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순간의 기분, 그날의 온도와 습도, 나의 경험은 종종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시선과 경험을 녹여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편집자 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낮과 밤은 서로에게' [사진=BIFF]
카페 안 옆자리의 대화가 문득 흥미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주 단편적인 말만으로도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와 그날의 하루를 짐작하고, 어느새 그 이야기에 동행하게 된다.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순간들. 그 시간을 한 편의 영화로 옮겨 놓은 작품이 있다. 김종관 감독의 '낮과 밤은 서로에게'다. 올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문을 연 개막작이다.
영화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동안 하나의 카페를 스쳐 간 네 쌍의 남녀를 따라간다. 이야기는 '한여름밤의 꿈' '아직 나인 사람들' '이·순·불' '가을 이야기', 네 개의 챕터로 나뉜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낸 유진(김민하 분)과 현오(주종혁 분), 중학교 시절 친구로 다시 마주 앉은 상미(한선화 분)와 영민(장률 분), 웹소설 작가 혜진(심은경 분)과 영화감독 동남(이희 분준), 아이돌 준비생 나경(전소영 분)과 연인 종수(김동휘 분)가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차례로 카페를 찾는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조제' 등 일상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왔던 김종관 감독의 시선은 이번 작품을 통해 더욱 깊고 단단해졌음을 알린다.
특히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작고 사소한 것들의 편에 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쌓아올린다. 거대한 사건이나 화려한 설정은 없다. 다만 "4개의 대화만 있다"는 김종관 감독의 말대로 대화의 단면을 확대해 보여줄 뿐이다. 인물들의 대화 너머 빈자리를 채우는 건 관객의 몫. 현오가 시계 속 작은 세계에 몰두하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듯, 관객들 역시 이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빛나는 것들을 건져 올린다.
영화는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에 빠져들듯, 관객을 영화 속 한 공간에 자리하도록 만든다. 카페를 채우는 소음까지 고스란히 전달하고 스크린과 객석의 사이를 좁힌다. 이 과정에서 4개의 챕터는 손에 잡힐 듯 현실적이거나, 현실에서 비켜난 환상처럼 보이게끔하며 관객들을 속절없이 빠져들게끔 만든다. 오직 대화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순간을 몰두하게끔 만드는 건 김종관 감독의 시네마틱한 연출 덕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중요한 축이다. 사건 대신 대화로 극을 끌어가야 하는 만큼 이들의 숨소리와 시선 하나하나가 드라마가 된다. 김민하와 주종혁은 우연히 스치는 인연의 공기를 섬세하게 빚고, 한선화와 장률은 엉뚱한 재회의 어색함과 반가움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심은경과 이희준은 불꽃 튀는 첫 만남의 긴장을 웃음으로 풀어내고, 전소영과 김동휘는 이별의 순간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제목의 '낮과 밤'은 영화 전체를 읽는 열쇠다. 감독은 이 제목에 여러 은유를 담았다고 한다. 첫 이야기에서 유진과 현오는 같은 카페에 머물지만 한 사람은 낮에, 한 사람은 밤에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해도 같은 공간 위에서 이어진 낮과 밤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 채 연결돼 있다. 반대로 마지막 이야기는 같은 공간에 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낮이 되고 밤이 되어 가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꿈과 현실, 대비와 연결 사이를 오가는 영화가 끝내 닿는 곳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카페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도 멈추지 않고 관객의 상상 속으로 이어진다. "작고 사소함의 중요성에 손을 들어준 것 같다"는 김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흘려듣던 말 한마디와 스쳐가던 표정 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은 저마다의 우주임을 담담히 증명해 낸다. 우연히 마주한 옆자리의 대화처럼 뜻밖의 반가움으로 다가온 '낮과 밤은 서로에게'. 이 사소하고도 아름다운 발견은 극장을 나서는 이들의 마음에 길고 깊은 잔상을 남긴다. 러닝타임은 80분. 11월 극장에서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