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반도체 연합군 '라피더스', 민간 참여 30개사 돌파… '2나노 자립' 가속

  • IBM도 참여 가시화… 민간 출자액 1600억 엔으로 계획 상회

  • 히가시 회장 "마지막 기회" 배수진… TSMC 3나노 가세로 日 생태계 격변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목표로 설립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Rapidus)’에 대한 일본 민간 기업들의 자금 지원이 당초 계획을 넘어선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미 IBM의 지분 참여까지 가시화되면서, 라피더스가 대만에 쏠린 첨단 반도체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고 일본 내 제조 기반을 확보할 핵심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4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 보도 등에 따르면, 라피더스의 2025년도 민간 출자 유치액은 목표치인 1300억 엔을 상회하는 1600억 엔(약 1조5000억 원) 이상이 될 전망이다. 이번 증자의 핵심은 주주 구성의 양적·질적 확대다. 도요타, 소니, NTT 등 초기 8개 주주사 체제에서 혼다, 후지쓰, 캐논, 교세라 등 약 20여 개의 신규 기업이 가세하며 총 주주사 수는 30개 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 IBM의 출자 검토다. IBM은 현재 라피더스에 2나노(㎚·10억분의 1m) 공정 기술을 공여하는 핵심 파트너다. 미 당국의 심사를 거쳐 IBM이 주주로 참여하게 되면 라피더스의 첫 외국인 주주가 된다. 이는 기술 협력을 넘어 자본 결합을 통해 ‘미·일 반도체 동맹’을 공고히 하고, 특정 국가와 기업에 편중된 첨단 반도체 제조 거점을 일본으로 다변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일본 주요 기업들은 라피더스 참여를 단순한 정책 협조가 아닌 생존을 위한 투자로 인식하고 있다. 소프트뱅크와 소니그룹은 각각 210억 엔을 출자하며 민간 최대 주주가 된다. 소프트뱅크는 자회사 ‘사이메모리(SAIMEMORY)’의 메모리 설계 기술을 라피더스의 AI 반도체 제조 공정과 결합해 시너지를 낸다는 복안이다.

후지쓰 역시 200억 엔을 투입하며 힘을 보탰고, NTT(100억 엔)와 도요타자동차(40억 엔)도 추가 출자를 확정했다. 특히 NTT는 차세대 통신 인프라인 ‘IOWN(아이온)’의 핵심 부품인 광전융합 반도체를 라피더스를 통해 조달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홋카이도전력, 후지필름 등 산업계 전반에서 5억~200억 엔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며 ‘반도체 자립’을 향한 민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다.

라피더스의 히가시 테츠로 회장은 최근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락을 ‘삶은 개구리(유데가에루)’에 비유하며 절박함을 드러냈다. 그는 1980년대 세계 1위였던 일본 반도체가 삼성전자와 TSMC에 패배한 원인을 ‘수직 통합형’ 구조의 고착화와 이익 중심 경영의 결여로 진단했다.

히가시 회장은 “2나노 양산은 위험한 도박처럼 보일 수 있으나, 도전하지 않았을 때 일본이 기술 낙후국으로 전락할 리스크가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2030년경 AI 데이터 폭증으로 첨단 반도체 수요가 공급을 10~30% 상회할 것이라는 관측을 근거로 시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과거처럼 모든 것을 독자 개발하는 폐쇄성을 버리고, IBM 등 해외 파트너와 적극 협력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2나노 벽을 넘겠다는 전략이다.

일각에서는 수만 명의 엔지니어를 보유한 TSMC에 맞서 라피더스가 고작 1000명 규모의 인력으로 승부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인력 부족의 결과라기보다, 라피더스만이 지향하는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과 일본 반도체 업계의 현실을 반영한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우선 라피더스는 범용 제품을 찍어내는 거대 파운드리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 이들이 내세운 핵심 전략은 이른바 ‘RUMS(Rapid & Unified Manufacturing Service)’다. 모든 고객을 상대하는 대신, 속도가 생명인 특정 분야의 고객을 타깃으로 설계부터 제조까지의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고부가가치 맞춤형 공방’을 지향하는 것이다. 방대한 조직보다는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한 슬림한 조직이 오히려 ‘단기 납기’라는 목표 달성에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여기에 일본 반도체 산업의 뼈아픈 현실도 작용했다. 2000년대 초반 첨단 반도체 개발에서 손을 떼며 인재 양성의 맥이 끊긴 탓에, 현재 현장에서 뛸 수 있는 숙련된 인력은 대부분 은퇴를 앞둔 고령의 베테랑들이다. 히가시 회장은 이에 대해 “제조 장치나 소재 메이커와 같은 토대가 일본에 남아 있는 동안 시작하지 않으면 산업을 부활시킬 기반이 사라진다”며 “엔지니어가 고령화되고 있는 문제도 있어,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결국 라피더스는 무리하게 몸집을 불리기보다, 이들 베테랑 1000명의 노하우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신규 인력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기술 전승의 골든타임’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인력을 무한정 늘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핵심 기술을 보유한 정예를 중심으로 공정을 안정화하는 것이 실질적인 방책이라는 뜻이다.

라피더스가 독자 노선을 걷는 사이, 세계 최대 파운드리인 TSMC 역시 일본 내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 보도에 따르면 TSMC는 구마모토 제2공장에서 당초 계획을 상향한 3나노 최첨단 제품을 양산하기로 하고, 총 170억 달러(약 약 24조9000억원)의 투자 계획을 확정했다.

일본 정부는 TSMC의 3나노 제품은 범용 AI와 자동차용으로, 라피더스의 2나노 제품은 고성능 특화 칩으로 용도가 구분되어 두 라인이 중복 투자되는 상황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오히려 외국 기업인 TSMC의 제조 거점과 자국 기업 라피더스의 첨단 기술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을 통해 일본을 글로벌 반도체 제조의 중요 축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라피더스는 2027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홋카이도 지토세 공장 가동을 준비 중이다. 2나노 시제품 동작 확인 등 기술적 이정표를 달성하며 신뢰를 쌓고 있지만, 대량 양산 시 반드시 넘어야 할 ‘수율 확보’와 안정적인 ‘고객사 유치’는 여전한 과제다.

또한 2031년까지 필요한 총 7조 엔의 투자금 중 정부 지원금을 제외한 민간 자본 1조 엔을 지속적으로 수급할 수 있느냐도 성패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일본 반도체 부활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인 라피더스가 기술적 성과를 넘어 상업적 자립에 성공할 수 있을지 전 세계 반도체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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