과 창조적 파괴를 말한 조지프 슘페터, 조직의 목표와 실행능력을 중시한 피터 드러커다.
첫째, 케인즈의 관점에서 생활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다.
대공황은 시장이 스스로 완전고용과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케인즈는 유효수요의 부족과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정부가 돈을 많이 써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경제가 불안정할 때 정부가 수요와 고용을 안정시켜 민간경제가 회복할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의 한국은 대공황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성장의 성과가 국민에게 고르게 전달되지 않는 문제는 여전하다. 반도체 수출이 늘고 주가가 올라도 청년이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주거비와 생활비 부담이 줄지 않는다면, 거시지표와 가계의 체감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정책실장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곳이 바로 이 간격이다. 주거안정, 청년고용, 서민금융을 개별 복지사업이 아니라 경제의 활력과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성장정책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주거비 부담은 청년의 소비와 결혼, 출산, 직업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가계부채는 경제 전체의 소비여력을 제약한다. 민생안정은 성장 이후의 부차적 과제가 아니라 성장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조건이다.
그렇다고 케인즈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재정확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프랑스의 교훈은 오히려 그 반대다. 재정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정부가 국민을 지원할 능력 자체가 약해진다. 반도체는 경기순환이 큰 산업이어서, 호황기 세수를 영구적 수입으로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첫 번째 과제는 민생안정과 재정규율을 대립시키지 않는 데 있다. 적극재정일수록 무엇을 위해 얼마를 쓰고 어떤 성과를 얻을 것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슘페터의 관점에서 성장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케인즈가 자본주의의 불안정을 설명했다면,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했다. 경제발전은 기존 산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업가가 새로운 기술과 제품, 생산방식, 시장과 조직을 결합하면서 경제의 구조 자체가 바뀌는 과정이다.
AI 대전환은 창조적 파괴의 거대한 실험장이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틱 AI, 피지컬 AI로 이어지는 기술혁신은 생산방식뿐 아니라 노동시장과 산업구조, 국가 간 경쟁질서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가 데이터센터와 GPU, 반도체, 로봇에 막대한 투자를 추진하는 이유다.
그러나 질문이 남는다. AI 인프라를 많이 구축하면 AI 강국이 되는가. 미국의 하이퍼 스케일러와 엔비디아는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 그치지 않고 반도체·소프트웨어·클라우드·AI 모델·전력과 네트워크를 잇는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인프라를 소유한 기업이 기술표준과 서비스의 흐름까지 좌우하는 경쟁이다. 한국이 데이터센터 건설과 GPU 확보에만 집중한다면 해외 플랫폼에 막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는 구조에 머물 수 있다. 글로벌 인프라를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서 한국 기업이 얼마나 독자적인 기술과 서비스,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가 관건이다.
이것이 슘페터적 산업정책의 핵심이다. 정부는 설비투자의 규모가 아니라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새로운 기업이 얼마나 등장했는지, 기술사업화와 산업 간 융합이 얼마나 활발해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반도체·자동차·조선·배터리의 제조 경쟁력이 곧바로 AI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과거의 성공 경험이 새로운 혁신을 가로막기도 한다. 대·중소기업 간 기술격차, 창업과 인수합병의 제약, 연구성과가 산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
창조적 파괴는 새 산업의 육성과 함께 기존 산업의 변화와 퇴출을 수반한다. 혁신정책은 보조금과 투자확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경쟁을 촉진하고 실패한 기업의 자원이 새로운 도전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하는 제도개혁이 필요하다. 정부의 일은 모든 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셋째, 드러커의 관점에서 국가의 실행능력을 혁신하는 일이다.
드러커는 조직의 존재 이유를 성과에서 찾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달성했느냐였다. 한국 정부는 거대한 국가전략을 세우고 예산을 배분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여러 부처에 걸친 정책을 하나의 성과로 묶어내는 데는 서툴다.
AI 정책만 해도 과학기술·산업·에너지·교육·국토·금융정책이 얽혀 있다. 데이터센터를 지으려면 전력과 용수, 입지 문제가 풀려야 하고, AI를 산업현장에 적용하려면 전문인력과 소프트웨어, 기업의 조직혁신이 필요하다. 정책실장은 부처 사업을 취합하거나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가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부처 간 이해충돌을 조정하며, 실행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예산집행률을 정책성과와 혼동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산을 다 썼다고 사업이 성공한 것이 아니고, 데이터센터를 지었다고 AI 경쟁력이 높아진 것도 아니며, 청년고용 예산을 늘렸다고 양질의 일자리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정책은 투입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돼야 한다. 대형 프로젝트마다 목표와 책임자, 일정과 성과지표를 명확히 하고, 일정 기간 뒤 성과를 검증해 부족한 사업은 수정하거나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효율화가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근거를 만드는 일이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출발점은 당장의 민생불안을 완화하고 재정의 신뢰를 확보하는 일이다. 동시에 AI와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장기적 생산성 혁신을 추진하고, 이 둘을 실제 성과로 연결하는 실행체계의 개혁을 처음부터 병행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국민은 오늘의 생활개선을 요구하지만 기술혁신과 산업구조 개혁은 성과가 나타나기까지 오래 걸린다. 단기 성과를 보여주면서도 장기 투자를 포기할 수 없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적 리더십과 정책 조정능력이 시험받는다. 2027년 예산은 그 선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가 될 것이다. AI 대전환과 지역균형발전, 민생지원을 모두 같은 속도와 규모로 추진할 수는 없다.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조정할지, 경기와 세수 여건이 달라지면 어떤 대안을 택할지까지 준비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도 중요하다. 프랑스의 시위는 사회갈등이 재정적 제약만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국민이 정책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부담이 공정하게 나뉜다고 느끼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개혁도 실행되기 어렵다. AI 전환에 따른 일자리 변화, 교육개혁, 연금과 재정의 세대 간 부담,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풀려면 정부와 기업, 노동계, 청년세대, 지역사회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 정책실장은 경제정책의 조정자이자 사회적 합의의 촉진자여야 한다.
성장국가에서 실행국가로
한국은 오랫동안 성장국가의 논리로 성공했다. 정부가 산업화의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이 투자하며 국민이 노력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AI 대전환과 인구구조 변화,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겹친 지금은 과거의 성공방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성장국가를 넘어 실행국가로 진화하는 일이다. 얼마나 거대한 비전을 발표했느냐보다 그것을 얼마나 실현했느냐가 중요한 시대다.
케인즈는 오늘의 불안을 완화하는 지혜를, 슘페터는 내일의 성장동력을 만드는 원리를, 드러커는 두 목표를 실제 성과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세 사람의 사상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이다. 물론 이를 하나의 국가운영 철학으로 결합하는 일은 경제학자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대통령의 결단과 국회의 협력, 관료조직의 실행력, 기업의 혁신과 국민의 신뢰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케인즈의 안정, 슘페터의 혁신, 드러커의 실행. 이 삼각형의 중심에 놓여야 할 것은 결국 국민의 삶이다. 하준경 정책실장의 진정한 과제는 세 사상가의 이론을 조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을 거대한 약속의 국가에서 약속을 실현하는 국가로 바꾸는 데 있다.
필자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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