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 이해찬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에서 한 시민이 조문을 마친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6127 사진연합뉴스 사진공동취재단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에서 한 시민이 조문을 마친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6.1.27 [사진=연합뉴스, 사진공동취재단]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말을 아끼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대신 한 번 한 말은 쉽게 거두지 않았다. 대통령 앞에서도, 다수 앞에서도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충돌이 잦았고 논란도 많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분명했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이해찬은 민주화 세대 정치인이다. 1988년 국회에 입성한 뒤 7선 의원을 지냈고,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정치의 중심에 오래 있었지만, 그는 늘 관례보다 논리를 앞세웠다. 타협의 기술보다는 주장의 근거를 중시했다. 그래서 불편한 사람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그의 성격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IMF 외환위기 이후 청년 실업이 급증하자 그는 교사 정년 단축을 추진했다. “정년을 줄여 청년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통령이 반대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전화 통화 중 “이따위 장관 안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는 일화는 정치권에서 오래 회자됐다. 며칠 뒤 김대중 대통령은 이해찬의 논리로 반대자들을 설득했다. ‘천하의 DJ도 이해찬에게 졌다’는 말이 나왔다. 그의 고집은 성깔이라기보다 책임의 문제였다. 결과를 자신의 이름으로 떠안겠다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이해찬을 강성 정치인으로만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중국과 동북아 문제를 평생의 관심사로 삼은 지식인이었다. 직접 중국 관련 계간지를 창간해 젊은 연구자들의 글을 실었다. 공직에 들어간 뒤에도 공부와 토론을 멈추지 않았다. 견해가 다를 때도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했다. “선수들 이야기는 들어야 한다”는 말이 주변에 남아 있다. 쉽게 굽히지는 않았지만, 듣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그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애연가였지만 상대가 힘들어하면 말없이 담배를 껐다. 출장 중 같은 호텔에 묵으면 아침 식사를 꼭 함께했다. 선거에 나가 떨어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농담하곤 했는데, 실제로 그는 모든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7선에 올랐다.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관계를 중시했다는 평가가 많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활동하던 말년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중국과 동남아를 더 봐야 한다”며 해외를 오갔다.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난 뒤에도 시대의 변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베트남 호찌민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현장에 있었던 삶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고인을 두고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며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안정과 개혁을 조화롭게 이끈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강물은 굽이쳐도 결국 바다로 흘러가듯, 그가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 균형발전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해찬은 타협의 상징은 아니었다. 대신 불편한 질문을 남긴 정치인이었다. 합의와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말이 지워지는 정치에서, 그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는 말을 하려 했다. 그래서 충돌이 잦았고 오해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 남는 것은 그 말이 서 있던 자세다.

직함은 사라졌다. 그러나 태도는 남았다. 한국 정치에서 이해찬이라는 이름이 남긴 흔적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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