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규의 서울 신도시인문학] 왕의 꿈을 품은 산 …조선의 문을 열다

  • (2) 도봉산 여성봉·우이암의 음양론


[편집자주] 서울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역사와 사람, 권력과 돈, 신화와 풍수가 켜켜이 쌓인 거대한 인문지리의 현장이다. 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전 세계일보 사장)가 2030세대가 알아두면 좋을 서울의 숨은 이야기를 아주경제신문에 풀어낸다. 인수봉과 여성봉·남성봉, 인왕산 마애불과 선바위에서부터 왕의 기운이 서린 바위, 돈의 기운이 모인 명당, 합격과 출세의 공간까지. 풍수지리와 사서삼경, 야사를 넘나들며 일반적 '문화답사’를 넘어 AI 시대에 새롭게 읽는 서울의 신인문지리학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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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방학동에서 촬영한 도봉산. 오른쪽부터 선인봉(708m), 만장봉(718m), 자운봉(740m), 신선대(726m), 뜀바위다. 실제로 5개 봉우리이지만 선인봉과 바로 뒤 높은 봉우리인 만장봉이 겹쳐 4개 봉우리로 보인다. 오행으로는 화산(火山)이지만 형상으로는 왕관의 산이다.]


왜 도봉산(道峯山)인가. 도봉산의 ‘道’는 어디에서 왔는가. 도봉산의 ‘道’는 무엇인가. 성리학의 ‘道’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암 조광조(趙光祖)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도봉산을 즐겨 찾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의‘ 道’를 추구했던 함석헌, 김수영, 김근태가 이곳에 터를 잡은 배경은 무엇인가. 도봉산의 진정한 의미가 말해줄 것이다.

‘디지털도봉문화대전’은 도봉산의 명칭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큰 바윗길이 산 전체를 이루고 있어 ‘도봉(道峯)’이라 명명하였다는 설과 천축사·회룡사 등의 사찰에서 조선 왕조 창업의 길을 닦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 왕조의 흥업은 도봉산의 정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표피적 해석에 불과하다.

‘주역 계사전’은 ‘道’에 대해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라고 했다. 한번 음이 되었다가 한번 양이 되곤 하는, 서로 갈마드는 기운 속에 있는 것이 ‘道’라는 것이다. <도올 주역 계사전> 음과 양이 서로 교차하고 조화를 이루며 변화하는 것이 곧 우주의 근본 원리인 ‘道’라는 의미다.

남회근은 ‘주역강의’에서 “우주 간의 어떤 것도 모두 一陰一陽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있으면 반드시 여자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도봉산의 ‘道’가 그 ‘道’라면, ‘一陰一陽’이 서로 번갈아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도봉산에는 ‘一陰一陽’이 있다. 여성봉(500m)과 남성봉이 바로 그것이다. 여성봉(一陰), 남성봉(一陽), 도봉산(道)...참으로 절묘한 ‘一陰一陽之謂道’의 구도다.

남성봉은 다름 아닌 우이암이다. 우이암(牛耳岩, 542m)의 명칭은 봉우리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일제 강점기에 작명됐다. 그 시절 우시장이 있었다는 북한산우이역 일대에서 보면 소의 귀로 보인다고 해서 ‘우이암’이라 했다지만, 어디를 봐서 소의 귀인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때는 바위의 모습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관음보살을 닮았다 하여 ‘관음봉(觀音峰)’이라고도 했다. 이 역시 어색하다. 산마다 불교식 이름을 붙이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나마 조선시대 관리들이 쓰는 사모(紗帽)를 닮았다 하여 ‘사모봉(紗帽峰)’이라 부른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실제로 우이암 바로 아래 위치한 원통사 마당에서 보면, 우이암은 거대한 남성의 상징이다. 3개의 거대한 암봉 모두가 우람한 남성의 상징이다. 우이암(이하 남성봉)도 사모봉도 아닌 확실한 ‘남성봉(男性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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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원통사 마당에서 촬영한 남성봉의 모습 남성의 상징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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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이미지에서 캡처한 여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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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봉 뒤에서 촬영한 사모 형상의 바위]
 

원통사(圓通寺)는 도봉산의 용맥이 삼각산으로 뻗어가다가 우뚝 솟은 3개의 암봉으로 이뤄진 남성봉 바로 아래에 있는 조계사의 직할 사찰이다. 도선국사가 862년 도선사 창건 직후 도봉산으로 가다가 이곳을 보고 천하의 길지라 여겨 863년 원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원통(圓通)은 ‘절대의 진리는 두루 통한다’는 뜻이다.

원통사는 수락산을 좌청룡, 삼각산을 우백호로 거느리고 한강을 바라보는 길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자연 석굴로 조성된 나한전에서 100일 기도하던 절이다. 기도 마지막 날 이성계는 꿈을 꿨다고 한다. 꿈에 천상의 상공(相公:정승)이 되어 상제(上帝:하느님)를 배알(拜謁)한 것이다. 이성계가 이 꿈 이야기를 무학 대사에게 전달하자 무학 대사는 하늘이 (혁명을) 승인한 것이라며 즉각 거사를 단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성계는 곧바로 개성으로 가서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고려를 접수했다.

앞서 이성계는 무학 대사와 함께 전국의 명승지와 사찰을 순례하며 왕이 되고자 기도했다. 주요 기도처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는 1380년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길에 ‘894년 고려 태조 왕건이 17세의 나이로 103일 기도를 드려 왕이 됐다’는 임실 성수산 도선암 설화를 듣고 이곳에서 3일간 치성을 드렸다. 그러자 천신이 내려와 ‘성수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한다. 왕이 될 것이란 감응이었다. 그래서 조선 건국 후 이성계는 도선암을 상이암(上耳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가 쓴 ‘삼청동(三淸洞)’ 비석도 있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성계는 진안 마이산 은수사에서도 꿈에 산신이 나타나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다스려 보아라.”고 했다고 전한다. 금으로 된 척(尺:자)을 얻는 꿈을 꾼 사람이 왕권을 갖는다는 것은 새로운 왕이 될 수 있는 계시라는 것이다.

그는 또 남해 금산 보리암 동쪽 삼불암 아래의 태조기단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산신령의 감응을 받았다. 그 보답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주겠다고 해서 산 이름을 금산(錦山)이라 했다. 순창 회문산 만일사에서도 건너편 옥쇄봉(玉碎峰)을 보며 100일 기도를 드리던 중 백일이 되는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네 정성이 갸륵하여 내 허락을 하여 주노라. 그러나 대사를 도모할 천시가 아니니 너는 백성 없는 왕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절에 천일향을 시주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지 말고 섬기는 왕이 되도록 하여라.”고 했다.

이성계는 이와 함께 양주 천보산 회암사, 도봉산 회룡사 등 여러 곳에서도 기도했다. 하지만 상제를 친견한 곳은 남성봉의 석굴이 유일하다. 물론 도봉산의 형상이 왕관(王冠)이어서 제왕(帝王)의 기운이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조선시대 관료들은 너도나도 이곳을 찾았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조현명(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원통사 약사전 바로 앞엔 이성계가 상제를 친견한 꿈을 꾸었다 해서 거북바위 등에 새겼다는 ‘상공암(相公岩)’이란 글씨가 있다.

아무튼 조선시대 한양 일대에서 최고의 기도처는 원통사였다. 1472년(성종 3년) 노인의 말에 따라 도봉산 큰 바위 굴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노인(老人)이 승정원(承政院)에 와서 고하기를, ‘도봉산(道峯山)에 큰 바위 굴(巖穴)이 있는데, 제사를 지내고 번시(燔柴:섶나무를 태움)하면, 반드시 비가 내릴 것입니다.’ 하므로, 승지(承旨)들이 아뢰니, 임금이 곧 내관(內官) 조진(曺疹)에게 명하여 그곳에 가서 제사지내게 하였다.”<성종실록 17권>

도봉산에는 3개의 큰 석굴이 있다. 선인봉 아래의 석굴, 오봉 아래의 석굴, 남성봉 아래의 석굴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처는 남성봉 아래 석굴인 나한전이다. 성종 시절 기우제도 이 석굴에서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보기에도 서울의 최고 기도처다. 도봉산의 왕관 기운(제왕 기운)이 삼각산을 향해 뻗어가면서 3개의 남성봉에 힘차게 솟아 천기(天氣)를 받아 지기(地氣)와 융합되어 이 석굴에 뭉쳐 있기 때문에 큰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이성계가 바로 이 석굴에서 ‘상제 친견 꿈’을 꾼 것은 그만큼 제왕 기운이 강한 곳으로 풀이된다.

이성계는 이 꿈을 꾸고 나서 비로소 무력 사용을 결단하게 된다. 이성계가 1388년(우왕 14년) 5월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만 해도 무력 사용을 주저했다. 곧바로 왕에 오르지 않고 창왕, 공양왕을 옹립해 막후 실세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원래 이성계는 무력에 의한 쿠데타로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신흥무인세력을 결집하고 정도전 중심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 급진파와 연대해 자연스런 정권이양을 추진했다. 하지만 순조로운 정권이양은 쉽지 않았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개혁파였던 정몽주 등이 고려에서도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혁명에 대해서는 강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계와 정몽주는 갈라섰고, 정몽주 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오히려 이성계파는 갈수록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러자 이성계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하늘의 뜻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후 4년째인 1392년 새해 남성봉 아래 석굴에서 100일 동안 기도했다. 무력 사용 여부를 놓고 고민하며 정진한 결과, 꿈에 상제를 친견하고 그 해답을 얻은 것이다. 그 첫발이 1392년 5월 4일 아들 이방원을 통한 ‘정몽주 암살’이었다.

그 결과 이성계는 공양왕이 국왕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논리를 내세워 왕씨(王氏)를 대신해 이씨(李氏)가 왕위에 오르는 역성혁명을 결행했다. 즉 ‘거짓된 왕을 폐위하고 진정한 혈통을 옹립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로 역성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1392년 7월 17일(음력) 감록국사 이성계는 국새를 받고 개성 수창궁에서 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선’ 건국을 선포했다.

아울러 폐가입진에 의한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건국 신화로 재구성했다. ‘고려사’ 머리말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獻大王)께서는 용맹과 지혜를 하늘이 내리셨고 덕업(德業)을 날로 새롭게 하셨으며 성스러운 무공을 펴시어 전란을 평정하고 백성들을 다독이시어 천명을 잡으시고서 왕위에 올라 나라를 여셨습니다.” <‘고려사’를 찬진하는 전>

세종도 선조들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太宗)’ 등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찬해 백성들에게까지 보급했다. 신화의 역사화 작업이다. 그 신화는 첫 장에 바로 나온다. “해동육룡(海東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나라를 세우니 하는 일마다 하늘의 복을 받았으며, 옛 성인들과 다를 바 없다."

해동 6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말은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배경에 깔고 있다. 이성계가 석굴에서 꾼 꿈에 본 것은 여섯 마리 용마(龍馬)가 이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있는 상제였다고 한다. 건괘의 육효(六爻)와 꿈속의 여섯 용마의 수가 6으로 일치한다.

이처럼 원통사 석굴에 얽힌 전설은 조선 건국을 미화하는 신화로서는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이성계는 평소 입만 열면 이방원 등 자녀들과 신하들에게 ‘상제 친견 꿈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는 천도(遷都)와 그 궤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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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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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요 이력  

△경남대 대학원 정치학박사 △세계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 △스포츠월드 편집국장 △세계일보 겸 스포츠월드 사장 △중소기업신문 회장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 △ (현) 미국 캐롤라인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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