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美 ICC 제재에 "日 입장과 양립 못해"…지원 방침 강조

  • 일본인 소장 이어 조직 전체 제재…관방장관도 "깊이 우려" 재확인

  • 8개국 외무장관 성명 동참, "강하게 반대"…美 설득하며 ICC 기능 유지 모색

지난달 2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를 계기로 정상회담을 가진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AP연합뉴스
지난달 2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를 계기로 정상회담을 가진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AP·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미국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재에 "일본의 입장과 양립하지 않으며 깊이 우려한다"고 밝히고 ICC에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일본인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이 제재 대상에 올랐을 때 "대단히 유감"이라고 했던 것보다 한층 강한 표현을 썼다. 일본 정부는 유럽 등과 함께 제재에 반대하면서도 미국에 대한 설득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다카이치 총리는 미국의 제재 발표 직후인 9일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엑스(X)에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법의 지배를 일관되게 중시하며, 그 역할을 담당하는 ICC를 지지한다"고 썼다. 이어 미국에 대한 설득을 계속하는 한편 "ICC가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도 같은 날 밤 X에 올린 메시지에서 미국의 제재에 대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과 양립하지 않으며 깊이 우려한다"고 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11일 NHK 토론 프로그램에서 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ICC는 집단살해죄와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에 연루된 개인을 재판하는 상설 국제재판소다. 일본은 2007년 가입했으며, 최대 분담금 납부국으로 지난해 약 45억 엔(약 379억원)을 냈다. 일본인 아카네 소장이 ICC를 이끌고 있어 미국의 제재는 일본에도 직접적인 외교 현안이다.
 

미국, ICC 제재


미국은 9일(현지시간) ICC 조직 자체를 처음으로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나비 필레이 전 ICC 재판관의 노벨평화상 수상 결정이 발표된 지 수 시간 뒤였다. 그동안 미국의 제재 대상은 2025년 이후 아카네 소장을 비롯한 재판관·검사 등 개인 13명이었다. 제재가 전면 발동되면 ICC의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인·기업과의 거래가 금지된다. 금융 거래와 미국 IT 서비스 이용에 제약이 생겨 수사와 심리, 피해자 배상금 지급 등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다만 미국은 자국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협상 기간이라며 180일의 유예기간을 뒀다.

일본 정부는 아카네 소장과 ICC 조직에 대한 제재를 늦추기 위해 물밑에서 미국을 설득해 왔다. 아사히신문은 다카이치 총리가 지난 8월 아카네 소장 제재 때 이번과 달리 "대단히 유감"이라는 표현에 그친 데는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판단이 있었다고 전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저자세'라는 비판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ICC를 "사악한 집단"이라고 부르며 회원국들의 탈퇴를 촉구했다. 아사히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리는 같은 날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ICC를 지지하는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실무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 문제로 회담이 결렬되지는 않았으며, 두 정상은 이 사안을 외무장관 간 협의로 이어가기로 했다. 정상 간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피한 셈이다. 신문은 "처음에 강하게 비판하지 않아 움직일 여지를 만들어 둔 것이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도 전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후 3주도 지나지 않아 제재는 ICC 조직 전체로 확대됐다.

아카네 소장은 트럼프 정부의 제재 발표 직후 "제재를 단호히 거부한다"며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도 9일 캐나다·덴마크·독일·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영국과 함께 8개국 외무장관 공동성명을 내고 제재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입장과 ICC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지를 밝혔다. 일본이 참여한 ICC 당사국총회 의장단도 10일 제재의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기하라 관방장관은 의장단 성명이 일본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10일 아카네 소장,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각각 전화로 협의했다. 아카네 소장과는 제재 이후 ICC가 나아갈 방향에 관해 의견을 나눴고, 루비오 장관에게는 이번 제재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전달했다. 두 장관은 긴밀한 소통을 이어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미국, 동맹국에도 ICC 압박 촉구


미국은 동맹국을 상대로도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루비오 장관은 "ICC가 위협을 끝내든지, 우리가 ICC를 끝내든지 둘 중 하나"라며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동맹국들이 ICC를 억제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아사히는 이 발언이 ICC의 재정과 운영을 뒷받침해 온 일본과 유럽 국가들을 겨냥한 것으로 분석했다. 또 미국이 유예기간 동안 자국민을 ICC 관할권에서 제외하라고 압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에만 양보하면 ICC의 존재 의의가 흔들릴 수 있고, 제재가 전면 발동되면 ICC의 기능 마비를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제재에 반대하면서도 미국과 협의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모테기 외무상은 9일 메시지에서 ICC 지지를 밝히는 동시에, ICC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으려면 ICC와 당사국이 재판소의 과제에 대처하고 적정한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아사히는 이를 ICC를 문제 삼는 미국을 의식해 ICC의 과제 해결에도 힘쓰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했다. 미일동맹을 안보의 중심에 둔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ICC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는 11월 30일부터 12월 7일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ICC 당사국총회에서는 미국의 제재에 대한 대응책이 주요 의제가 될 전망이다. 일본 등 회원국으로서는 180일 유예기간이 끝나는 내년 4월 초까지 제재의 영향을 줄일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과제다. 일본 정부는 유럽 등과 협력해 ICC의 기능을 유지할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미국의 태도를 바꿀 해법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사히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간부는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ICC에 소추될 위험을 안고 있어 미국이 ICC에 대한 압박을 거둬들이기는 쉽지 않다고 봤다. 이 간부는 "트럼프 정권이 끝날 때까지 ICC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장기적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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